표식
알바니아에는 피의 복수라는 관습법이 존재한다.
특정 지역에서는 국가의 성문법 위에 관습법이 존재하며, 살인에 대한 복수가 허락된다.
살인에 대한 피의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명예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함과 동시에 나의 가족의 복수는 영예롭고, 필연적인 반작용으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은 그 운명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살해하고 또 살해된다.
그는 3월에, 정해져 있던 살해를 끝내 시행한다.
그리고 한 달간만 생명을 유예받는다.
그에게 어중간하게 남은 4월은 부서진 무언가와 다름 아니다.
나는 책의 주인공이 되어,
그의 심정을 대변하여 자그맣게 적어본다.
나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따라
성문법이 아닌 관습법에 따라
표식이 그려진 이를 살해한다.
그에게서 생명을 앗아감에 따라
묶여있던 질곡을 풀어줌에 따라
표식은 그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온다.
표식이 내 이마에 새겨짐에 따라
그 길로 흐르게끔 짜여진 운명에 따라
기정의 존재는 나의 표식을 찾기 위해 운신한다.
종국에 그가 나를 찾아 피의 복수를 함에 따라
그의 이마 위 흐릿했던 표식이 서서히 짙어짐에 따라
또 다른 존재는 그의 표식을 찾으려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우리의 우연에 따라
우격으로 만들어낸 우리의 필연에 따라
그 존재들은 또 다른 '나'이게 된다.
같은 운명을 갖고 태어난 그들과 나. 나는 그이고, 그는 또 나이다. 살해의 연쇄 속에서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n번째의 나는, 죽이고 또 죽임 당한다. 우리는 살해를 할 의무를 짐과 동시에 살해당할 운명도 같이 쓴다.
그런 운명에 따라
나는 나를 살해하고
또다시 살해된 나는 또 다른 나를 죽이지만,
여러 명의 나는, 살인에 대한 어떤 악감정도 없음을 분명하게 표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