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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Jul 05. 2023

역사와 자연이 숨 쉬는 삼척

내 고향 삼척 이야기

   내 고향은 관동팔경 죽서루가 우뚝 서 있는 삼척이다. 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희로애락이 교차하였지만 어머니 품속같이 늘 포근하다. 삼척은 태백산맥 줄기에 있는 두타산과 청옥산에 둘러싸이고, 앞에는 넓고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다. 동굴이 많아서 지하 속까지도 아름답다. 또한, 2,000여 년의 역사가 있기에 가는 곳마다 옛 조상들의 발자취를 쉽게 엿볼 수도 있다. 흔히, 삼척은 시멘트와 석탄 중심의 공업 도시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삼척지방의 여러 곳을 여행하다 보면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두타산 무릉계곡

   삼척은 원래 실직국이었다. 서기 102년, 신라 파사왕에 복종하여 신라에 흡수되었고, 505년에 신라 지증왕이 실직국을 실직주로 체제를 전환하여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했다. 그 후 경덕왕이 757년, 삼척군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태수를 두고 4개 현을 다스리게 하였다.


   삼척시와 동해시(옛 삼척군 북평읍)에서 고인돌을 비롯하여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석기시대 때부터 북방민족이 태백산맥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서 농경생활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곳은 왕족이나 관리들이 낙향하거나 피신하여, 자연을 즐기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람 있게 마무리한 고을이다. 이성계 고조부, 목조 이안사는 고려 말 1230년쯤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였으며 삼척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의 묘, 준경묘와 영경묘를 활기리 명당에 썼다. 그래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고 삼척 활기리가 조선왕조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준경묘와 연경묘는 왕릉 수준으로 잘 보호되고 있다.

준경묘

   고려시대, 문인 이승휴는 정세가 어지러운 나라 걱정으로 충렬왕에게 진언을 하였지만 오히려 친원 세력과 왕의 미움만 사게 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삼척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두타산 자락에 위치한 천은사(天恩寺) 부근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대서사시, '제왕운기'를 저술한 것이다.

   고려 말, 신재 심동로 선생은 낙향하여 삼척 심 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분도 고려 말의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렵겠다는 정세를 판단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공민왕이 적극 만류하였으나, 결국 그가 태어난 삼척군 북평(지금의 동해시)으로 낙향했다. 공민왕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동쪽으로 간 노인(어른)이라고 동로(東老)하는 이름을 직접 하사했다. 그가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 동해시 추암 촛대바위 앞에 있는 '해암정(海岩亭)'이다. 추암 촛대바위는 애국가 첫 장면에 나오는 동해 일출 광경으로 유명하다.

추암 촛대바위

   동해시 천곡동에 남양 홍 씨 송재 홍응부의 신도비가 있다. 홍응부는 관동지방에서 학식이 높기로 소문이 났으며 덕행이 뛰어나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국이 혼란하여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선비의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있다는 소문이 임금에게 전해져 효종 을미 1,650년 나이 53세에 과거시험을 치르고 통정에 올랐다. 이 신도비 뒤에는 홍응부 선생이 현종 9년 1668년,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 '애연정(僾然亭)'이란 정자를 창건했다. 고종 때의 이조판서 홍종헌이 이 정자의 창건기를 썼으며 조선말 영의정 홍순목의 기문이 있고, 한말의 명필 소남 이희수와 만재 홍락섭의 액판도 걸려있다.


   삼척시 성북동과 사직동에는 실직군왕과 군왕비 묘가 있다. 실직군왕은 신라 경순왕의 손자, 김위옹으로 고려 왕건에게 복종하여 실직군왕에 봉해졌고 삼척 김 씨 시조가 되었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은 근덕면 궁촌으로 쫓겨와 살았으며 근처 살해재에서 자객에게 교살되었다고 한다. 공양왕 묘는 삼척시와 고양시에 각각 있다. 자객에 의해 시신이 분리되어서 두 곳에 있다는 학설도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삼척 시청은 공식적으로 공양왕 제사를 궁촌리에 있는 능에서 올린다.


   관동팔경 제일루로 손꼽히는 '죽서루'는 삼척 시내 성내동에 위치하고 다. 그곳에는 이이, 허목, 김효손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바다를 향하지 않고 내륙의 높은 산과 오십천 맑은 물을 바라보고 절벽 위에 우뚝 서있다.

   고려시대 이승휴가 창건했으며 조선 전기 삼척 부사, 김효손이 중창하여 지금에 이른다. 강원도 관찰사였던 정철 선생의 관동별곡을 읽어보거나, 조선시대 화가, 정선의 그림만 봐도 죽서루의 경치가 아주 빼어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진주관 아래 흐르는 오십천은 태백산 그림자를 담아 동해로 흘러가니 차라리 그 물줄기를 한강으로 돌려 목멱(남산)에 대고 싶구나!"라고 죽서루를 예찬했다.

죽서루

   조선 중기, 대표 학자이자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은 삼척부사를 지냈다. 그는 조수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 삼척 정라진 근처에 전서체로 유명한 척주동해비를 세웠는데, 그 이후에 해일 피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허목의 주술적 사상과 주민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허목도 왕실의 상복 문제로 자기 의견을 고집하다  되어 삼척으로 왔는데 이 고장의 향교를 육성시키고 삼척의 역사 기록지, 척주(陟州, 조선시대 삼척의 이름)지(誌)를 창간하였으며 이 고장 주민들의 소득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삼척시 근덕면 맹방리에 위치한 문화재, 교수당은 고려 말 홍준이란 교수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목은 이색 선생의 제자인 남양 홍 씨 준은 고려 말(1388년, 우왕 14).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나라에 큰 변이 생길 것을 예상하여 춘주(春州) 교수직을 버리고 이곳으로 피신했다. 목은 선생은 제자, 홍준을 위해 시를 지어 보냈으며 이 시판이 교수당에 걸려 있다. 교수공 홍준은 나의 중시조 되시는 분이다.

남양 홍씨 교수당 사적비

   삼척지방(동해시 포함)에는 누구의 후손들이 살아왔는지 살펴보면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삼척 김 씨 시조, 김위옹의 후손들이 고려 초부터 살아왔다. 고려 말부터는 삼척 심 씨 심동로의 후손과 입삼척한 남양 홍 씨 홍준의 후손들, 조선시대 세종 때에는 명주(현재 강릉)에서 교수를 지내다 낙향한 김자현의 후손인 강릉 김 씨들, 정몽주의 현손, 사맹 공 정도의 영일 정 씨 후손들, 을사사화를 당하여 입삼척한 강릉 최 씨 후손들이 살아왔다. 그리고 다른 여러 씨족들과 함께 모여 오손도손 정답게 살아오면서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농경을 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강원도 벽지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하여 곳곳에 효자비와 충효비가 세워졌다.

초곡 용굴촛대바위

   삼척지방에는 주민들이 예로부터 영산(靈山)이라고 는 두타산과 청옥산이 있다. 이곳에는 용추폭포를 비롯, 삼화사와 무릉반석, 학소대, 쌍폭, 두타산성 등이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다. 약간 내륙으로 접어들면 신비하고 웅장한 환선굴과 대금굴이 개발되어 관광객이 편하게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장호 해변의 해상 케이블카와 레일바이크, 해신당 공원, 초곡 용굴촛대바위와 이사부 사자공원 등이 관광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현재 KTX도 동해시까지 운행하며 교통이 편리하다. 몇 년 전, 대명콘도 쏠비치 삼척이 추암 촛대바위 인근 해변에 들어섰고, 전국의 많은 관광객이 삼척을 찾고 있다. 나는 역사와 자연이 숨 쉬는 내 고향 삼척이 자랑스럽고, 시간이 날 때마다 고향을 찾는다.


(東原 김영기 선생의 <전천강은 흐른다 (분토기 4)>에서 일부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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