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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Jul 06. 2023

슬픈 섬, 마라도

   "이제 시작입니다. 끝은 돌아서면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합니다. 마라도는 우리 땅 끝이 아니라 우리 땅의 시작입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렇게 마라도는 시작입니다. 마라도에 서면 희망이 보입니다."

   마라도 성당의 설립자, 민성기 요셉 신부님이 쓴 '마라도 영성'이라는 글이다.


   제주도 여행 열흘째, 아들이 휴가차 제주도에 내려와 우리 부부 여행에 합류했다. 우리는 송악산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마라도에 갔는데, 약 35분이 걸렸다.

   마라도는 대한민국 최남단에 있는 섬으로 모슬포항에서 11km 떨어져 있다. 해안선의 길이는 4.2km이고, 최고점은 39m로 주민수는 약 100여 명이다. 1883년(고종 20), 대정에 살던 김 씨 일가가 개간 허가를 받아 입도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라도는 제주목사가 귀양살이를 보낸 사람이나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임시로 거주했던 곳이다. 이 섬은 개척 이전, 인근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다소 신비하게 여겼으나 정작 입도를 꺼렸다. 당시 대정 마을 주민들은 망종(6월 6일경) 이전, 마라도에 들어가면 흉년이 온다고 믿었다. 그때에는 살림이 울창하고 해산물이 풍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겨울, 파도가 심한 이곳을 드나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망종이 지나면 날씨가 좋아지면서 바람이 적게 불고 파도가 잔잔해져서 이 시기에 마라도에 상륙하여 나무를 베고 해산물을 채취했다고 한다.


   마라도에 도착해 약간 비탈진 길을 올라가니, 여럿 짜장면집이 눈에 띄었다. 주요 메뉴는 톳짜장과 돌미역짬뽕으로 TV에 나온 음식점이 많아서 유명세를 치르는 듯했다. 우리도 한 음식점에서 톳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식당에서 나와 그리 멀지 않은 '할망당(애기업개당)'으로 갔다. 이곳은 마라도의 대표적 민속문화 유적으로 할망은 해녀들이 바다에서 고된 물질을 할 때, 안전하게 보살펴주는 신으로 믿어 왔으며, 지금도 정성껏 모시고 있다.

   150여 년 전, 모슬포에 사는 해녀들이 풍선을 타고 마라도에 들어왔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 아기를 많이 낳아 먹고살기가 힘들었을 때였다. 바다에서 전복과 해산물을 잡으며 물질을 해야 하는데, 우는 아이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어 애를 돌볼 열네 살짜리 여자아이, 애기업개도 태워서 왔다. 그런데 며칠 동안 풍랑이 거세 섬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하루는 우두머리 해녀가 꿈을 꾸었다. 애기업개를 제물로 바쳐야 바다가 잠잠해져 이 섬에서 나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을 거라고 했다. 결국 해녀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 열네 살짜리 애기업개를 두고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한 해녀가 "네가 달려가 바위에 걸린 저 기저귀를 거둬 오너라!"라고 말하자 애기업개가 기저귀를 가지러 간 사이, 해녀들은 애기업개를 마라도에 떼어놓은 채 목놓아 부르는 소리를 뿌리치고 노를 저어 마라도를 떠나버렸다. 그날 풍랑은 잠잠해져 해녀들이 모슬포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계절이 한차례 바뀌어 봄에 해녀들이 다시 마라도에 갔을 때, 그 애기업개는 모슬포가 보이는 언덕에서 앉은 자세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라도 할망당제는 매달 음력 초이렛날 이곳에 사는 해녀들이 빠짐없이 찾고 있다. 평소에 꿈자리가 좋지 않고 집안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할망당으로 간다. 할망당으로 갈 때 쌀밥 한 그릇과 과일, 생선 한 마리 떡과 술을 제물로 올린다. 그리고 소원을 빌면서 제주 할망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어느 섬이나 전설이 있지만 마라도 주민들이 수시로 할망당으로 가, 제사를 지내며 집착하는 것은 척박한 땅에서 고단함을 함께 해온 할망신이 자신들의 고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할망당 안을 들여다보니 불 켜진 초가 여러 개가 보였다. 

   할망당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묫자리 두 곳이 나타났다. 비석에는 '처사 김공지묘(處士 金公之墓)'라고 각각 새겨져 있다. 아마도 최초 입도한 김 씨나 그의 후손의 묘라고 생각했다.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글을 읽은 선비였는데,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라도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마라도는 전통신앙을 믿고 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곳엔 교회, 성당과 절이 하나씩 있다. 기원정사 입구에는 '국토 최남단 해수관음성지'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성당은 마라도 해역에서 많이 잡히는 전복과 문어와 소라를 형상화하여 디자인했다고 한다. 성당입구에 이 성당을 설립한 민요셉 신부님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왠지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었다. 어떤 연유로 신부님이 마라도에 왔는지 알 수가 없고, 57세를 일기로 2004년에 선종하셨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의 신부님이다.

   성당에서는 성경 이어쓰기를 하고 있었는데, 천주교 신자인 아들은 성경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성당은 아름답고 소박한 느낌을 주었으며, 여러 관광객이 호기심을 갖고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다.

   성당을 지나가자 마라도 유인 등대가 눈에 보였다. 마라도 등대는 일제강점기, 1915년 3월에 처음 불을 밝혔으며, 밤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에게는 희망의 불로 불린다. 세계 각국의 해도(바다지도)에 제주도는 표기되지 않아도, 마라도 등대는 표기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다.

   마라도 전체를 천천히 걸으면서 둘러보니, 약 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이 섬에 오기 전, 마라도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망당의 안내문을 읽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전설이라고 하지만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도 가련한데, 14세 어린 나이에 마라도에서 희생의 제물이 된 어린애기업개를 생각하면 가슴이 애잔하다.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민속신앙의 필요성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이로 인해 약한 자의 인명이 희생당하는 부작용이 안타깝기만 하다.

   1960년대 정부는 미신타파 운동을 벌여서 할망당을 폐쇄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해녀들이 복구하여 다시 할망신을 섬겼다고 한다. 그만큼 해녀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토속신앙이 어릴 때부터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가 없고 새도 없는 쓸쓸한 마라도. 전기와 물이 귀하고 가뭄으로 고생하며 힘들게 살았던 외딴섬. 옛날에는 농사와 해산물 채취로 생계를 꾸려갔지만 지금은 짜장면집과 횟집, 그리고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 이치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마라도에서 큰소리로 고객을 부르는 음식점 주인을 바라보고, 슬픈 섬에서 인생의 역경을 극복하는 용감한 외침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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