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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Jul 06. 2023

정라진 장옹 이야기

  오늘은 중학교 동창, 장 사장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장 사장은 어린 시절, 삼척시 정라진(汀羅津)에서 성장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군사기지였던 정라진은 화려했던 옛 모습을 영화로 간직한 채, 지금은 평범한 어항으로 바뀌었다.

   정라진 부근 육향산에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서 있다. 조선 중기, 삼척부사를 역임한 미수 허목 선생의 글씨가 이 비석에 새겨져 있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전서체 비석으로 일컬어진다. 척주(陟州)란 조선시대, 삼척의 이름이다. 이 비석을 세우고 조수간만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이는 허목 선생의 주술적 사상과 주민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라진은 물결이 비단처럼 고운 바닷가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라진 주민들은 나릿골과 건넛불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아왔다. 나릿골의 유래는 나루가 있는 마을, 즉 나루골이 변형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인용된다. 나릿골에서 바라보이는 정라항은 일제강점기에 삼척, 태백지역 탄광이 개발되면서 무역항으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정라진의 전성기는 해방 이후였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동해에는 어족자원이 풍부하고 삼척은 지리적으로 그 중심지다. 해방 이후에는 어항으로 더욱 활기를 띠었고, 나릿골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몰려든 것도 그 무렵이다. 1950~1960년대, 노가리와 오징어가 항구에 산더미를 이루고, 볕 좋고 바람 좋은 마을은 전체가 오징어 건조장이었다. 돈이 넘쳐나,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지만 이들을 수용할 집은 부족했다.

   오십천에서 흘러내린 모래와 자갈이 파도와 만나는 건넛불에 모래톱이 생겨났다. 집이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약 10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이들은 어업 관련 산업이나 공장 근로자가 대부분이고, 특히, 실향민이 많았다.

   장 사장이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은 건넛불의 방 두 개 벽돌집을 구입하여 그곳으로 이사했다.


   장 사장과 함께 칼국수를 먹고, 커피를 테이크아웃하여 늘벗근린공원으로 갔다. 상쾌한 공기와 따뜻한 햇볕으로 기분이 상쾌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아버지 삶에 대한 이야기다.


   장 사장 아버지, 장두남 옹은 인동 장 씨로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2남 8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가 8명이고 남동생이 한 명으로 쌍둥이 형제다. 부잣집 지주였던 친구 할아버지는 대를 이을 장남이라고 지극정성으로 길렀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장 옹은 숨어 지내다가 그해 12월, 흥남부두에서 미군이 철수할 때, 군함 수송선을 함께 타고 혈혈단신으로 북한을 탈출했다. 처음엔 부산에 정착하였으나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경상북도 평해로 갔다.

   평해는 동해안에 위치한 농어촌 마을로 장 옹 같은 실향민이 제법 여럿이 살고 있었다. 장 옹은 농사일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생계를 위해 부득이 어느 집 머슴살이를 했다. 장 옹은 어깨가 딱 벌어지고 힘이 좋으셨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고향도 잊은 채 생존에 매달려 정신없이 농사일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집주인도 그의 성실함을 인정하여 이웃에 사는 한 처녀를 중매했다. 나이가 장 옹보다 11살이 어린 함흥시 근처에 살았던 여성으로 가족과 함께 작은 동력 어선을 타고 남한으로 탈출한 피란민이다. 장 옹은 그 처녀가 마음에 들어 나이를 3살이나 줄여서 자신을 소개하고 얼마 후,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약 1년이 지나 득남하였는데, 그 아들이 바로 내 친구인 장 사장이다.

   친구는 조상의 뿌리도 없는 평해에서 운명적으로 태어났다. 외갓집 친척 한 사람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평해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했다. 사실 삼척이란 곳은 공업 도시로 정라진이라는 제법 큰 항구도 있으며 교육열이 높은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석탄과 항구가 있는 덕분에 시멘트 공장, 화력발전소, 제철소 등 공장이 많았고 어획량이 넘쳐나 실향민을 포함하여 일자리를 찾는 객지 사람이 몰려들었다. 장 옹은 자식 교육을 목적으로 아들이 2살이 되던 1956년도에 삼척으로 이주했다.

   장 옹은 처갓집 식구의 도움으로 정라진 나릿골에 정착하였고, 도로 공사 발파 현장의 근로자로 취직을 했다. 친구 어머니도 수산물 관련 일을 하면서 돈벌이를 하셨다.

   몇 년이 지나자 장 옹은 도로 공사 일은 그만두고 수입이 좋았던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 사람들은 뱃사람이라고 쉽게 불렀다. 그 직업은 높은 파도와 싸워야 했으며 한밤중에 고기를 잡는 일이라 적잖이 힘들었다. 어선의 규모는 10여 명이 타고 조업하는 동력 어선이었다.

   어느 날, 조업을 마치고 정라항으로 돌아올 때, 배가 큰 파도에 휩쓸려 항구에서 불과 500여 미터 남겨둔 채 전복하였다. 장 옹은 필사적으로 헤엄쳐 육지로 나왔지만 동료 선원 몇은 나오질 못해 익사했다. 장 옹은 큰일을 겪고난 후, 삼척 화력발전소 경비로 취직했다. 수입이 적었으나 건설 현장이나 오징어 잡는 일보다 훨씬 수월했다. 또 몇 년이 지나자 회사 사정으로 경비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여럿 궁리를 한 끝에 리어카를 구입하여 정라진의 한 건어물 도매상의 일을 돕고 노가리와 오징어 포장하여 기차역까지 운반했다. 당시 친구는 어머니와 함께 집 근처 건넛불에서 노가리와 오징어를 건조하였으며 틈나는 대로 아버지도왔다. 동네에서는 화목한 집이라 소문이 났고, 특히, 친구를 효자라고 불렀다. 친구는 사춘기에도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리어카를 뒤에서 열심히 밀었다.

   친구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었는데 가정 형편도 어렵고 동생도 여럿이라 진학을 미루고 1년간 부모님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년 동안 부모님을 돕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친구는 그다음 해, 5년제 국립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동생들도 공부를 잘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따랐다. 친구가 입학한 학교는 강원도에서 인기 좋은 이공계 학교로 공부를 잘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지금 강원대학교 공과대학(삼척 캠퍼스)의 전신이다. 친구는 이 학교를 졸업 후, K대학교 3학년 건축과에 편입하여, 2년을 더 공부하고 졸업했다. 그때, 다섯 살 어린 남동생은 공부를 잘해 서울에 있는 K대학교 영문학과에 합격하였으나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건어물 도매상 사장님이 전해 듣고 대신 등록금을 납부해 주었다. 그 뒤로는 내 친구가 동생을 도왔으며, 동생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교를 힘들게 마쳤다.

   친구는 주택은행 입행 시험에 합격한 후, 은행원으로 근무한 지 몇 년이 흘렀고 동생은 본인이 희망했던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부모님은 두 아들의 취직에 무척 기뻐하셨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국민의 큰 관심속에 방송되었다. 장 옹은 서울에 올라와 친인척을 찾으려고 여의도 광장을 헤매고 다녔다. 주택은행에서도 실향민을 돕는 취지에서 친구에게 특별 휴가를 내주었고 친구는 여의도에서 아버지를 적극 도왔다. 한 번은 방송에서 아버지 비슷한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대전으로 달려갔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

   며칠 후, 장 옹은 별 성과 없이 정라진 집으로 내려갔고 친구는 아버님을 위로하기 위해 주말에 고향을 찾았다. 그때, 장 옹께서 어머니와 큰아들인 친구를 조용히 부른 다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 이북 고향에서 이미 결혼을 했고 아들이 한 명 있다." 

   그 아들 이름은 돌림자 때문에 친구 이름과 끝자만 달랐다. 친구 어머니는 순간, 흠칫 놀랐으나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첫 번째 부인의 생사도 알 수 없으니 부모님 제사 때 함께 모시자고 제안하였는데,장 옹은 고맙다고 대답했다. 이 세상이 원망스럽고 슬픈 나머지 모두가 크게 울었다고 한다.

  KBS 이산가족 찾기 행사 후, 장 옹은 술을 자주 드시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셨다. 그때부터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하여 1993년에 72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친구는 정라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공동묘지에 아버님을 정성껏 모셨다. 함흥에서 1950년, 고향을 떠나온 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삼척 정라진에서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친구 어머니는 정라진의 한 아파트에서 사셨는데 건강이 악화되어 약 10여 년 전, 친구의 집으로 모셨다. 지금은 심신이 건강하지 못해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IMF 시절, 친구는 성실한 근무 자세와 탁월한 실적을 쌓아 주택은행을 합병한 국민은행 지점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지점장 시절, 국민은행 지역봉사단 단장을 5년간 맡아서 가난한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을 헌신적으로 했다.

   지금은 창호 제조업체를 경영하는데, 직원들이 바쁠 때, 직접 트럭을 몰고 현장에 수시로 나타난다. 고객을 위해 납기와 품질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거래처 회사들이 그를 아주 신뢰하고 있다.

   얼마 전, 친구는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이북 5 도민 공원묘지를 운 좋게 구입하여 아주 기쁘다고 듣기 좋은 자랑을 했다. 친구는 아버지를 공동묘지에 모셔서 솔직히 마음이 조금 걸렸다고 한다. 이제는 아버지가 그리워하던 고향땅이 가깝고 함경남도 묘역이라 고향 사람들 곁에 모실 수 있게 되어 만족한다고 했다.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정라진 근처 공동묘지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이곳으로 이장하여 어머니와 함께 모실 계획이라고 한다.


   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힘들게 일하며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셨던 친구의 부모님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돕고 동생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친구를 생각하면 존경스럽고 애틋한 마음도 든다. 친구는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으나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세상을 탓하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는 늘 "주어진 운명에서 최선을 다하면 더 이상 후회는 없다."고 의연하게 말했다.

   친구의 앞날에 건승과 영광이 있길 기원하며, 장 옹의 명복을 재차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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