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 진실 앞에 직면하여

오늘의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기에, 영원히 침묵을 지킬 청각장애인들

나는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차별받고 타인과 소통 안 되는

농인의 정체성을

일생 동안 체화했다.

하지만 농인들은 나를 말한다는 이유로

농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한국어를 음성으로

낼 수 있는 사실 자체가

나를 부정하는 요인이 된다.

뿌리 깊은 모순.


나는 일부러 라도

벙어리 연기를 해야 함을

은근하게 강요받는 처지다.


"너는 말을 할 수 있으니,

진정한 청각장애인이 아니다."



나는 농인도 아니고, 구화인 도 아니고,

인공와우 성공자도 아니며,

농사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다.


청력은 기술적으로 일부 보정되었지만,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배제되고 고립된 장애인이고,

수어로도, 구어로도 완전히 소속감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계의 존재다.


보청기, 인공와우로 청력보정이 가능한

브런치에서 볼 수 있는 청각장애인들은

다소 불편함이 있더라도

다른 청각장애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청력이 좋고


그럼에도 장애 혜택을 받을 수 있기에

그들 자신이 일반 사회에서

일반적인 회사를 다니며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비장애인 사회에서 사는 청각장애인 들은

"듣지 못해서" 단순 빵집 알바도 안되고,

"듣지 못해서" 말을 못 하고,

"듣지 못해서" 전화통화가 안되고,

"듣지 못해서" 사람과 의사소통이 안 되는

청각장애인이 있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 .



인공와우를 한 청각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청각장애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안 들린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른다.


물론 어느 정도 불편한 것이 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고 부정하지는 않겠다.


이 논리는 제 고뿔이 남 염병보다

못하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그들은 사실상 청각장애인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온전히 모른다.


인공와우 사용자들과 나를 단순 비교하면,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것 자체는 같지만

그들은 소통 자체가 막혀서

아예 안 된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꾸 자신들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자신들을 청각장애인이라고 주장하는

브런치의 글에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듣지 못해서 아르바이트가 불가능하다",

"전화가 불가능하다",

"대화가 아예 막힌다"

는 현실이 빠져 있다.


그래서 글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상 ‘진짜로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인’의

삶을 반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청각장애가 있음에도

편의점 알바를 한다는 얘기는

그 청각장애가 알바를 하는데

사실상 장애가 되지 않는 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모순을

비장애인들은 잘 캐치할 수 없다.


이들의 글에서는

"듣지 못하는" "소리 없는" 청각장애인이라는

명제가 사실상 성립하지 않는다.




인공와우를 한 청각장애인들은

보통 세 가지 케이스로 나뉜다.


1. 아주 어릴 때(1~2살)

난청을 발견하여 수술을 일찌감치 한 경우.


2. 언어 습득기(3~4살) 때는

청력에 이상이 없었다가

나중에 서서히 청력손실된 경우.


3. 청소년이나 성인기에 돌발성 난청이 와서

바로 수술을 감행한 경우.


이러한 케이스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인공와우 수술자들은

"배려가 없으면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

으로써의 삶을


오랜 기간 겪지도 않아서

나는 사실상 이들이

"청각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은 자꾸 자신들이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라고 강조하며

자신들이 장애를 극복했다고 강조한다.


나에겐 이들이 상처 난 자신들의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집단적으로 자기 암시를 거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충분히 극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들렸기에 극복하는 것이 가능했음에도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인공와우 수술을 하면 무조건

잘 들린다고만 한다.


하지만, 파동인 소리가

단지 뇌에 전기신호로

전달된다고 해서

'듣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진짜로 '듣는다'는 것은,

들리는 소리를 의미 있는 언어로 인식하고

해석하는 과정까지를 포함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애 초기,

특히 언어습득기 동안

소리를 기반으로 언어를 배우는

지속적이고 자연스러운 훈련이 필요하다


거의 대부분의 인공와우 수술자들은

이 중요한 과정을 무의식적으로

이미 거친 상태에서 수술을 받은 경우가 많다.

혹은 수술 후 바로 들리는 소리를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언어를 배운 케이스다.

그래서 이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소리가 곧 언어라고 착각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수술을 해서

청신경을 통한

소리 자극신호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져도

뇌는 청각 피질이 이미 없어졌기에

소리를 들어도

언어로 인식하기 어렵다.



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면서,

자신들이 "들리지 않는 경험"을

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은 '진짜로 들리지 않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경험하지도,

설명해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아무도 이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없어서

보청기로 청력 보정이 가능한 청각장애인과

인공와우 수술을 한 청각장애인은

영영 "들리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설령 누군가 진실을 말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인지부조화를 겪고,

결국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하게 될 것이다.


이비인후과 의사들도

수술로 돈을 최대한 벌어놔야 하니

이러한 "진실"을

구태여 꺼내어 긁어 부스럼 만들려 하지 않는다.

의사들의 기술적 전문성은 존중하지만,

이른바 윤리성이 부족하다고 나는 본다.


그렇게 인공와우 수술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듣는 능력을

자신들이 소위 남들이 하지 않은

청능 재활 노력을 하여

청각장애 극복을 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면서


그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못한,

인공와우 수술을 해도

소리를 온전히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을

듣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한다.


이는 인공와우 수술을 하지 않아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수술자들과는 다른 노력 끝에

마침내 말을 하게 된 나에 대해서도

모욕으로 느껴진다.


하물며 농인들의 시선에선 어떨까.


오늘날 청각장애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공와우 청각장애인들의 인식은

이렇게 사실상 비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청각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다름이 없어서

나는 인공와우 사용자들하고

더 이상 대화도 하고 싶지 않다.


일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상처 난 자존심을 숨기기 위해

자신보다 더 잘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열등한 존재들을 교화하려는 듯,

자신들의 수술 성공담이나

"소리를 들어서 가능했던 일"을

장애 극복 사례로 포장하여

글을 쓰면서

대단하다는 반응을 유도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채운다.

이러한 태도는

나에게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어떤 운동, 어떤 인식 변화든

모든 것은 불편한 소수자의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진실"앞에 직면해 나는 외로이 홀로 섰다.

이 진실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인정하려는 사람도 없다.

나만이 이 진실을 말하며 기록한다.


왜냐하면,

언젠가 이 목소리를 듣고

외롭지 않다고 느낄

또 하나, 누군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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