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원망, 그 대상을 찾아낸다는 것은
도대체 왜?
자살 유가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아니 어쩌면 끝나지 않는 물음 속에 갇히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왜'라는 질문의 답을 찾으려 가까운 과거부터 깊은 과거까지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화살은 나 자신에게로 꽂혀왔다.
나는 엄마의 죽음에 나의 책임이 아주 크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날 따듯하게 말해줬더라면? 내가 엄마 옆에 있었더라면? 엄마가 아프다고 할 때 옆에서 돌봐주었다면? 진작에 아픈 엄마를 알아채고 병원에 데려갔더라면? 엄마가 한 달 동안 핸드폰을 꺼둔다고 했을 때 어떤 신호를 알아챘더라면?
그리고 화살은 언니와 남동생에게로 돌아갔다.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는 언니와 남동생을 보면서 저렇게 슬퍼할 거면서 왜 언니는 그동안 엄마와 연락을 하지 않았지? 왜들 그렇게 엄마를 미워했던 걸까? 남동생은 왜 엄마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한 거지? 그러고는 이번엔 아빠에게로 돌아가 아빠는 왜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지? 이 모든 건 아빠 탓인 것 같아 하는 식의 생각을 하면서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를 원망했다.
그 시간들은 정말 너무도 힘이 들었다. 우리 가족들이 서로를 얼마나 걱정하고 사랑하는지를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랬냐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저 몰랐다 또는 실수였다 라는 상투적인 대답으로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 나는 모든 면에서 부족했다. 나는 엄마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였고, 더 이상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엄마에게 편지를 써주지도 못했으며, 올해 어버이날엔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못난 딸이었다. ]
삶이 힘들어 홀로 세상을 등져버린 엄마의 죽음을 그나마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과거를 더듬고 원망할 대상을 찾고 또 찾았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 모두가 그저 변명만 늘어놓는 가식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내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들고 다니는 것 같았고 자책하는 것은 더 힘이 들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뚱이에 채찍질을 해대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엄마를 원망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이 미운 사람! 하고 말았다. 그게 다였다. 그게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