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관심 대신 연민을,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난 어릴 때부터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들에 더 민감했던 것 같다.
좀 단순하게 살면 좋을 것 같은데, 타고나길 그게 안된다. 소외당하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맘에 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밟히고 신경 쓰인다.
요즘 우리는 기존의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이 충돌하는 대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날이 나오는 암울한 미래 전망에 관한 뉴스는 우리 맘을 야금야금 좀먹으며 불안의 수렁에 빠지게 한다.
며칠 전에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 만나, 내가 많이 믿고 의지하고 있는 스터디 모임 지인 분들을 만났는데, 예전과는 달리 각자의 사정들로 인해 관심사가 달라지고, 같은 주제더라도 미세한 입장 차이가 생긴 것에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성격과 기질이 다른 개개인들과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건 참 어려운 것 같다.
내 어릴 적 성향은 나이가 들 수록 더 강화되어 날 힘들게 하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10년 전과는 다르게 사람을 더더욱 가리게 됐다.
정을 줬던 사람이 생각만큼 다정하지 않은 사람인 걸 깨닫고, 그들의 눈에 스치는 질투가 보인다. 나를 이용하려 하는 사람, 은근히 무시하는 시선. 사람은 다면적이라지만 매 순간 생채기가 된다.
그럴수록 받는 것에 감사할 줄 알며 사소한데 마음 써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비록 나중엔 시절인연으로 끝나게 될지라도, 그런 사람들에겐 늘 진심을 나누고 싶다.
최근 연구실에서 주요 프로젝트의 중책을 맡게 됐다.
병원의 기록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로, 기술 PM으로써 선행연구에서 핵심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연구실 엔지니어, 병원 내부 직원들과 협력하여 LLM을 활용하는 몇 가지 요소 기술들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직함은 초라한데 맡은 책임이 크다 보니 일종의 부조화가 생겼다.
믿고 맡겨주신 것은 감사하나, 나를 대표하는 타이틀은 한미 하며, 학사 전공의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직장에 있을 때 독립된 사회인으로서의 나를 나타내던 내 명함이 그립다.
도메인을 이해한다는 건 큰 장점이지만 언제나 서포터의 역할로 남아있으며, 간호사는 늘 비주류이다.
죽도록 노력하여 받은 인정이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아스라이 사라질 허울뿐인 허상일까 봐 불안하다.
흔들리는 멘탈 때문일까, 최근 교회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목사님의 성경 설교 말씀이 귀에 쏙쏙 박혀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많은 것들이 두렵다.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칠까 봐, 건강이 안 좋아질까 봐, 가족과 친구들이 아플까 봐, 추구하던 일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일까 봐, 변방에서 소외될까 봐 두렵다. 나이와 비례하여 생겨난 생채기만큼 점차 무서운 것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심란한 마음만 커져 가던 중, 엊그제 스터디 모임의 지인분께서 생각이 전환되는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고신용사회예요
최근 동남아 쪽에서 사업을 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넘어오셨는데 그 나라는 기본적으로 저신용사회였다고 한다.
이렇게 갈라 치기가 만연한 사회에 무슨 고신용사회라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 나라에선 10만 원 미만의 비용을 청구하기 위한 단순 결재를 받는데만 해도 주 단위가 소요된다고 한다.
영수증이 위조된 서류일까 봐 걱정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도장을 매우 천천히 신중하게 찍는다. 빨리빨리의 민족인 우리로선 참을 수 없다.
내게 생채기를 냈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일부러 뒤통수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던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적어도 상호 간 기본적인 신뢰는 있다. 그리고 이는 제도와 인프라, 시민의식, 성실한 국민성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위기 상황에 모른 척하고 제갈길 가는 어느 나라 사람들과 달리, 사람이 쓰러지면 부축해 주고 신고해 주는 인정을 가졌다.
잘 살려면 전 국민의 체질 개선을 해야 하는 국가와는 달리 우리는 이미 가진 것이 많으며,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성숙해지고 있다.
대단한 사람들이고, 뒷받침하는 인프라도 대단해요.
바쁘고 힘들어 보여도 우리 삶의 수준이 그 나라의 중산층이 꿈꾸는 그것이에요
어쩌면 선진국이 되고 나서 눈이 높아지다 보니, 그 후에도 여전히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더더욱 숨 가쁘게 달려가다 보니,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채 서로에게 가혹하게 굴고 있지 않을까.
내게 주어진 책임과 관계에 감사하며, 다가갈 용기를 가져봐야겠다.
멀리서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 2025.11.07 날 위로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