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가 교수님께 배우는 것
'지도교수'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개인마다 편차가 있겠으나, 일반적인 대학원 밈에선 악덕 고용주(?) 정도로 보는 것 같다.
사실 어느 정도 틀린 얘기는 아닌 게, 교수님에게 학부생은 강의료를 지불하는 고객이지만 대학원생은 연구실에 소속되어 랩잡을 하는 대신 일정 부분의 인건비를 교수님께 지급받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 랩실일수록 적정 과제 수와 퍼포먼스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국책 과제의 필수성과 달성에 대한 압박이 크며, 인건비 지출이 많으므로 필연적으로 연구계획서 작성, 국책 과제 수행, 발표자료 준비 등의 랩잡이 따라와 학생 입장에서 순전히 본인 연구에만 전념하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
교수님은 대개 겸임하는 보직이 많고, 지도하는 학생 수가 많기 때문에 학생 입장에서 지속적인 논문 지도를 받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그리고 관찰한 바로는) 이 논문 지도와 랩잡의 비율이 교수님과 학생 개인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 같다.
1. 랩잡 100% 논문 지도 0%
말해 무엇하나.. 마음속의 마그마가 서서히 달궈진다(끓는점은 그때마다 다르지만). 물론 연구실 유지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 일을 하느라 중단된 내 연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 국책 과제 수행은 논문이 나오는 연구의 일환이라 괜찮지만, 새로운 과제를 따기 위한 계획서 작성은 통상 1-2달을 꼬박 할애하게 되는데, 경쟁이 치열하여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발표자료를 만드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직장과 달리 인센티브나 성과로 잡히는 부분이 없다.)
2. 랩잡 50% 논문 지도 50%
국책 과제 성과 달성을 위한 연구 절반, 내 논문 절반의 비율로, 제일 이상적이다.
국책 과제 주제가 내 논문 주제와 일치한다면 금상첨화! 연구실 생활에 불만이 없고 즐거운 주간이다.
3. 랩잡 0% 논문 지도 100%
좋을 것 같으나 의외로 좋지 않다. 과제계획서를 쓰면서 배울 수 있는 연구를 기획하는 법, 과제를 수행하면서 얻을 수 있는 서브 논문을 얻을 수 없고 무엇보다 첫 번째 학위논문 실험이 실패했을 시의 보험이 없다.
4. 랩잡 0% 논문 지도 0%
최악의 상태로, 적극적으로 주제를 서치 하고, 연구실 프로젝트를 찾고, 논문 지도를 요청하는 등의 액션을 취해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제한 시간 내 학위 논문을 못쓰고 수료로 남을 확률이 매우 매우 커진다.
**대학원 전공과 관련 없는 일을 하다가 연구실에 들어왔기 때문에 4-3-1-2의 순서로 모든 시기를 겪어봤는데, 4번일 때 제일 힘들었고(뭘 해야 할지 몰라서) 1번일 때 가장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며(정해진 업무만 하며 성과를 인정받는 시스템이 그리웠다), 2번일 때 연구에 흥미가 생기며 박사과정 진학을 고민하게 됐다.
이렇듯 적정 랩잡의 비율은 학생의 퍼포먼스에 지대한 영향을 주므로, 적임자에게 주제를 배정하고 분배하는 것이 중요하고 교수님들도 특히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시는 것 같다. (물론 가끔씩 학생의 학부 전공을 기억하지 못하고 삐끗하신다.)
약 2주 전쯤, 2번 상태로 행복한 연구실 생활을 하고 있던 내게 갑작스레 일주일이라는 타임리밋이 걸려 있는 1번 일이 떨어졌다.
교수님께서 급히 지원이 필요한 일이라 하시며 헐레벌떡 가서 설명을 들어보니, 야근에 주말 출근은 물론이고 순전히 행정 관련 일이라 시간은 많이 드는데 연구와는 관련 없는 일이어서, 받는 순간 일주일 간 계획했던 일(2년 간의 성과를 담은 첫 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었다.)이 올 스탑됐구나 하는, 슬픈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한 편으로는 억울한 마음도 올라왔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그런데 아무도 나서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수님의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보는 순간 그 인간적인 표정에 연민의 마음이 들더라.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도 정작 필요할 때는 도움 청할 곳 하나 없는, 그런 막막한 순간이 누구한테나 한번쯤은 찾아오지 않을까.
교수님께는 지금 상황이 딱 그 순간인 것 같았다.
급하게 회의실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그 짧은 순간 교수님의 표정과 어깨에서 책임감, 부담감, 미안함과 좀처럼 해소되기 힘든 정체된 상황에 대한 답답함과 같은, 평소에는 감춰두시는 묵직한 감정들이 전부 보여서 차마 불평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의 고사리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을 교수님도 결코 원치 않으셨으리라.
살다 보면 누구나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나이, 직위, 성별, 계급장 전부 차치하고서라도, 위급한 순간이 한번씩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세상은 절대 혼자 헤쳐나갈 수 없고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할 수는 없다는 걸 대학원에 들어와서 더 절실히 깨닫는다.
대학원생은 직장과는 조금 다른 결의 경험을 하게 된다. 본인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처음 놓여보는 상황(예를 들어 해외 학회에서 영어로 발표하거나, 선행 연구가 없는 기술을 만들기 위해 논문을 집요하게 파헤치는)을 여러 번 직면하게 되는데, 나 혼자서는 해결이 어려웠던 문제도 다른 도메인 전문가를 만나서 조언을 듣거나, 학생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실마리가 보이기도 한다.
세미나 혹은 학회, 워크숍을 참석하면서 교수님이 주변 인맥 분들과 상호작용하시는 모습도 많이 관찰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상대방과 본인을 모두 높이는 화법,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는 법과 같은 애티튜드를 알게 모르게 답습하게 된다. 다들 전문가이지만, 본인이 모르는 분야에선 한껏 겸손하다.
최근 2년 간을 회상하면서 학생이 지도교수님께 배우는 건 논문 쓰는 스킬이 전부가 아님을 느낀다. 적어도 내가 받은 건 그보다 훨씬 크다.
학생을 키워내기 위해 신경 쓰시는 그 모든 순간들이 우리 안의 씨앗으로 남아 발아하고 성장하여, 후배 세대로도 이어지는 가지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 자신도 비전을 제시하려면 더 배우고 전문가가 되어야겠지만, 적어도 내 아랫사람들에게만큼은 배울 거리를 줄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관리자가 되기를.
- 2025. 07. 09 첫 논문 투고 준비를 무사히 마친 날, 잠 못 이루는 새벽에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