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률, 김정윤, 이규태 전시 / 극과 극이었던 이날의 한남동
1월 4일 토요일. 서울 한남동 알부스갤러리에서 마지막으로 진행되는 성률 작가님의 전시를 보러 갔다. 8월 여름에 첫 전시 소식을 접하고 그때 너무 가고 싶었지만 피부 때문에. 숨 막히는 폭염 속에 난리 난 피부까지 달고서 서울까지 갈 자신이 없어 포기했었는데 마침 마지막 전시를 한다는 소식에 이번엔 꼭 가리라!
놓치지 않고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인스타그램으로만 봐왔던 성률 작가님의 그림들. 마치 내 어릴 적 동네 같고 내 모습 같은 그림들에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하다. 이런 그림들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이런 그림을 그려주어서 너무 좋다.
4일 토요일, 이날 한남동에서는 하필 큰 시위가 있었다. 체포를 하네마네. 많고 많은 복잡하고도 복잡한 한남동 도로 중에서도 제일 넓은 도로 한복판을 크게 차지하고는 서울 시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너도 나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보도 위에서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한쪽에 서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육개장 사발면으로 점심을 때우는 사람들이 시위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육교 위에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90%가 노인 분들인 시위부대를 뚫고 우린 알부스 갤러리로 향했다.
하필 이런 날. 왜.
우리는 시위를 하러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지나는 길목마다 경찰이며 노인들이며 왜 일단은 막고 보는 것인지. 오늘 우린 그냥 전시를 보러 온 것뿐인데 마치 가면 안 되는 길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된 것 마냥. 경찰이 아닌 노인들 까지도 우리 팔을 당겨가며 길을 막았다. 웬만하면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난데. 자꾸 막는 통에 짜증이 나서 그냥 좀 지나가게 해달라고 경찰에게 성질을 냈다. 그리고 노인이라면 더더욱 자비가 없던 나는 싫은 티를 온몸으로 뿜어내며 지나다녔다. 남편은 싸움이 날 뻔했다. 저런 인간들은 상대하는 거 아니라고 말렸지만 속마음은 이미 나도 몇 대 쳤다. 안 그럴 이유도 없었다. 왜 멀쩡한 길을 막고 난리인 것이며 이 주말에, 전시를 보러 온 시민의 갈 길을 막는 것인가. 당신들이 뭐길래요.
바닥엔 그들이 버린 쓰레기가 굴러다녔다. 점점 불어나는 인파로 복잡했고 매우 시끄러웠다. 시끄럽다는 표현은 약하다. 듣기 싫은 소음이 가득한 온 사방이 난리법석인 토요일 오후였다. 귀가 피곤해졌고 눈으로도 보기가 싫었다. 그들의 배려 없는 시위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끌끌 차게 만들 뿐이었다. 쯧쯧.
경찰한테 성질을 내고 노인과 싸울 뻔한 난리통을 뚫고 뚫어 도착한 알부스 갤러리는 평화 그 자체였다. 전시장답게 고요한 적막이 흘렀고 전시장 문을 열자마자 자동으로 매너모드가 되었다. 이중인격자가 된 것 같다. 뭘까 이 극과 극은. 하필 오늘 왜 그랬어?
이중인격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 덕인지 더욱더 이 평화로운 전시를, 이 따듯한 그림들을 더 진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성률 작가님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림 속 인물들이 뭔가 말을 하고 있는 듯하고 마치 날 그때 살던 동네로 데려가는 것만 같다. 더운 줄도 추운 줄도 모르고 그냥 불량식품 많이 사 먹고 놀고만 싶었던 나의 어린시절. 이씨들은 이래서 안 된다며 친아빠 욕을 하는 슬픔과 화가 묘하게 섞인 엄마의 궁시렁 소리들을 다 들으면서 멍한 표정만 짓고 있던 어릴 때의 내가 떠오른다.
어릴 때 엄마는 '이씨들' 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툭하면 했다. 친아빠를 만난 건 우리 엄마 인생의 크나 큰 오점이지만 나와 동생을 만난 건 크나 큰 복이라는 엄마. 아이러니하다. 시위부대의 난리통을 뚫고 만난 평화로운 전시장처럼 엄마의 인생도 꽤나 아이러니하다. 머리가 좀 커졌을 때 그놈의 이씨 이씨 듣기 싫으니까 좀 그만하라고 엄마한테 성질을 냈다. 이건 백번 생각해 봐도 잘한 짓이다. 같은 피에 같은 이씨는 맞지만 같은 부류로 엮이긴 싫었다. 나도 친아빠가 싫었으니까. 엄마의 마음을 잘 아니까. 그 뒤로 엄마의 '이씨 이씨' 타령은 쏙 들어갔다.
엄마의 궁시렁 궁시렁 소리에 눈치만 보던 초등학생 때의 나를 떠올리게 만든다. 성률 작가님의 그림은 나에게 그런 그림이다. 썩 좋지만은 않은 기억들인데, 왜인지 몽글몽글하게 남아 있는 그때를 다시 끄집어내게 만든다. 타임머신을 태워 그때 그 동네로 날 데려간다. 여름 햇볕을 피해 그늘에 앉아있는 그림 속 주인공들처럼 나도 그때 그 동네에서 햇빛을 피해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때가 있었고 비 오는 날 물 웅덩이를 흠씬 첨벙거리며 다녔었다.
김정윤 작가님의 그림도 오래전 인스타그램에서 먼저 알게 됐다. 슬램덩크와 조던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정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그림들이다. 너무 잘 그리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냥 너무 좋다.
처음 알게 된 이규태 작가님의 색연필 작품들.
보는 내내 그 얇은 색연필로 며칠에 걸쳐 다 작업하신 걸까. 궁금했다. 인내심이 대단한 그림이라 생각했다. 표현력도, 감성도 너무 따듯하다. 그림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참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