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가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대를 품는 이유

by 잼민아씨

어릴 적 다녔던 피아노 학원에는 연습장에 사과 그림이 줄지어 그려진 출석 카드 같은 게 있었다. 바이엘이나 체르니를 한 번 완곡할 때마다 사과 한 알을 색칠하는 규칙이었다. 20알 정도의 사과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는데, 나는 그 칸을 채우는 게 지독하게도 지루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시간보다 색연필을 쥐고 있는 시간이 더 좋았다. 나는 한 번 치고 나서 사과 다섯 알을 한꺼번에 빨갛게 칠해버리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들킬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선생님은 빈틈없이 채워진 사과 칸을 보며 성실하다 칭찬해주셨다. 누구도 나의 부정직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야금야금 '훔친' 연습량으로 나간 대회에서 나는 덜컥 상을 받았다. 반짝이는 트로피를 손에 쥐었을 때, 나는 확신했다. 나는 노력보다 재능이 앞서는 아이구나, 어딜 가나 빛이 나는 특별한 존재구나. 그때의 나는 나를 향한 스포트라이트가 영원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마주한 예비번호의 칸은 내 마음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간절함과는 상관없이 요지부동인 숫자를 보며,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억울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헤맨 만큼 내 땅이 된다는 말은 공허했고, 이제는 새로운 시작인 취업마저 무서워졌다.

사실 삶은 대부분 재미없고 무기력하다. 그런데도 왜 계속 살아가느냐고 묻는다면, 결국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억울해서, 혹시나 나에게도 아직 남은 장면이 있지는 않을까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대단한 희망이 있어서는 아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뭔가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마음이 자꾸 고개를 든다. 그 한 줌의 기대 때문에 나는 또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애쓰고, 다시 신발 끈을 묶는다.

내가 정말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지, 그 끝을 확인하고 싶다는 지독한 미련이 나를 계속 걷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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