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도 날 증명할 수 있는데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명확하다. "가기 싫다."
이 문장은 단순히 게으름의 발로가 아니다. 교문을 넘어서는 순간 시작될 소란스러운 역할극에 대한 거부감에 가깝다. 강의실 문을 열면 기다리고 있을 풍경들이 눈앞에 선하다. 텅 빈 논리를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해 내뱉어야 하는 발표, 서로의 눈치를 보며 접점을 찾아내야 하는 지루한 토론, 그리고 누군가의 무임승차를 견뎌내며 꾸역꾸역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팀플까지.
세상은 이 모든 과정을 '사회성'이라 부르고, 나에게 '성장'이라는 이름의 보상을 약속한다. 타인과 부딪히며 깎여 나가는 것이 성숙이라 말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깎여 나가는 것은 내 영혼의 가장 순수한 조각들이다. 억지로 의견을 섞고, 마음에도 없는 맞장구를 치며 얻어낸 그 '협력의 결과물'이 정말 나라는 사람을 한 뼘 더 자라게 하는 걸까. 오히려 소음 속에 내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회의감이 발목을 잡는다.
타인과 섞여야만 무언가 증명되는 세상은 너무도 시끄럽다. 모두가 밖으로 나와 자신을 전시하고 소통하라고 등을 떠밀지만, 정작 내게 필요한 건 타인의 피드백이 아니라 고요한 응시다.
결국 나는 가방을 고쳐 메는 대신 다시 침대 위로 무너져 내린다. 거칠고 시끄러운 세상을 막아줄 유일한 요새인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갓 세탁한 이불에서는 정직한 비누 향이 난다. 어떤 미사여구도 섞이지 않은 이 순수한 온기는, 그 어떤 다정한 위로보다 단단하게 나를 감싸 안는다. 마치 기억나지 않는 아주 먼 옛날, 세상의 어떤 소음도 닿지 않던 엄마의 태중이나 포근한 품속으로 되돌아온 기분이다.
그 안에서 나는 서서히 형태를 잃어간다. 바깥세상이 요구하던 '단단하고 부러지지 않는 나'라는 고체는 온데간데없다. 이불의 결을 따라, 침대의 굴곡을 따라 나는 한 방울의 액체가 되어 흩어진다. 뼈와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마음의 경계선이 흐물흐물해지며 이불의 솜털 사이사이로 스며든다. 억지로 나를 세우지 않아도 되는 곳, 투명한 물처럼 존재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이 공간이 비로소 나를 숨 쉬게 한다.
이 이불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녹아든 채, 나는 오직 나 자신과만 가장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눈다. 바깥의 피드백보다 훨씬 날카롭고도 따뜻한 질문들이 이불속 잠영처럼 부유한다. 사랑을 전하고 싶다던가, 무언가 대단한 성취를 하고 싶다던가 하는 거창한 욕심은 이 불투명한 액체 속에서 그저 하얀 기포가 되어 터질 뿐이다.
안온한 어둠 속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린다.
“아, 학교 가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