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브런치 아직 여기 살아있다
작년 가을부터 연말,연시까지 아주 바쁘게 보냈다. 9월부터 2월 말까지 뮤지컬 두 작품을 했고, 연구실에도 주 6일 이상 출석했다. 23년 2학기로 예상했던 논문심사가 미뤄졌으니까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독어공부도 미리미리 하고 해야지 했는데 논문과 일만으로도 너무 빠듯했다. 아니,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일에 너무 체력을 많이 쓴 게 패착이다. 아무리 평일엔 짧게 근무한다 하지만 주말엔 거의 10시간을 근무하고 그렇게 주 6일을 하면 몸이 거덜 나지 않는 게 이상하고, 몸이 그런데 집중력인들 멀쩡할리가 만무하고. 일하는 내내 "아.. 딱 보름만 일 안 하고 공부만 하고 싶다."라고 그렇게 빌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터프한 가을 겨울을 겪고 나니 남은 건 편평 사마귀와 노인들도 겨울엔 잘 안 걸린다는 대상포진, 그리고 집중력 저하. 글루콤으로도 해결이 안 돼서 한약도 먹어봤다. 고3 때 먹었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런 한약을.
공연이 끝난 2월 말부터 한 달간 열심히 달렸지만 바닥난 체력과 바짝 말라붙은 집중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늦어도 3월 초까지는 초고를 가져오라고 지도교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3월을 넘기고 4월 초에, 그것도 절반짜리 초고를 드렸다. 웬만하면 이번학기에 심사 보겠다고 떼쓰고 싶었으나 이제는 나도 안다. 이건 서둘러서 되는 논문이 아니다.
그래서 24년 2학기로 또 한차례 논문 심사가 미뤄졌다. 이게 두 번째.
처음 미뤄졌을 때는 몸이 아플 정도로 스트레스받았던 것 같은데 이젠 뭐 그냥 그렇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두 번은 실패를 해야 아는 것 같다. 아무리 주변에서 말을 해줘도 직접 두 번 정도 실패를 체득해야 정신도 차리고 뭘 좀 알게 되고 그러나 보다. 석사 면접 때 두 교수님의 말씀을 빌려, 나쁘게 말하면 쓰리아웃 직전에 아슬아슬 서있거나, 좋게 말하면 만루홈런을 치려고 기다리고 있거나.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은 내 미루기 습관+웃기는 완벽주의+미루기 탓임을 이젠 뼈저리게 안다. 이 못되고 더러운 버릇을 만루홈런을 칠 거라고 황송하게도 포장해 주신 교수님께는 너무나 죄송스럽게도 큰 실망을 드렸고, 있는 고집 없는 고집 다 피우고 졸라서 지도를 받게 된 지도교수님께도 정말 면이 서지 않지만(사실 지도교수님은 내게 기대가 0이시기 때문에 실망도 안 하셨을 것..;) 그래도 어쩌겠는가. 못되고 더러운 버릇들만큼 오래된 나의 근성은 끈기와 집념이다. 문이 닫히기 전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닫혀도 어떻게든 들어갈 것이다. 1학기에 하나, 2학기에 하나 하려던 거 2학기에 두 가지 같이 하면 된다. 두 번 자빠져봤으니 이젠 안다. 그리고 푹 고아낸 만큼 내 논문논문 곰국곰국은 더 풍성 해질 것이다. 아무도 기대 안하면 뭐 어떤가. 내가 기대하고있는데.
하자, 하던 대로 계속.
+ 태그에 뮤지컬이 달렸으니 양심에 찔려서 하는 뮤지컬 이야기.
창작 초연인 뮤지컬 "일 테노레"가 굉장히 잘 뽑혔다. 창작 뮤지컬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노래가 시작되는 타이밍, 그리고 음악인데 이 작품은 타이밍이 매끄럽고 오페라를 다루는 공연답게 음악이 아주 유려하다. 초연인데도 투자를 아낌없이 한 티가 여기저기서 나는데, 극 후반에 프로시니엄 안의 프로시니엄(이중프로시니엄!)이 180도 돌아가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다. 무엇보다 이 극의 묘미는 쉴새없이 울려퍼지는 남자주인공의 노래인데 한국뮤지컬계에서 내로라 하는 배우들의 노래를 이렇게 많이, 크게 들을수 있었던 공연이 또 있나 싶었다. 맨오브라만차에서도 상징적인 메인 곡은 <이룰수 없는 꿈> 한곡인데, 일테노레에서는 그런 노래들이 두시간 내내 쏟아져내린다. 내가 오페라를, 음악을 조금 더 잘 알았다면 더 자세히 쓸 수 있었을텐데 지식이 짧아 그러질 못하는게 아쉬울 따름. 무거운 주제지만 너무 무겁지 않고, 이야기도 잘 따라갈 수 있게끔 쉽게 짜여있으니 가족과 함께 보시는것도 좋은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