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영 Jan 01. 2023

<vanishing landscape> 전시서문

flux studio(박상화, 설박, 윤준영)의 작업에 관하여

    


    인류세라는 표현은 여러모로 기이하다. 이것은 지구의 지질학적 연보에 소속되어지는 주기이자 시간 단위이기도 하며, 현재 시점에서는 이 인류세라는 시기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지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범지구적 기후위기라는 이슈를 두고, 이 말은 마치 유행처럼 번져갔다.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인류라는 판단하에, 우리는 저마다의 입장과 책임을 껴안아야만 했다. 각종 제도적인 조치가 시행되고, 정치인들은 이 화두를 놓고 저마다의 견해를 밝혀야만 했으며, 어떤 이들은 식탁의 구성을 바꾸고 전기차를 몰기 시작했다. 특히 미래에 대한 상상은 그야말로 예술가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이었기에, 기후위기는 일종의 테마가 되어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전개되어왔다.   

다만 인간의 작업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유효한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자연에 대한 시선과 태도를 드러내고, 위기와 상실에 대한 감각을 유도할지언정 그것은 결국 인간의 것이라는 점에서 편파적이다. 차라리 문명, 혹은 인간의 시간으로부터 분리된 현장을 묘사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인류라는 원인이 소멸하고 난 이후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야말로, 인간/비인간이라는 이분법과 위계를 무너뜨리고 가장 거침없이 발언하는 태도가 아닐까?       

 바로 이 문제에 주안점을 둔 세 명의 시각예술가 박상화, 설박, 윤준영은 어느 가을날 한곳에 모여 팀 플럭스 스튜디오를 결성한다. 그들은 이번 전시를 토대로 인간소멸의 전 과정을 거치고 난 풍경을 각자만의 방식과 가설 안에서 표현해보기로 한다. 이제 우리가 풍경이라고 부르며 열망하고 대상화해왔던 자연에 대한 관점은 뒤바뀌어야 할 때가 아닌가. 세 명의 작가는 먼 훗날 이곳에 도래하게 될 시공간을 세 갈래의 방향으로 제시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전시의 화두는 소멸하는 풍경, 그 자체다. 이제 인간은 지구의 흔적기관으로만 남게 되고, 우리는 우리의 바깥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자연, 혹은 우주를 다뤄왔던 기존의 규정과 관점을 거둬내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이 전시공간에 표현해보기로 한다.           


    먼저 박상화 작가의 작업에서는, 거시적인 자연의 시간 위에 잠시 겹쳐지거나 부서지는 인류의 시간이 비행운처럼 희미한 궤적을 남기며 지나간다. 적막한 수평선 위에서 조금씩 지워져 가는 유조선이나,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 여전히 남아있는 하늘의 채도를 바라보며 관람객들은 빠르게 돌아가던 시간의 초침을 잠시 멈춰 세울 수 있다. 모든 것들은 소멸하는 순간에야말로 가장 아름답다. 그러므로 그가 표현한 우주 공간에 분진처럼 흩날리는 빛의 잔해들은, 미묘하게 자유롭고도 낙관적인 뉘앙스를 가진다. 이것은 비로소 지워지는 그 순간에서야 말해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기에, 결국 다정한 예언이자 미래의 감각이 된다.   

설박 작가의 작업은 소멸의 전 과정을 거치고 난 뒤 황폐해진 세상에 대한 상상력에서 기인하였다. 모든 것들이 소멸하고 난 이후, 원자 상태로 돌아간 세상에서 일렁이고 있는 연기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정동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으며, 마치 낮게 일렁이는 숨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흑백 산수와 닮아있는 이 아우라는 이제 드라이아이스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된다. 빛과 색을 잃은 세계 위에 넘실거리며 일렁이는 안개의 움직임은 마치 커다란 파도처럼 두렵게 보이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를 예감하게 하는 등 여러 방향의 해석을 유도한다. 흥미롭게도 이 풍경은 사람이 한 발짝 다가서면 불현듯 나타나거나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윤준영 작가의 작업은 먼 훗날의 기록보관소라는 구체적 시공간을 설정하고, 인간 그 자체의 과거사를 해석할 수 있는 미래세대의 시각과 발견을 구현해내는 등 철저한 기획과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먼저 첫 번째 화면에서는 설탕으로 만든 건축이 녹아내리는 장면이 나오고, 이 이미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탐색하던 관람객들은 두 번째 화면 위에 떠 있던 입력프로그램의 문구를 발견하며 나름의 답변을 작성하게 된다. 그 이후에 부분부분 영사되는 풍경들은 현재의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아름다운 순간과 단면들인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미래를 말하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현재에 대한 인식을 끌어내는 시도가 된다.


    어쩌면 이 모든 탐색과 구현은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난 시간, 혹은 풍경에 대한 치열한 묘사가 될 수도 있겠다. 고쳐 말하자. 사실 시간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붙잡힌 적이 없었다. 시간을 시간이라고 부르며 신화적 방식으로 명명하고, 저마다의 방식과 지략으로 낭비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이었다. 마침내 인간이 지워진 자리는 불온하게 소용돌이치던 욕망마저 사라지고, 자연(내지는 풍경)은 제 모습대로 시간의 결을 따라 형성된다. 그것은 점차 미세하게 회복되는 움직임이며, 모든 존재 사이에 위계를 지워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렇게 자신을 상상하며 세워낸 몇 가지 가설들마저도 투명하게 녹여내는 것이다.

   

    이제 이 전시장에서 인간은 지구의 흔적기관으로서만 남게 된다.


    그들이 있었던 자리는 닳고 닳아 희미해진다.


    먼 옛날 운석이 스치고 지나간 지점보다 특별한 의미를 얻지 못한다.      

    1인칭의 권위를 포기한 그 자리에서 파생되는 것,


    인칭이라는 개념이 깨진 바로 그곳에서, 시간의 궤적을 간직한 채 솟구치는 것.      

    자연을 대상으로 두고 쏟아왔던 열정적인 묘사, 혹은 풍경 그 자체.

    지워지고, 지워지고, 지워지다가 점차 다른 방식으로 고안된다.     


    사라지듯이 나타난다.




작가의 이전글 윤연우 개인전 "혼자보단 둘, 둘보다는 셋" 전시 서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