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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영 Aug 03. 2023

섬이라는 환영과 바운더리, <배틀로얄>

  인간은 섬이라는 은유를 입을 수 있는가. 로컬은 섬이라는 상징과 어디까지 함께하는 것이 합당한가. 애초에 무엇이 섬이 될 수 있는가. 요즘엔 이런 질문들 속에서 오랫동안 배회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상반기에 주어졌던 레지던스 연구 프로그램 주제와도 가까운 고민이었고, 지역에서 거주하며 시를 쓰고, 독립 단관극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화두이기도 했다. 단순히 마이너리티라는 울타리에 대한 의식이라기보다는, 시공간적 제약과 특정한 역사성 안에서(혹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가장 자유롭게 군집할 수 있는 대상과 표현에 대한 모색을 진행해왔다고 말하고 싶다.

  가령 독자적인 시공간과 바운더리, 대체할 수 없는 서사를 가지고 있는 대상을 가리켜 섬이라고 불러본다면 문학과 지정학은 생각보다 가까운 지점에서 함께할 수 있는 학문일 것이다. 특히 구조적으로도 행과 연, 분절과 리듬을 통해 구성되는 한 편의 시는 대륙과 해협을 간직하고 있는 지도의 형상과도 닮아있다. 활자로 채워져 있는 곳을 땅이라 부르고, 비워진 여백을 바다로 불러본다면 말이다. 애초에 시, 혹은 시를 쓰는 사람은 독자적인 문양의 시적 영토를 한순간 융기시켜내는 방식으로 섬이라는 환영을 재현해낸다. 또는 섬이라는 은유를 아예 적극적으로 소환해내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수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왔던 다음의 시처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오직 두 행만으로도 수많은 상념을 끌어내는 정현종의「섬」이라는 시다. 이 시는 인간을 섬으로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단번에 상투성을 빗겨나간다. 기이하게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와, 후카사쿠 킨지의 <배틀로얄>(2002)을 보았을 때의 감상이 다르지 않았음을 돌고 돌아 고백하고자 한다. 굳이 보태어 말해보자면 이 시를 좋아하는 만큼 <배틀로얄>도 좋아하는 것이다. 흔히 그때 그 시절의 슬래셔 무비라고만 평가됐던 이 작품을 나는 자기 전에도 보고,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도 보고, 그냥 실없이 웃고 싶을 때도 본다. 영화의 플롯이 놀라울 정도로 직렬이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게 한곳에 묶인 사람들이 나오고 사방이 바다로 막힌 섬이 나오며, 극한의 상황 속에서의 군집과 해체를 보여주면서, 온갖 곳에 피가 낭자하고 배신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기타노 다케시는 (그곳에서도) 영락없이 기타노 다케시다. 이 영화는 잔혹한 순간들을 스스로 단련하듯이 몇 번이고 반복하기에, 때론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뒤틀린 채로 피 흘리고 있는 피학적인 성장기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다양한 인물들의 유형과 군상을 빌려온 뒤에 한 명씩 죽어 나갈 때마다, 다소 감상적인 방식으로 그들 각자의 내력과 고유함을 한두 마디의 문장이 새겨진 컷으로 툭툭 요약하며 제시한다. 특정한 애도와 기념 속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저 앞으로 가는 것이다. 개인이라는 단위를 거둬들인 죽음의 지평은 한없이 균등하다. 바운더리가 거둬진 서사는 아직 유효하게 흘러가고 있는 서사 안에서 자연히 융해되어간다.

  문득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크고 작은 서사의 규모를 논할 때나 가장 연약한 이야기가 제일 먼저 탈락하는 순간을 대면하게 될 때 과연 어떤 태도가 온당한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애초에 커다란 이야기란 무엇이고 작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그것을 누가 구분하는지 묻는 것은 역사라는 플롯을 주관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되묻는 지점과도 결부될 것이다. 이 질문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도, 광주라는 지역에도, 혹은 특정한 예술계열의 판, 혹은 무대를 일컫는 씬(scene)이라는 곳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씬이라는 것은 동경의 대상임과 동시에 그야말로 정치적, 제도적 얽매임의 표상이다. 공고한 방식으로 유지되어왔던 바운더리다. 그러나 더 연약한 이야기, 어린 주체는 본인을 둘러싼 담장을 도끼질로 찍어 내린 뒤에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미 그 경계 안에 한번 발을 디딘 이상 극복해야만 하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제 안에도 유효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배틀로얄>의 플롯 역시 부모를 비롯하여 본인보다 더 커다란 이야기,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바운더리를 극복해가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슈야가 사실 무엇보다도 못 견뎠던 것은, 스스로 천장에 목을 매달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긴 텅 빈 기표였다. 그것은 바로 자살현장에서 발견되었던 하얀 천 위에 “힘내”라고 거칠게 적혀 있던 유언이었는데, 이것은 영화 말미쯤에 마찬가지로 “힘내”라는 말을 연신 뱉어가며 다가오는 기타노에게 슈야가 총을 무자비하게 쏘는 장면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러한 극복, 혹은 (아버지) 살해에 도달하기 전까지 슈야는 가장 원초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프로그램화된 게임을 피 흘려가며 탐사해야만 한다. 게임에 참여한 이상 그가 움켜쥐고 있던 자기 자신은 훼손되지 않을 수가 없다. 최후에 그가 탈출했던 섬은 결국 바운더리라는 표상, 혹은 환영 그 자체이며, 그가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절박하게 가로지르며 나아갔던 바다는 그들이 아직 만나보지 못한 미지의 서사가 된다. 그들은 부모 혹은 기성세대라는 그물, 혹은 본인들에게 울타리처럼 드리워진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자기 자신을 아득하게 확장해가며 해방을 기약한다. 이 장면은 미묘하게도 시적인 환기를 제공하는데, 바로 오랜 상징과 형식의 결속에서 풀려나고 있는 어떤 미지를 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는 감흥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지금도 좋은 영화들이 많다. 그런데 이십여 년 전의 영화를 이곳에 소환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칠게 넘어가는 시퀀스와 낮은 해상도의 화면 앞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의 환영을 감지하는가. 가족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서사, 사실 어찌 보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견고한 이야기 형식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실 새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오래된 이야기를 가장 덤덤하게 풀어내고 있는 고전처럼 느껴진다. 특별한 세목들에 의존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으며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변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난사된 총알이 온몸에 박힌 채 쓰러져 있던 기타노 다케시가 딸에게 전화가 오자 몸을 가까스로 일으키는 장면이라든가, 이 섬과 게임으로부터의 탈출을 돕는 복학생 카와다의 존재다. 그는 자기가 요리사의 아들이자 의사의 아들이며 조타수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본인과 아버지 사이에서의 호명을 교란시키는데, 기이하게도 이런 말장난들은 그가 부모, 즉 바운더리에 의한 억압과 보호 없이 자생해온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끔 부각하는 요소다. 능숙하게 배를 운전하며 일행을 지켜내려 했던 그는 결국 대륙에 발을 딛질 못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바다 위에서 목숨을 잃는다. 바운더리에 소속되지 못했던 그는 끝까지 주변부를 배회하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투명한 방식으로 융해된다.

  사실 이 게임으로부터 풀려난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들이 수면 위로 가로질러 도달하고자 했던 대륙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곳이다. 조금 더 커다란 섬이자, 땅으로 메워진 새로운 바운더리다. 억압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시도는 더 커다란 억압을 불러온다. 이것은 언어라는 수륙을 세워내어 나름의 지도를 그려내는 ‘시’라는 장르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해방되기 위해 새롭게 세워낸 말들의 패턴은 결국 자기 자신을 걸어 잠그는 문양과 규칙이 된다. 그러나 나를 섬에 가두는 것들에 대항한 분투는 결국 평생에 걸쳐 진행돼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결국 눈먼 채로 혼곤한 곳을 향해 나아가는 환영의 서사가 아닌가. 결국 바운더리라는 것은 드높은 담장처럼 세워진 것이나, 철근처럼 견고하게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툭 치면 바스러지는 먼지 허울과도 같은 환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라고 불리는, 가장 오래된 형태로 누적돼 온 바운더리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그것을 감지할 때 아주 잠깐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우리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광주를 생각한다.



(<scene 1980> 14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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