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 중세의 시험 - 침입과 응전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였으되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나 의병을 조직하니, 이 어찌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지 않은 징조가 아니겠는가" - 선조, 「선조실록」 25년(1592)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일본군 15만 8천 명이 조선 땅에 상륙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작한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1,000년 전부터 꿈꿔온 한반도 진출 욕구의 대폭발이었어요.
그로부터 7년간 벌어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 전쟁에서 한중일 세 민족의 DNA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일본은 확장 민족 DNA를 처음으로 대외 침략으로 분출시켰고, 조선은 자발적 저항 정신을 보여줬으며, 명은 조공 질서를 지키기 위해 개입했어요.
같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세 나라가 보인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400년 후 현재까지도 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어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조선을 침입했을까요?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무사들의 에너지를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는 설, 명나라 정벌을 위한 통로 확보설, 히데요시 개인의 야망설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벌이라는 거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고, 조선은 그 통로로 여겨졌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 내부의 팽창 욕구였습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강력한 군사력을 대외로 향하게 한 것이죠.
히데요시의 침입 계획을 보면 그 야망의 규모를 알 수 있어요. 조선 점령 후 명나라까지 정벌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동아시아 전체를 일본이 지배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더 중요한 건 일본군의 전쟁 수행 방식이었어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조선을 완전히 일본화시키려 했습니다. 조선인 포로들을 대량으로 일본에 끌고 가서 도공, 학자로 활용한 것도 그런 의도의 일환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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