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 중세의 시험 - 침입과 응전
▌"무사는 주군을 위해 죽는 것을 본분으로 삼으니, 이것이야말로 일본만의 도리다" - 야마가 소코, 「무사도」(1685)
1598년 12월, 정유재란이 끝나고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했습니다.
7년간의 전쟁은 일본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어요.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했고, 의병들의 끈질긴 저항에 시달렸으며, 명군의 개입으로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일본이 이 패배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는 점입니다. "확장은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다음번엔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였어요.
실제로 에도 초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무사 체제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마치 언젠가 다시 올 기회를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일본 확장 DNA의 무서운 일관성입니다.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점이에요.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를 보면 흥미로운 기록들이 나와요.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내관국(內官國)이었다"는 식의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실제 역사적 근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내용들이 담겨있어요.
특히 369년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록, 임나일본부 관련 기록들을 보면 한반도를 "원래 야마토 조정의 영역"으로 서술하려는 의도가 드러납니다.
물론 이런 기록들의 역사적 사실성에는 의문이 많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8세기 야마토 조정이 대외 팽창에 대한 이념적 정당화를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조정 차원에서 대외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 문서였어요. 나중에 확장 정책의 사상적 근거로 활용될 소지를 만든 겁니다.
12세기부터 발전한 일본의 무사 문화를 보면 확장 DNA의 또 다른 측면이 드러납니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형성된 무사도의 핵심은 "주군에 대한 절대 복종"이었어요. 개인의 생명보다 주군의 명령을 우선시하는 극단적 충성심이죠.
에도 시대 야마가 소코가 정리한 무사도를 보면 이런 특징이 더 명확해집니다. "무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군을 섬기는 것이 천부적 사명"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핵심은 이런 무사도가 대외 팽창을 위한 정신적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주군이 확장을 명령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거든요.
실제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전투력이 강했던 이유도 이런 무사도 정신 때문이었어요. 개인의 안위보다 명령 수행을 우선시하는 문화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어진 거죠.
하지만 이는 한국의 화랑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화랑도의 세속오계에서 "살생유택(殺生有擇)" - 가려서 죽이라고 한 것과 달리, 일본 무사도는 주군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구조였어요.
▌[당시의 목소리] "武士道ト云フハ死ヌ事ト見付ケタリ" (무사도란 죽는 것과 같다고 깨달았다) - 「하가쿠레」(1716)
1592년 임진왜란은 일본 확장 DNA가 처음으로 대규모로 분출된 사건이었어요.
히데요시의 조선 침입 계획을 보면 그 야망의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점령 후 명나라까지 정벌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동아시아 전체를 일본이 지배하겠다는 의미였어요.
더 중요한 건 일본군의 전쟁 수행 방식이었습니다.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조선을 완전히 일본화시키려 했어요. 조선인 포로들을 대량으로 일본에 끌고 가서 도공, 학자로 활용한 것도 그런 의도의 일환이었죠.
이는 나중에 일제강점기 동화정책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복한 땅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일본 특유의 확장 방식이었어요.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후, 일본은 쇄국정책을 실시했어요. 대외 팽창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시기에도 확장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내부적으로 더 체계화되었어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면서도(1609년 기유약조), 동시에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를 확립했습니다. 무사 계급을 최상위에 두고 이들의 군사적 역량을 유지한 거죠.
더 중요한 건 이 시기에 "일본 우월론"이 이론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일본을 "신국(神國)"으로 규정하고, 다른 나라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이 체계화되기 시작했어요.
같은 시기 한국과 중국은 어땠을까요?
변함없는 차이를 보이고 있죠?
일본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확장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체계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재건과 자주성 확립에 집중했어요. 임진왜란의 교훈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강화하되, 기본적으로는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중국은 중화 질서 복원을 꿈꿨어요. 일본의 침입을 중화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전통적 조공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에도 초기까지의 일본사를 돌아보면 한 가지 분명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어요.
8세기 일본서기의 한반도 지배 서술 → 12-16세기 무사도 체계화 → 1592-1598년 임진왜란 → 에도 초기 쇄국 하 재정비.
이 모든 과정에서 일본의 확장 의지는 한번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억눌리거나 분출할 뿐이었어요.
반면 한국과 중국은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한국은 자주와 평화를, 중국은 전통 질서 유지를 추구했죠.
이런 차이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과연 억눌린 확장 욕구는 영원히 잠들어 있을 수 있을까요?
일본의 확장 DNA는 중세를 관통하며 놀라운 일관성을 보여왔습니다. 비록 임진왜란에서 패배했지만, 그 의지 자체는 전혀 꺾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언젠가 올 기회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다음 회에서는 이런 일본의 지속적인 확장 의지와 대조되는 조선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보여준 재건 노력과 그 한계에 대해 알아보겠어요.
[다음 회 예고] 제2장 8화: "조선의 재건과 북벌론 - 응전 민족 DNA의 한계"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재건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민족 DNA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봅니다.
[용어 해설]
무사도: 일본 중세시대부터 발달한 무사 계급의 행동 규범. 주군에 대한 절대복종과 죽음을 불사하는 충성심을 핵심으로 하며 대외 팽창의 정신적 도구로 활용됨
신국사상: 일본을 신이 보호하는 특별한 나라로 보는 사상. 에도 초기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하여 확장 의지의 이념적 근거가 됨
사농공상: 에도시대 일본의 신분제 구조. 무사-농민-공인-상인 순서로 무사 계급의 군사적 역량을 최상위에 두어 확장 잠재력을 유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