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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민족DNA:도전과 응전

제2장 중세의 시험 - 침입과 응전

by 한시을

8화: 조선의 재건과 북벌론 - 응전 민족 DNA의 한계


▌"비록 우리나라가 작고 약하지만 의리만은 천지와 같이 클 것이다" - 효종, 「효종실록」 6년(1655)


1623년 3월, 인조반정.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명분은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대명의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 반정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정유호란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청나라에 삼배구고두례를 올리는 굴욕을 당했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했으면서도, 내심으로는 **"언젠가 북벌하겠다"**는 의지를 품었어요.


이것이 바로 한국 민족 DNA의 특징입니다. 물리적으로는 현실에 굴복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 이중 응전 구조의 완성체였죠.


하지만 동시에 이는 응전 민족 DNA의 근본적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의 현실주의 vs 인조의 명분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이 직면한 상황은 절망적이었어요.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었으며,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선택한 것은 중립외교였어요.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조선의 실리를 추구한 거죠.


실제로 광해군은 명나라의 후금 정벌 요구에 대해 강홍립을 파견하면서도, 비밀리에 "상황을 보아 항복하라"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선의 국력으로는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전쟁에 휘말릴 이유가 없다고 본 거예요.


하지만 조선 사대부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300년간 명나라의 재조지은을 받았는데 어떻게 배신할 수 있느냐"며 격렬히 반발했어요.


▌[당시의 목소리] "我國受皇朝再造之恩 二百餘年 不可背德" (우리나라가 황조의 재조지은을 받은 지 200여 년, 배덕할 수 없다) - 「광해군일기」 인조반정 관련 기록


여기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조선을 구해준 은혜를 말하는 거예요.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이 은혜가 현실적 이익보다 중요했습니다.


인조반정: 명분이 가져온 재앙


1623년 인조반정은 대명의리라는 명분으로 일어났어요. 광해군의 현실주의 외교를 "의리에 어긋난다"며 거부한 거죠.


인조는 즉위하자마자 친명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후금에 보낸 국서에서도 "조선은 명나라의 신하"라는 점을 명확히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때가 이미 명나라의 몰락이 확실해진 시점이었다는 겁니다. 후금은 이미 요동을 장악했고, 조선까지 위협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어요.


결과는 예상대로였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에서 조선은 후금에 형제관계를 맺자는 굴욕적 조건에 합의해야 했고, 1636년 정유호란에서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리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는 명분론이 현실을 무시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어요.


효종의 북벌론: 불가능한 꿈의 추구


정유호란의 굴욕 이후, 조선에서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북벌(北伐)"을 꿈꾸기 시작한 거예요.


효종(재위 1649-1659)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그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경험 때문에 청에 대한 원한이 깊었어요. 즉위 후부터 본격적으로 북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효종의 북벌 계획은 상당히 구체적이었어요. 훈련도감을 확대 개편하고, 화약과 화포 제조에 힘쓰며, 명나라 유민들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청을 협공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어요.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조선의 국력으로는 청나라를 상대할 수 없었거든요. 인구는 아직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고, 경제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청나라가 이미 중국 전체를 장악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는 점이었어요.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을 조선 혼자서 상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송시열과 기문론: 응전 DNA의 이념적 완성


효종 사후, 북벌론은 이념적 차원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송시열(1607-1689) 같은 성리학자들이 기문론(機門論)을 발전시킨 거죠.


기문론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어요. "비록 지금은 청나라가 강하지만, 하늘의 이치상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의리를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


이는 매우 한국적인 논리였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거든요.


실제로 조선 후기 내내 북벌론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숙종, 경종, 영조 시대까지도 기회만 있으면 청나라를 치겠다는 논의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春秋大義 不可忘也" (춘추의 대의는 잊을 수 없다) - 송시열, 「송자대전」


응전 DNA의 빛과 그림자


조선의 북벌론에서 우리는 한국 민족 DNA의 특성을 명확히 볼 수 있어요.


빛나는 측면:

굴복하지 않는 정신력: 아무리 열세여도 정신만큼은 굴복하지 않음

의리 중시: 현실적 이익보다 도덕적 명분을 우선시

끈질긴 의지: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는 지구력


한계:

현실 감각 부족: 실현 불가능한 목표에 매달림

내부 분열: 명분론과 현실론으로 나뉘어 갈등

소모적 논쟁: 실제 국력 강화보다 이념 논쟁에 몰두


이런 특성은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발견됩니다. 외부 압력에 대해서는 끝까지 저항하지만, 때로는 현실을 무시한 명분론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어요.


세 나라 응전 방식의 극명한 차이


같은 시기 일본과 중국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역시 세나라간에 차이가 극명하죠?


조선은 굴복 후에도 정신적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북벌론을 통해 의리를 지키려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발전이 정체되었습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실리를 추구했어요. 쇄국을 통해 안정을 확보하고 내부 발전에 집중했습니다.


중국은 한족이 만주족에게 지배당했지만, 실용적으로 새 질서를 수용했어요. 그 결과 강희-옹정-건륭 시대의 번영을 이룰 수 있었죠.


응전 DNA의 현대적 발현


이런 조선 후기의 응전 방식이 현재 한국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놀랍게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어요. 한국은 여전히 외부 압력에 대해서는 끝까지 저항하지만, 때로는 현실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 관계에서 한국이 보이는 특성들을 보세요. 원칙과 명분을 중시하면서도, 현실적 제약 때문에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동시에 이런 특성이 한국만의 독특한 매력이 되기도 합니다. 굴복하지 않는 정신력과 의리를 중시하는 자세가 전 세계적으로 존중받고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조선 후기의 교훈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점입니다. 의리와 명분을 지키되, 현실 감각도 잃지 않는 균형 잡힌 자세가 필요하겠죠.


조선의 북벌론은 한국 민족 DNA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굴복하지 않는 정신력은 분명 자랑스러운 특성이지만, 현실을 무시한 명분론은 때로 발목을 잡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런 특성이야말로 한국을 한국답게 만드는 DNA인 것도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DNA를 어떻게 현명하게 활용하느냐는 점이겠죠.


다음 회에서는 같은 시기 중국에서 화이관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완성된 중화질서의 이론적 토대를 파헤쳐보겠어요.


[다음 회 예고] 제2장 9화: "송-명시대 화이관의 발전과 완성" - 북방 민족과의 대립 속에서 강화된 중국의 화이관이 동아시아 질서의 이론적 근거로 자리잡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용어 해설]


북벌론: 조선 후기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주장.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대명의리를 지키려는 정신적 저항의 표현으로 오랫동안 지속됨

대명의리: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조선 후기의 정치 이념. 임진왜란 때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명분론적 외교 노선

기문론: 송시열 등이 주장한 북벌론의 이론적 근거. 하늘의 이치상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므로 그때까지 의리를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는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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