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18-19세기, 운명의 갈림길
▌"崇禎而後 再無中國" (숭정제 이후 다시는 중국이 없다) - 「명사」 최후 기록
1644년 4월, 북경.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이 자금성을 점령했습니다. 마지막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 뒤편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 자살했어요. 276년간 이어진 명나라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그런데 정작 베이징을 차지한 것은 이자성도, 명나라 장군들도 아니었습니다. 산해관 밖에서 기회를 노리던 만주족이었어요.
한족 왕조가 무너지고 이민족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상황. 1,000년 동안 쌓아 올린 중화질서가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청나라는 오히려 중화질서를 더욱 공고히 했어요. 아니, 명나라보다 더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가능했을까요?
청나라 초기 지도자들이 직면한 문제는 명확했어요. 100만 명의 만주족이 1억 명의 한족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
만약 정복자로만 군림한다면 한족의 끊임없는 반란에 직면할 겁니다. 하지만 한족에 완전히 동화되면 만주족의 정체성이 사라지겠죠.
청나라는 절묘한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명나라의 정통 계승자"라고 선언한 거예요.
청 태조 누르하치는 이미 "후금(後金)"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금나라의 계승자임을 표방했어요. 그리고 홍타이지는 1636년 국호를 "대청(大清)"으로 바꾸면서 더 나아갔습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덕이지 혈통이 아니다. 명나라가 덕을 잃었으므로 하늘이 우리에게 천명을 내렸다."
여기서 핵심은 "덕치론"입니다. 혈통이 아니라 덕으로 정당성을 주장한 거죠. 이는 유교의 핵심 이념인 "천명사상"을 완벽하게 활용한 전략이었어요.
▌[당시의 목소리] "得天下有道 失天下有道" (천하를 얻음에 도가 있고 천하를 잃음에 도가 있다) - 「청실록」 태종 즉위교서
청나라가 진정으로 안정된 것은 강희제(재위 1661-1722) 때였습니다. 그의 통치 전략은 정말 탁월했어요.
첫째, 유교 경전의 완벽한 습득
강희제는 어릴 때부터 한학을 철저히 공부했습니다.「사서오경」을 완벽하게 암송했고, 성리학 토론에서 한족 학자들을 압도했어요.
실제로 강희제는 주희의「사서집주」를 편찬하고,「강희자전」이라는 방대한 한자 사전을 만들었습니다. 한족 지식인들은 "오랑캐 황제가 우리보다 유교를 더 잘 안다"며 놀랄 수밖에 없었죠.
둘째, 한족 인재의 적극 등용
강희제는 과거제를 더욱 확대했어요. 명나라 때보다 더 많은 한족 관료를 뽑았습니다. 심지어 명나라 유민 출신도 관직에 등용했어요.
하지만 핵심 권력은 만주 팔기군이 장악했습니다. 병부(兵部)와 중요 총독직은 만주족이 독점했어요. 한족에게는 기회를 주되, 권력의 핵심은 절대 내주지 않는 정교한 균형이었죠.
셋째, 중화질서의 적극적 수용
강희제는 조선, 베트남 등 주변국과의 조공 관계를 명나라보다 더 세밀하게 관리했습니다. "천자로서 사방을 교화한다"는 중화질서를 완벽하게 구현한 거예요.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재위 1722-1735)와 건륭제(재위 1735-1796)는 청나라를 절정으로 이끌었습니다.
옹정제의 개혁
옹정제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어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해 황제 직속 권력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족 지식인들의 반청 사상을 철저히 탄압했어요.「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편찬해서 "만주족도 중화의 일부"라는 논리를 강요했습니다.
건륭제의 확장
건륭제 시기에 청나라 영토는 최대로 확장되었어요. 신강, 티베트, 몽골을 모두 복속시키고, 미얀마, 네팔까지 조공을 받았습니다.
이때 청나라 인구는 3억을 넘어섰고, GDP는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했어요.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이었죠.
건륭제는 스스로를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 칭하며 자부했습니다. 열 번의 완벽한 전쟁 승리를 거뒀다는 뜻이에요.
▌[당시의 목소리] "萬國來朝 天下太平" (만국이 와서 조공하니 천하가 태평하다) - 「건륭실록」
하지만 이 전략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청나라가 한족 문화에 점점 동화되기 시작한 거예요.
건륭제 말년에 이르면 만주 귀족들도 만주어를 잘 못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만주족 고유의 풍습인 기사와 수렵은 사라지고, 한족처럼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만주 청년들이 늘어났어요.
건륭제는 이를 경계하며 만주어 사용을 강제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청나라는 중화질서를 완벽하게 구현했지만, 동시에 만주족 자신도 중화 문화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 거예요.
같은 시기 조선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참담했습니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에서 완벽하게 패배한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했어요.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조선 지배층은 이 굴욕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대신 이상한 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했으니 이제 조선이야말로 진정한 중화다. 우리가 예악문물을 지켜야 한다."
이게 바로 소중화(小中華) 의식입니다. 현실에서는 청나라에 조공 바치면서, 입으로는 "우리가 진짜 중화"라고 우기는 거죠.
숙종 때 편찬된 「대동야승」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중국이 오랑캐에게 함락되었으니 이제 중화 문명은 오직 조선에만 남았다."
조선은 명나라식 복식을 고수했고, 명나라 연호를 계속 사용했으며, 청나라를 "청(淸)"이 아니라 "호(胡)"라고 불렀어요.
현실적 힘은 없으면서 정신적 우월감만 붙잡고 있는 모습. 이건 응전이 아니라 정신승리였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和而不戰則社稷危 戰而不和則生靈塗炭" (화친하고 싸우지 않으면 사직이 위태롭고, 싸우고 화친하지 않으면 백성이 도탄에 빠진다) - 「인조실록」 14년(1636) 12월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이 하나 있습니다.
조선 지배층의 소중화 의식이나 북벌론은 진정한 홍익인간 DNA가 아니었어요. 그건 양반들의 정신승리이자 현실 도피였을 뿐입니다.
진정한 민족 DNA는 어디 있었을까요? 바로 하층민들에게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 병자호란 때 끝까지 버틴 강화도의 백성들, 그리고「남한산성」에서 묵묵히 성벽을 지킨 군사들과 백성들.
이들에게는 소중화니 북벌이니 하는 관념이 없었어요. 그저 "우리 땅을 지키고, 우리 가족을 보호한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의지만 있었죠.
광개토대왕의 "여형여제" 정신, 김구의 "문화의 힘" 사상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홍익인간 DNA는 궁궐이 아니라 민초들 사이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겁니다.
이 옹졸한 정신승리가 깨지고 조선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것은 한 세기가 더 지나서였어요.
일본은 또 다른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에도 막부의 학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는 「중조사실(中朝事實)」에서 이렇게 주장했어요.
"중국은 이미 오랑캐에게 넘어갔다. 일본이야말로 신국(神國)이며, 천황의 만세일계(萬世一系)는 끊어지지 않았다. 일본이 진정한 중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이 중화"라는 주장이 아니라, "일본이 우월하다"는 확신입니다. 명청교체를 보면서 "중국도 결국 멸망하는구나. 일본만이 영원하다"는 우월의식을 키운 거예요.
이는 나중에 메이지 유신 때 "탈아입구(脫亞入歐)"와 "정한론(征韓論)"으로 이어집니다. 중국이 약해진 틈을 타서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야 한다는 확장 DNA의 재발현이었죠.
18세기 중반, 세 나라의 상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한족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중화질서의 정점에 섰어요. 하지만 대가는 만주족 정체성의 상실이었습니다.
조선은 물리적으로는 청나라에 완전히 굴복했지만, 지배층은 소중화 의식이라는 정신승리로 현실을 외면했어요. 진정한 홍익인간 DNA는 궁궐이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명청교체를 보면서 "중국도 별거 아니구나"라는 확신을 얻었어요. 쇄국 속에서 확장 DNA를 내재화하며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18세기 청나라는 완벽했습니다. 영토도 넓고, 인구도 많고, 경제도 풍요로웠어요.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문제들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첫째, 인구 폭증과 토지 부족
강건성세 동안 인구가 1억에서 3억으로 폭증했는데, 경작지는 그만큼 늘지 않았어요. 농민들이 점점 가난해졌습니다.
둘째, 부패의 만연
건륭제 말년, 환관 화신(和珅)의 부패가 극에 달했어요. 그가 축적한 재산이 청나라 15년치 세수와 맞먹었다고 합니다.
셋째, 기술 발전 정체
청나라는 농업 중심 경제에 만족했어요. 서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을 때, 청나라는 여전히 전통 농업에 의존했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19세기에 폭발합니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그리고 결국 청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거죠.
흥미롭게도, 청나라 절정기 조선의 이 비참한 상황을 현대 한국 영화가 정확히 포착했어요. 바로 김훈의 소설을 영화화한 「남한산성」(2017)입니다.
이 영화가 전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단순히 잘 만들어서가 아니에요. 권력의 무능과 백성의 고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항전파와 화친파의 끝없는 논쟁. 하지만 둘 다 백성을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들 명분과 자존심만 챙길 뿐이죠.
영화의 마지막, 눈 덮인 들판을 걷는 백성들의 모습. 그들의 표정에는 체념도, 분노도 아닌 묵묵한 생존 의지가 담겨있어요.
바로 이것이 진짜 한국 민족 DNA입니다. 지배층이 아무리 무능해도, 백성들은 살아남았고, 결국 그들의 후손이 21세기 K-문화를 만들어낸 거죠.
「남한산성」이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화려한 궁궐이나 영웅 서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진정성을 그렸기 때문이에요.
청나라가 세계 최강국이었지만 결국 무너진 이유와, 조선이 끊임없이 굴욕당했지만 끝내 살아남은 이유는 같은 원리입니다. 진정성은 권력이 아니라 백성에게 있다는 사실이죠.
강희제가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4세와 서신을 교환하고, 옹정제가 로마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맺던 18세기. 청나라는 분명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함 이면에는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위기는 19세기 서구 열강의 도전 앞에서 무참히 드러나게 됩니다.
[다음 회 예고] 제3장 11화: "조선 영정조 시대 - 홍익인간과 실학의 만남" - 청나라의 강건성세와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정조의 화성 건설과 실학자들의 개혁 의지가 만나 독특한 문화적 전성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물질이 아닌 정신의 번영이 왜 더 오래 지속되는지 그 비밀을 파헤칩니다.
[용어 해설]
강건성세: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친 전성기(1661-1796). 영토 확장과 경제 발전이 절정에 달했으나 내부적 모순도 축적된 시기
소중화: 명나라 멸망 후 조선 지식인들이 "조선이야말로 진정한 중화 문명의 계승자"라고 자부한 의식. 청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신적 저항
십전무공: 건륭제가 스스로 자랑한 열 번의 군사 승리. 신강, 티베트, 미얀마 등지에서의 전쟁을 의미하며 청나라 전성기의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