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18-19세기, 운명의 갈림길
▌"不患無位 患所以立"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설 바탕이 없음을 걱정하라) - 정조, 「홍재전서」
1776년 3월, 경희궁.
24세의 젊은 왕 정조가 즉위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영조는 82세까지 장수하며 52년간 조선을 다스렸고, 그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죠.
정조 앞에는 노론 벽파라는 거대한 권력 집단이 버티고 있었어요. 그들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놀라운 선택을 했어요.
"청나라를 배우겠다."
100년간 조선 양반들이 "오랑캐"라며 무시하던 청나라의 기술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실학(實學)이었어요.
그리고 이 실학이야말로 단군 이래 이어진 홍익인간 정신의 18세기식 재해석이었습니다.
먼저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재위 1724-1776)부터 봐야 해요. 그가 깔아놓은 토대 위에서 정조가 꽃을 피웠거든요.
영조가 즉위했을 때 조선은 최악의 당쟁 속에 있었습니다. 노론과 소론이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피의 보복이 100년 넘게 계속되고 있었어요.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선언했습니다.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면 당파를 따지지 않는다."
「영조실록」 즉위년(1724) 기록을 보세요.
"用人不拘黨論 唯才是用" (사람을 쓸 때 당론에 구애받지 말고 오직 재능만을 기준으로 삼는다)
실제로 영조는 노론의 김재로와 소론의 조현명을 함께 등용했어요. 서로 원수지간인 사람들을 한 조정에 앉힌 겁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양측 모두 반발했고, 영조 자신도 아들 사도세자를 희생시켜야 하는 비극을 겪었죠. 하지만 영조의 52년 재위 동안 조선은 100년 만에 안정을 되찾았어요.
정조는 할아버지보다 더 과감했습니다. 그는 경기도 수원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로 했어요. 바로 *화성(華城)입니다.
1794년부터 1796년까지 2년 반. 정조는 화성 건설에 국가 역량을 쏟아부었습니다.
과학 기술의 집약
정조는 정약용에게 화성 설계를 맡겼어요. 정약용은 청나라 기술서적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연구해서 거중기(起重機), 녹로(轆轤) 같은 공사 기구를 고안했습니다.
「화성성역의궤」 기록에 따르면, 거중기 하나로 40명이 들어야 할 돌을 4명이 들 수 있었어요. 이 덕분에 10년 걸릴 공사가 2년 반으로 단축되었죠.
백성을 위한 설계
화성은 단순히 왕을 지키는 성이 아니었어요. 「화성성역의궤」 서문을 보세요.
"城役之設 非爲守禦 實爲民生" (성을 쌓는 것은 방어를 위함이 아니라 실로 백성의 생활을 위함이다)
성 안에 주택, 상가, 농경지가 모두 계획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안전하게 살면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신도시 개념이었죠.
혁명적 노동 정책
정조는 화성 건설 인부들에게 매일 일당을 즉시 지급했어요.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일자별로 누가 얼마를 받았는지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문수 4푼, 김성립 5푼..."
이런 식으로 모든 인부의 이름과 임금이 남아있어요. 당일 일한 대가를 당일 받는 것, 그것도 모든 내역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民惟邦本 本固邦寧"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편안하다) - 정조, 「홍재전서」
정조 시대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박지원(1737-1805)입니다. 그는 1780년 청나라를 여행하고 「열하일기」를 썼어요.
이 책은 조선 사회에 폭탄이었습니다.
"조선 선비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한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그들의 수레는 편리하고, 건축은 웅장하며, 농기구는 효율적이었다. 우리는 명나라 시대에 갇혀 발전을 멈췄다."
박지원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했어요.
청나라의 수레는 한 명이 끌고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는데, 조선은 아직도 지게로 짐을 나른다. 청나라의 벽돌 건축은 견고하고 화재에 강한데, 조선은 여전히 나무와 흙으로만 짓는다.
박지원의 핵심 주장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어요.
"백성을 이롭게 하고 생활을 두텁게 한다. 기술과 제도는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100년간 이어진 소중화 의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박지원을 보호했고, 그의 책이 퍼지도록 허용했어요.
박지원보다 더 체계적으로 실학을 발전시킨 사람이 정약용(1762-1836)입니다.
정약용의 학문은 방대했어요. 건축, 농업, 행정, 법률, 경제... 모든 분야를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연구의 중심에는 항상 "백성"이 있었어요.
「목민심서」: 관리를 위한 교과서
"爲民而治 非爲己而治" (백성을 위해 다스리는 것이지 자기를 위해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정약용은 지방관이 어떻게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지 48편의 글로 정리했습니다. 세금 징수부터 재판, 교육, 구휼까지 모든 업무에 대한 구체적 지침이었어요.
특히 강조한 것은 백성의 실제 삶이었습니다.
"수령의 직책은 오직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백성이 편안하지 않으면 아무리 학문이 높아도 소용없다."
「경세유표」: 토지 개혁의 청사진
정약용은 조선 사회의 근본 문제가 토지 제도에 있다고 봤어요. 대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고, 농민들은 점점 가난해지는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여전론(閭田論)」을 주장했어요. 마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노동량에 따라 수확을 나누자는 혁명적 제안이었죠.
「흠흠신서」: 법의 진정한 목적
정약용은 형법 개혁도 주장했습니다. 「흠흠신서」에서 그는 이렇게 썼어요.
"법은 백성을 위협하는 도구가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관대하게, 억울함이 있을 때는 신중하게."
홍대용(1731-1783)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이렇게 썼어요.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중국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조선도 변방이 아니다. 모든 나라는 평등하다."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겁니다. 그리고 나아가 중화질서 자체를 부정한 거죠.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상적 혁명이었어요. 1,000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화이관을 정면으로 거부한 겁니다.
여기서 핵심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실학이 과연 홍익인간 정신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단군신화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 뭐였나요? 추상적 우월감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죠.
영조의 탕평책 - 당파 싸움을 끝내고 백성을 편안하게
정조의 화성 - 백성이 안전하고 풍요롭게 사는 도시
박지원의 이용후생 - 백성을 이롭게 하는 기술 도입
정약용의 목민심서 - 백성을 위한 행정 개혁
홍대용의 평등사상 - 모든 나라와 사람의 평등
이 모든 것이 바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의 실천이었습니다.
100년간 소중화 의식에 빠져 정신승리만 하던 조선 지배층이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고, 백성을 위한 실제 개혁을 추구하기 시작한 거예요.
같은 시기 청나라와 일본은 어땠을까요?
청나라 - 건륭제의 십전무공
건륭제는 신강, 티베트, 몽골을 정복하며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어요. 스스로 "십전무공"이라 자랑했죠.
하지만 백성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인구는 3억으로 폭증했는데 경작지는 늘지 않았고, 부패는 만연했으며, 환관 화신이 나라 재정을 축내고 있었어요.
청나라의 학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사고전서」 같은 방대한 서적을 편찬하며 황제의 위대함을 찬양했습니다. 백성을 위한 개혁안은 나오지 않았어요.
일본 - 에도 막부의 안정과 정체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농공상 신분제는 더욱 고착되었고, 개혁 사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국학자들은 "일본은 신국(神國)"이라며 우월의식만 키웠죠. 실학 같은 백성 중심 사상은 싹트지 못했어요.
조선 - 실학으로 백성을 생각하다
조선은 영토 확장도 못 했고, 경제력도 약했어요. 하지만 지식인들은 백성을 위한 개혁에 몰두했습니다.
정조의 화성, 정약용의 「목민심서」, 박지원의 「열하일기」... 모두 백성의 실제 삶을 개선하려는 노력이었어요.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1800년 6월, 정조가 49세로 급사했습니다. 개혁의 중심이 사라진 거예요.
실학자들은 즉시 탄압받기 시작했어요.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간 귀양살이를 했고, 박제가도 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학의 개혁안들이 모두 기득권층의 이익을 침해했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이 주장한 토지 재분배는 대지주인 양반들에게 위협이었어요. 박제가가 제안한 상공업 육성은 농본주의를 신봉하는 양반들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었죠. 박지원이 강조한 청나라 기술 도입은 소중화 의식을 고집하는 양반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실학은 정조라는 개혁 군주가 사라지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조선은 다시 정체 상태로 돌아갔어요.
이것이 바로 8회에서 본 응전 DNA의 한계였습니다. 외부 도전에 대해서는 끈질기게 저항하지만, 내부 개혁에는 소극적인 DNA였던 거죠.
놀랍게도, 정조와 정약용의 개혁과 좌절이 21세기 K-드라마를 통해 생생히 재현되었습니다.
「정도전」(2014)을 보세요. 고려 말 개혁가 정도전이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며 신분제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을 그렸어요. 기득권층의 반발로 결국 이방원에게 제거되지만, 그 정신은 조선 건국의 토대가 되죠.
「뿌리깊은 나무」(2011)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면서 "백성이 글을 알아야 백성이 주인이 된다"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집현전 학사들조차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세종은 백성을 위한 개혁을 멈추지 않아요.
「이산」(2007)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노론 벽파와의 권력 투쟁 속에서도 정조는 화성을 짓고, 규장각을 세우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죠.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개혁가가 기득권과 싸우면서 백성을 위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거예요. 정조와 정약용이 겪었던 바로 그 상황이죠.
전 세계 시청자들이 이런 K-사극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있어서가 아닙니다. 권력이 아니라 백성을 중심에 두는 철학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기 때문이에요.
중국 사극은 황제의 권력 다툼을, 일본 사극은 무사들의 충성 경쟁을 주로 다루죠. 하지만 한국 사극은 항상 "백성"이 중심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화성 정신이고, 정약용의 목민심서 정신이며, 결국 홍익인간 정신의 현대적 재현입니다.
정조가 화성을 만들면서 꿈꿨던 세상. 백성과 왕이 함께 밥을 먹고, 과학 기술로 백성의 삶을 개선하며, 모든 사람이 안전하고 풍요롭게 사는 세상.
그 꿈은 19세기 기득권의 벽에 부딪혀 좌절했지만, 21세기에 다시 피어났습니다. K-드라마를 통해 "백성이 주인"이라는 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거예요.
[다음 회 예고] 제3장 12화: "일본 막부 말기 - 확장 민족 DNA의 전략적 잠복" - 조선이 실학으로 백성을 위한 개혁을 꿈꿀 때, 일본은 쇄국 속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을까요? 요시다 쇼인과 사쓰마 번의 야망, 그리고 페리 함대 이후 폭발하는 확장 DNA의 비밀을 추적합니다.
[용어 해설]
실학: 18세기 조선에서 발달한 개혁 사상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 관념적 성리학에서 벗어나 백성의 실제 삶 개선을 추구
탕평책: 영조가 실시한 정치 개혁으로 붕당의 이익이 아닌 능력 위주로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정책. 100년간 이어진 당쟁을 완화시킴
화성: 정조가 수원에 건설한 신도시. 과학 기술과 백성 중심 설계를 결합한 18세기 한국의 걸작 도시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