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중일 민족 DNA:도전과 응전

제3장 18-19세기, 운명의 갈림길

by 한시을

13화: 고립의 덫 - 세도정치 60년의 마비


▌"民生凋弊 國用不足 而權臣專恣" (백성의 생활은 피폐하고 나라 살림은 부족한데 권신들은 제멋대로 한다) - 「순조실록」 34년(1834)


1800년 6월 28일, 창덕궁.


49세의 정조가 급서했습니다. 독살설이 돌았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어요. 화성 건설로 꿈꾸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났죠.


왕위를 이은 것은 겨우 11세의 순조였습니다. 어린 임금을 대신해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조선은 60년간 암흑기로 빠져들었습니다.


같은 시기, 청나라는 건륭제의 십전무공으로 전성기를 구가했고, 일본은 막부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확장 DNA를 배양하고 있었어요.


오직 조선만이 세도정치라는 늪에 빠져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안동 김씨 60년 세도의 시작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정조가 등용했던 개혁파를 모조리 숙청했습니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채제공 같은 개혁 신료들은 관직에서 쫓겨났어요.


그리고 자신의 친정인 안동 김씨를 대거 등용했습니다.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그 중심이었어요. 그는 자신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들여보내며 외척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순조실록」 즉위년(1800) 기록을 보세요.


"金祖淳爲領議政 其族黨布列朝班" (김조순이 영의정이 되고 그 일족이 조정에 가득 찼다)


이것이 60년 세도정치의 시작이었습니다.


권력의 세습, 국가의 사유화


안동 김씨 세도가 다른 외척 정치와 달랐던 점은 완전한 권력 세습 시스템이었다는 겁니다.


김조순 → 김좌근(金左根) → 김문근(金汶根)으로 이어지는 60년.


이들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독점했어요. 삼정승 자리가 안동 김씨 가문의 세습 재산이 된 겁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인사권 장악이었습니다.


「헌종실록」 11년(1845) 기록을 보면:


"銓曹之權 盡在權門" (인사권이 모두 권문세가에 있다)


관직을 얻으려면 안동 김씨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어요. 실력이나 학식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를 내느냐만이 중요했죠.


과거제는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영조와 정조가 그토록 강조했던 탕평책과 능력주의는 완전히 사라졌어요.


▌[당시의 목소리] "朝廷用人 惟錢是視" (조정의 인사는 오직 돈만 본다) - 「비변사등록」 헌종 13년(1847)


삼정문란: 백성을 착취하는 시스템


세도정치의 가장 참혹한 결과는 삼정문란(三政紊亂)이었습니다.


전정(田政) - 토지세의 붕괴


양반들은 토지를 계속 늘렸지만 세금은 내지 않았어요. 대신 가난한 농민들에게 세금이 전가되었습니다.


「철종실록」 3년(1852) 기록:

"富者田連阡陌而不納一粒 貧者地無立錐而徵稅如雨" (부자는 수천 마지기 땅을 가지고도 한 톨 세금을 내지 않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으면서 비 오듯 세금을 징수당한다)


군정(軍政) - 병역세의 붕괴


양반 자제들은 병역을 면제받았어요. 대신 평민들에게 군포(軍布)를 거듭 징수했습니다.


백골징포(白骨徵布) -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징수 황구첨정(黃口簽丁) - 갓난아기도 군적에 올려 징수 족징(族徵) -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친척에게 징수


환곡(還穀) - 구휼제도의 붕괴


본래 환곡은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받아 백성을 구제하는 제도였어요.


하지만 세도정치 시기에는 악질적 고리대로 변했습니다. 봄에 쌀 10말을 빌려주고 가을에 15말, 20말을 받아갔어요. 이자율이 50%를 넘었습니다.


더 악랄한 것은 모곡(耗穀)이었어요. "쌀이 썩거나 쥐가 먹었다"며 실제 빌린 양보다 더 많이 빌렸다고 장부에 기록하는 겁니다.


민란의 폭발: 백성들의 절규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드디어 일어섰습니다.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 임술민란,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수십 건의 민란이 터졌어요.


특히 1862년 임술민란은 전국적 규모였습니다. 진주에서 시작된 민란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로 번졌어요.


진주 민란의 격문을 보세요.

"貪官汚吏 剝民之膏血 我民何罪" (탐관오리가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데, 우리 백성이 무슨 죄인가)


민란의 주동자들은 양반도, 지식인도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농민들이었어요.


하지만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일시적 진압과 형식적 개혁뿐이었습니다. 근본적 제도 개선은 전혀 없었어요.


세 나라의 19세기 초중반, 극명한 대조


같은 시기 청나라와 일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조선은 완전히 멈춰있었어요. 정조의 개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실학은 탄압받았으며, 세도가들은 권력 투쟁과 축재에만 몰두했습니다.


청나라는 비록 아편전쟁(1840)에서 패배했지만, 적어도 위기를 인식하고 양무운동을 준비했어요. "중체서용"이라는 나름의 대응책을 모색했습니다.


일본은 쇄국 속에서도 난학을 발전시키며 서양 지식을 축적했어요. 요시다 쇼인 같은 사상가가 정한론을 이론화하며 확장을 준비했습니다.


오직 조선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청, 부상하는 일본 사이의 조선


조선의 비극은 단순히 내부 무능만이 아니었어요. 지정학적 위치가 더욱 절망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북쪽에는 강력한 청나라가 버티고 있었어요. 강희-옹정-건륭 3대 황제 시기를 거치며 청나라는 역사상 최강의 제국이 되어있었습니다.


조선이 아무리 북벌을 꿈꿔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어요. 청나라의 국력은 조선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남쪽에서는 일본이 준비하고 있었어요. 겉으로는 쇄국이었지만, 내부에서는 난학이 발전하고, 요시다 쇼인 같은 사상가가 정한론을 퍼뜨리며, 사쓰마와 조슈 같은 강력한 번들이 근대화를 준비했습니다.


조선은 이런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어요.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 것이 조선의 대응이었습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완전한 쇄국과 고립. 이것이 19세기 조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응전 DNA의 구조적 한계


8화에서 본 북벌론의 한계가 여기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조선의 응전 DNA는 외부 압력에는 끈질기게 저항하지만, 내부 개혁에는 소극적이었어요.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후, 조선 지배층은 어떻게 했나요? 북벌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국력을 키우는 개혁은 거의 하지 않았어요.


정조가 잠깐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가 죽자마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득권 양반층이 개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의 토지 개혁안은 대지주인 양반들의 이익을 침해했어요. 박제가의 상공업 육성안은 농본주의를 신봉하는 양반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박지원의 청나라 기술 도입은 소중화 의식에 집착하는 양반들이 거부했죠.


결국 조선은 지배층의 기득권이 민족의 생존보다 우선하는 구조적 한계에 갇혀있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上下相蒙 賄賂公行 綱紀解弛" (위아래가 서로 속이고 뇌물이 공공연하며 기강이 무너졌다) - 「철종실록」 14년(1863)


지배층 DNA ≠ 민족 DNA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을 해야 합니다.


세도정치 양반들의 DNA ≠ 한국 민족의 DNA


10화에서 살펴본 것처럼, 진정한 홍익인간 DNA는 궁궐이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 살아있었습니다.


1862년 임술민란에서 일어난 농민들, 삼정문란에 저항한 평민들, 그들에게는 소중화 의식도, 북벌론도, 권력 투쟁도 없었어요.


그저 "우리 가족을 지키고, 우리 마을을 살리고, 정의롭게 살고 싶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의지만 있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여형여제" 정신, 신라 화랑의 "살생유택" 정신, 임진왜란 의병의 자발적 저항 정신...


이런 진정한 민족 DNA는 궁궐이 아니라 민초들 사이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백성들의 후손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고, 1919년 3·1운동을 만들었으며, 1987년 민주화를 쟁취했고, 2016년 촛불혁명을 이뤄냈습니다.


21세기 K-문화를 만든 것도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젊은이들이었어요.


날개짓 불가능의 비극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죠.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태풍을 만든다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19세기 조선은 날개짓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개혁하려는 자는 숙청당했습니다 (정약용)

새로운 사상은 탄압받았습니다 (실학)

외부 세계는 차단되었습니다 (척화비)

백성들은 착취당했습니다 (삼정문란)


강력한 청나라와 부상하는 일본 사이에서, 조선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1863년 철종이 죽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잠깐의 개혁 기미가 보였지만, 근본적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30년 후,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이 청나라를 격파하는 모습을 보며 조선은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세도정치 60년은 조선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정조가 화성에서 꿈꾸던 개혁은 완전히 좌절되었고, 실학자들의 백성 사랑은 유배지에서 묻혔으며,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착취에 신음했죠.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도 백성들의 저항 정신은 살아있었습니다.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 의를 위해 싸운 평민들, 그들이야말로 진짜 한국 민족 DNA의 보유자였어요.


[다음 회 예고] 제3장 14화: "서구 충격과 세 나라의 갈림길" - 아편전쟁에 절망한 중국, 페리 함대에 전략적으로 대응한 일본, 병인양요에 쇄국으로 맞선 조선. 같은 충격, 다른 선택이 만든 운명의 분기점을 추적합니다.


[용어 해설]


세도정치: 19세기 조선에서 특정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정치 형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60년간 영의정 등 고위직을 세습하며 국정을 농단함


삼정문란: 전정(토지세), 군정(병역세), 환곡(구휼 곡식) 세 가지 제도가 모두 붕괴하여 백성들이 과도한 수탈을 당한 현상. 임술민란의 직접적 원인


임술민란: 1862년(임술년) 전국적으로 발생한 민란. 진주를 시작으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지에서 백성들이 삼정문란에 항거하여 봉기함


keyword
이전 13화한중일 민족DNA:도전과 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