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18-19세기, 운명의 갈림길
▌"天朝體制 一朝崩壞" (천조의 체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다) - 「도광실록」 22년(1842) 난징조약 체결 후
1840년 6월, 광둥.영국 동인도회사의 군함 16척이 주강(珠江) 하구에 나타났습니다. 2년 후, 청나라는 난징조약을 체결하며 굴복했어요.
1853년 7월, 일본 에도만. 페리 제독의 검은 증기선 4척이 나타났습니다. 1년 후, 일본은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며 개항했어요.
1866년 9월, 조선 강화도. 프랑스 군함이 침입했습니다. 조선군은 끝까지 싸웠고, 프랑스군은 물러갔어요.
각 13년간 시차로 발생한 같은 서구 충격. 하지만 세 나라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차이를 만든 것은 역사적 상황이 아니었어요. 민족 DNA였습니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쉽게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군사력 차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청나라는 물리적 응전만 가능한 나라였습니다.
프롤로그와 10화에서 본 것처럼, 중국은 황제가 죽거나 수도가 함락되면 왕조가 바뀝니다. 백성들은 새 지배자를 받아들이고, "우리"라는 정신적 실체는 없어요.
아편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42년 8월, 영국 군함이 난징에 다가오자 도광제는 즉시 항복했어요. 수도가 위협받으니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도광실록」 22년(1842) 8월 기록:
"英夷船堅砲利 我軍不能抵禦 不得已議和" (영국 배는 견고하고 대포는 날카로워 우리 군대가 막을 수 없어 부득이 화의한다)
여기서 핵심은 "부득이(不得已)"입니다. 권력 중심이 무너지니 항복이 합리적 선택이었던 거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난징조약 체결 후 청나라 조정의 반응이었어요.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오랑캐가 군주가 있어도 중화가 없는 것만 못하다)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중심"이라는 화이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물리적으론 졌지만 정신적으론 안 굴복한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이건 정신적 응전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였어요.
한국처럼 "왕이 죽어도 우리가 끝까지 싸운다"는 정신적 실체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관념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양무운동을 시작했어요.
▌[당시의 목소리] "中學爲體 西學爲用" (중국 학문을 근본으로 하고 서양 학문을 이용한다) - 이홍장, 양무운동 구호
1861년부터 시작된 양무운동의 핵심 구호가 "중체서용"이었습니다.
중국의 전통 사상과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되, 서양의 기술만 배우겠다는 거죠.
강남제조총국에서 대포를 만들고, 푸저우선정국에서 증기선을 건조했어요. 1880년대에는 북양수사라는 아시아 최강 해군을 창설했습니다.
하지만 근본은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과거제는 그대로였고, 황제 전제는 유지되었으며, 화이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서태후는 해군 예산을 빼돌려 이화원을 짓는데 썼어요.
왜 이렇게 피상적이었을까요?
중국의 DNA가 "중화 중심주의"였기 때문입니다.
"오랑캐에게 배운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중국이 본체이고 서양은 도구일 뿐"이라는 논리로 자기를 위안한 겁니다.
이는 중국이 이기적 도전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아직 화이관의 틀에 갇혀있었다는 증거예요. 진짜 이기적 도전(타국에 중화 강요)은 공산당 이후에야 완성됩니다.
결과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30년 개혁의 결실인 북양수사가 일본 해군에게 전멸당했습니다.
일본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1853년 페리 함대가 나타났을 때, 막부는 1년 만에 개항을 결정했어요. 왜 이렇게 빨랐을까요?
일본도 물리적 응전만 가능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프롤로그에서 본 것처럼, 일본은 쇼군이 죽거나 다이묘가 죽으면 끝이에요. "우리"라는 정신적 실체 없이 권력 중심으로만 움직입니다.
페리 함대 앞에서 막부가 물리적으로 열세라고 판단하자, 즉시 개항을 선택한 겁니다. 한국처럼 "끝까지 싸우자"는 정신적 저항은 없었어요.
하지만 일본은 청나라와 결정적으로 달랐습니다.
서구 충격을 확장의 기회로 봤다는 점입니다.
12화에서 본 요시다 쇼인의 「유수록」(1854)을 다시 보세요.
"지금 급선무는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류큐를 차지하며, 조선을 복속시키고,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다."
페리 함대를 본 직후 쓴 글입니다. "서양에 당했으니 우리도 서양처럼 침략하자"는 논리죠.
이것이 바로 이기적 도전 DNA입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은 단순한 근대화가 아니었어요. 임나일본부설 이래 1,500년간 이어진 확장 DNA를 근대 국가 시스템으로 완성한 혁명이었습니다.
「메이지유신 5개조 맹약」(1868)을 보세요.
"智識ヲ世界ニ求メ大ニ皇基ヲ振起スベシ"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크게 황실의 기초를 진흥한다)
"세계에서 지식을 구한다"는 건 배우겠다는 뜻이지만, "황실의 기초를 진흥한다"는 건 천황제 국가로 확장하겠다는 의미였어요.
실제로 메이지 정부는 즉시 부국강병을 추진했습니다. 징병제, 의무교육, 철도 건설... 모든 것이 "조선과 중국을 정복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향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和魂洋才" (일본의 정신, 서양의 재주) - 메이지 시대 구호
조선의 반응은 또 달랐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에서 조선군은 장렬하게 싸웠어요.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했고, 광성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은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정신적+물리적 이중 응전입니다.
프롤로그에서 본 것처럼, 한국은 왕이 죽어도 "우리"라는 정신이 살아있어요. 몽골 침입 때 강화도에서 40년 버틴 것처럼,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난 것처럼, 조선군은 국가가 약해도 끝까지 싸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치명적 한계가 있었어요.
조선은 도전을 못 합니다.
일본처럼 "서양을 배워서 중국과 조선을 침략하자"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한국의 도전은 이타적이기 때문입니다.
광개토대왕의 "여형여제" 정신, 김구의 "문화의 힘" 사상... 한국은 "함께 좋아지자"는 이타적 도전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병인양요, 신미양요에서 이긴 후 흥선대원군은 무엇을 했을까요?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완전한 쇄국이었어요.
일본처럼 "배워서 침략하자"도 아니고, 청나라처럼 "기술만 배우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문 닫고 버티자"였어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조선은 응전만 할 수 있고 도전은 못 하는 DNA였기 때문입니다.
외부 압력에는 끝까지 저항하지만(응전), 외부로 나가서 무언가를 하는 것(도전)은 이타적일 때만 가능해요. 이기적 도전(침략)은 DNA 자체가 거부합니다.
8화의 북벌론도, 13화의 세도정치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응전은 잘하는데 도전을 못해요.
▌[당시의 목소리] "斥邪衛正" (사악함을 물리치고 정도를 지킨다) - 척화비 건립 명분
1840-1870년대 세 나라의 선택을 민족 DNA 관점에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청나라는 물리적으로 쉽게 굴복했지만, 화이관을 버리지 못해 개혁이 피상적이었어요. 이기적 도전으로 전환하려 했지만 아직 중화 틀에 갇혀있었습니다.
일본은 물리적으로 쉽게 굴복했지만, 이를 확장의 기회로 전환했어요. 이미 1,500년간 축적된 이기적 도전 DNA를 근대 시스템으로 완성했습니다.
조선은 정신적+물리적으로 끝까지 저항했지만, 도전으로 전환할 수 없었어요. 이타적 도전 DNA라서 침략은 불가능하고, 응전만 계속하다 고립되었습니다.
30년 후, 선택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를 완파했어요.
30년간 양무운동을 한 청나라의 북양수사가 일본 해군에게 황해 해전에서 전멸당했습니다. 중체서용의 한계가 드러난 순간이었어요.
시모노세키 조약(1895)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습니다. 1,000년간 이어진 조공 체제가 무너졌어요.
일본의 이기적 도전 DNA가 승리한 겁니다.
조선은? 청나라 종주권이 사라지자 일본의 단독 세력권으로 들어갔습니다. 응전만 하고 도전을 못 한 결과였어요.
10년 후 러일전쟁(1905), 15년 후 한일병합(1910)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같은 서구 충격. 하지만 세 나라의 민족 DNA가 완전히 다른 반응을 만들어냈습니다.
청나라는 화이관 때문에 개혁을 망쳤고, 일본은 확장 DNA로 기회를 잡았으며, 조선은 응전 DNA로 고립되었어요.
[다음 회 예고] 제4장 15화: "메이지 유신 - 확장 민족 DNA의 근대적 시스템화" - 1868년 메이지 유신은 단순한 근대화가 아니었습니다. 임나일본부설 이래 1,500년간 이어진 일본의 확장 DNA를 부국강병, 징병제, 천황제 국가라는 근대 시스템으로 완성한 혁명이었습니다.
[용어 해설]
중체서용: 청나라 양무운동의 구호. "중국 학문을 근본으로 하고(中學爲體) 서양 학문을 이용한다(西學爲用)"는 의미. 화이관을 버리지 못해 제도 개혁 없이 기술만 도입하려 한 한계 노출
척화비: 흥선대원군이 1871년 신미양요 후 전국에 세운 비석. "서양과 화친하자는 자는 나라를 파는 자"라는 내용으로 응전만 하고 도전은 못 하는 조선의 DNA를 상징
화혼양재: 일본 메이지 시대 구호. "일본의 정신, 서양의 재주(和魂洋才)"로 천황제는 유지하며 서양 기술로 확장한다는 이기적 도전 DNA의 시스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