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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민족DNA:도전과 응전

제4장 근대화와 민족 DNA의 운명적 분화

by 한시을

16화: 청나라의 양무운동과 화이질서의 첫 번째 위기


▌"中學爲體 西學爲用" (중국 학문을 근본으로 하고 서양 학문을 이용한다) - 이홍장, 양무운동 구호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청나라 전권대신 이홍장이 일본 전권대신 이토 히로부미 앞에 앉았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조인식이었죠.


이홍장은 70세였어요. 30년간 양무운동을 이끌며 청나라를 근대화하려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가 만든 북양수사는 아시아 최강 함대라고 불렸죠.


그런데 그 함대가 일본 해군에게 전멸당했습니다. 황해 해전에서 단 하루 만에 무너졌어요.


이토 히로부미는 48세였습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로,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람이죠. 15년 전까지만 해도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나라의 총리대신이었어요.


이홍장이 조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1,000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화이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왜 청나라는 30년 개혁으로도 일본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답은 민족 DNA에 있었습니다.


화이질서의 DNA: "중국이 세계의 중심"


청일전쟁 패배를 이해하려면 청나라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봐야 합니다.


바로 화이질서(華夷秩序)였어요.


9화에서 본 것처럼, 송-명시대를 거치며 완성된 화이관은 단순한 우월의식이 아니었습니다. 우주적 질서였어요.


주희의 「중용장구서」:


"中國處天地之中 氣候之正 土地之美 故聖人生焉" (중국은 천지의 중심에 위치하여 기후가 바르고 토지가 아름다우므로 성인이 태어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중국 = 문명의 중심, 황제 = 천자(하늘의 아들)

주변국 = 오랑캐, 조공으로 교화받음

이것이 하늘이 정한 우주 질서


아편전쟁 패배 후에도 이 DNA는 변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집착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天朝上國 豈可與夷狄平等" (천조상국이 어찌 오랑캐와 평등할 수 있는가) - 「도광실록」 23년(1843)


양무운동: 화이관이 막은 진정한 개혁


1861년, 증국번·이홍장·좌종당이 양무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인상적이었어요.

강남제조총국: 대포·소총 제조

푸저우선정국: 증기선 건조

북양수사: 근대식 해군 창설

동문관: 외국어 학교


1890년 북양수사는 정원(定遠)·진원(鎭遠) 같은 최신 전함을 보유했어요. 일본 해군보다 강했습니다.


하지만 근본은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중체서용(中體西用)"이 문제였습니다.


이홍장의 설명:

"以中國之倫常名教爲原本 輔以諸國富強之術" (중국의 윤상명교를 근본으로 하고 여러 나라 부강의 기술로 보완한다)


여기서 핵심은 "중국을 근본으로"입니다. 서양은 그저 도구일 뿐이라는 거죠.


구체적으로 무엇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과거제도 - 그대로 유지. 여전히 사서오경 암송이 관료 등용 기준

황제 전제 - 변함없음. 서태후가 실권 장악

화이관 - 오히려 강화. "오랑캐 기술로 오랑캐를 막는다(師夷長技以制夷)"는 논리


이는 14화에서 본 것처럼 물리적 응전만 가능한 DNA의 한계였습니다. 권력 중심(황실)이 무너지면 저항이 끝나는 구조예요.


그래서 개혁도 권력 유지용일 뿐, 진정한 변화는 거부한 겁니다.


부패: 화이관이 만든 필연


더 심각한 문제는 부패였습니다.


북양수사를 보세요. 종이 위에서는 아시아 최강이었지만, 실제는 달랐어요.


서태후가 해군 예산을 빼돌려 이화원(頤和園)을 지었습니다. 함대는 실탄 훈련도 제대로 못 했어요. 대포알 대신 모래주머니를 넣어놓은 함선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화이관 때문입니다.


"천조상국인 우리가 섬나라 오랑캐한테 질 리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만연했어요. 진지하게 준비할 필요를 못 느낀 겁니다.


청나라 관료들의 사고방식:

"일본이 아무리 서양 기술을 배워도 오랑캐는 오랑캐다. 우리는 천조다. 기(氣)로 이긴다."


이런 정신승리가 청군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北洋艦隊 雖新式 將官腐敗 兵無鬪志" (북양함대는 신식이나 장교는 부패하고 병사는 싸울 의지가 없다) - 「청사고」 해군지


1894년 황해 해전: 30년 개혁의 결산


1894년 9월 17일, 황해.


북양수사 주력함대와 일본 연합함대가 맞붙었습니다.


종이 위 전력:

청나라: 정원·진원 등 전함 12척

일본: 마쓰시마·요시노 등 함선 12척


비슷해 보였죠?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일본 함대는 속력을 살려 기동전을 펼쳤어요. 청나라 함대는 대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청군의 전투 태도였어요. 일부 함선은 도망쳤고, 어떤 장교는 전투 중에 선실에 숨어있었다고 합니다.


제독 정여창(丁汝昌)이 직접 나서서 싸웠지만 소용없었어요. 청나라는 전함 5척을 잃고 패주했습니다.


30년 양무운동의 결과가 단 하루 만에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허무하게 졌을까요?


일본은 15년간 메이지 유신으로 시스템 전체를 바꿨어요. 징병제·교육·산업·정신교육... 모든 것이 전쟁을 위해 맞물려 돌아갔습니다.


청나라는 30년간 무기만 샀어요. 시스템은 그대로였습니다. 화이관도, 과거제도, 황제 전제도, 부패도 하나도 안 바뀌었죠.


물리적 응전만으로는 근대 시스템을 이길 수 없었던 겁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화이질서의 공식 종료


1895년 4월, 이홍장이 서명한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 "清國認明朝鮮國爲完全無缺之獨立自主"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승인한다)


이 조문이 가장 치욕적이었습니다.


1,000년간 조선은 청나라(명나라)에 조공을 바쳤어요. 이것이 화이질서의 핵심이었죠. "천자가 제후국을 교화한다"는 우주적 질서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은 독립국"이라고 선언하게 만든 겁니다. 청나라가 더 이상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는 뜻이었어요.


추가 조항들:

랴오둥 반도, 타이완, 팽호도 할양

배상금 2억 냥 (청나라 국가 예산의 3배)

사사(沙市)·충칭·쑤저우·항저우 개항


중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조약이었습니다.


무술변법: 너무 늦은, 너무 급한 시도


청일전쟁 충격으로 드디어 청나라가 움직였습니다.


1898년 강유위·양계초가 주도한 무술변법(戊戌變法)이었어요.


광서제가 100일간 103개 개혁 조서를 내렸습니다:

과거제 폐지

신식 학교 설립

의회 설치

입헌군주제 도입


드디어 시스템을 바꾸려 한 겁니다. 40년 늦었지만요.


하지만 103일 만에 끝났습니다.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개혁파를 처형했어요.


왜 실패했을까요?


화이관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는 "조종의 법도(祖宗之法)"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천조상국의 제도를 오랑캐 방식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거죠.


결국 화이관이 개혁을 막은 겁니다. 40년간 계속.


▌[당시의 목소리] "祖宗之法不可變" (조종의 법은 바꿀 수 없다) - 서태후, 무술정변 시


1900년 의화단 사건: 화이관의 최후 발악


2년 후, 화이관이 만든 마지막 광기가 폭발했습니다.


의화단(義和團) 사건이었어요. "부청멸양(扶淸滅洋)" - 청을 돕고 서양을 멸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외국인을 살해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서태후가 이들을 지원한 겁니다. 8개국 연합군에 선전포고까지 했어요.


"천조의 신령한 기운으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총칼 앞에 부적과 주문으로 맞선 거죠.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고, 서태후는 시안으로 도망쳤어요.


1901년 신축조약으로 배상금 4억 5천만 냥을 물어야 했습니다. 청나라 국가 예산의 12배였어요.


화이관이 청나라를 완전히 파산시킨 순간이었습니다.


화이질서 → 중화사상 전환의 씨앗


청일전쟁 패배는 청나라의 멸망(1911)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변화가 시작됐어요.


강유위·양계초 같은 개혁파는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는 새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기존 화이관: 한족 = 화, 이민족 = 이

새로운 중화민족: 한족 + 만주족 + 몽골족 + 회족 + 티베트족 = 모두 중화


왜 이런 변화가 필요했을까요?


청나라(만주족 왕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따로 있었어요. 이것이 20세기 공산당의 공격적 중화사상으로 진화하는 씨앗이 된 겁니다.


방어적 화이관 → 공격적 중화사상 전환의 시작점이었던 거죠.


세 나라의 1894년


청일전쟁은 세 나라 민족 DNA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습니다.


청나라: 30년 양무운동 → 화이관 때문에 실패

물리적 응전만: 무기만 사고 시스템은 유지

화이관 집착: "천조"라는 자만이 개혁 차단


일본: 15년 메이지 유신 → 확장 DNA 시스템화 성공

이기적 도전: 조선 침략이라는 명확한 목표

전면적 개혁: 천황제·징병제·교육 모두 침략용


조선: 동학농민운동 → 홍익인간 DNA 각성 시도

이타적 도전 추구: 보국안민, 탐관오리 척결

하지만 실패: 청일 양국 군대에 짓밟힘


1894년은 세 나라 DNA가 충돌한 해였습니다. 그리고 확장 DNA만 승리했어요.


청일전쟁 패배는 단순한 전쟁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1,000년 화이질서가 무너진 결정적 순간이었어요.


하지만 화이관 DNA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세기 들어 중국공산당이 이를 공격적 중화사상으로 재포장하게 됩니다.


[다음 회 예고] 제4장 17화: "동학 - 홍익인간의 19세기적 각성" -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민란이 아니었습니다. 서학(천주교)의 정신 식민화를 거부하고 한민족 고유성을 지키며 내부 개혁을 추구한, 홍익인간 정신의 실체적 발현이었습니다.


[용어 해설]


화이질서: 중국을 문명(華)의 중심, 주변국을 오랑캐(夷)로 규정한 동아시아 국제 질서. 중국 황제가 천자로서 주변국에 조공을 받고 교화하는 체제


중체서용: 양무운동의 구호. "중국 학문을 근본으로(中學爲體) 서양 학문을 이용한다(西學爲用)". 화이관을 지키려다 진정한 개혁 실패


중화민족: 청말 강유위·양계초가 만든 개념. 한족뿐 아니라 만주족·몽골족 등 모두 포함. 방어적 화이관에서 공격적 중화사상으로 전환하는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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