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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민족DNA:도전과 응전

제4장 근대화와 민족 DNA의 운명적 분화

by 한시을

제4장 근대화와 민족 DNA의 운명적 분화

18화: 일제강점과 홍익인간 민족 DNA의 수난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 한일병합조약 제1조, 1910년 8월 22일


1910년 8월 29일 월요일.


서울 거리는 고요했습니다. 15간마다 배치된 일본 헌병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어요. 모든 집회가 금지되고, 원로 대신들은 연금당했으며, 언론은 검열당했습니다. 그날 조선총독부 관보에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은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의 정신은 죽지 않았어요. 왕조는 무너졌지만, 1,500년을 이어온 홍익인간 DNA는 살아있었습니다. 36년간의 긴 수난이 시작되었지만, 그 어둠 속에서 조선인들은 "우리"라는 정신적 실체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확장 DNA의 완성: 제국 시스템


1910년 8월 29일, 메이지 천황은 조서를 발표했습니다.

"짐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와 더불어 한국을 우리 일본 제국에 병합하여 시세의 요구에 응한다. 한국 황제 폐하 및 그 황실 각원은 병합 후에도 상당한 예우를 받을 것이며, 민중은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을 증진할 것이다."


교묘한 언어였어요. "시세의 요구", "상당한 예우", "강복 증진"... 마치 조선을 위하는 것처럼 포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체는 명확했어요.


4-6세기 임나일본부설 이래 약 1,500년간 지속된 일본 확장 DNA가 마침내 근대 제국 시스템으로 완성된 순간이었습니다.

임나설(4-6세기): 한반도 지배의 신화적 정당화

임진왜란(1592): 확장 DNA의 첫 번째 대폭발

정한론(1870년대): 확장 DNA의 이론적 체계화

한일병합(1910): 확장 DNA의 제도적 완성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경찰제를 실시하며, 무단통치를 시작했습니다. 조선인 헌병보조원 4,000명, 일본인 헌병 2,000명, 일본인 경찰관 2,000명, 한국인 경찰관 3,200명, 그리고 일본군 2개 사단...

거미줄처럼 촘촘한 폭력 시스템이 조선 전역을 덮었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현금 세계는 동서로 나누어진 구(球)이고 인종은 각기 다르다. 서로 경쟁하기를 다반사와 같이 하고, 이기(利器)를 연구하기를 농상(農商)보다 심하게 한다" - 안중근, 『동양평화론』 서문, 1910년 3월


조선: 정신적 응전의 1,500년 DNA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왕조가 무너졌지만 저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본 것처럼, 조선은 정신적+물리적 이중 응전 DNA를 가진 민족이에요. 왕이 죽어도 "우리"라는 정신적 실체가 살아있어서 끝까지 싸웁니다.


몽골 침입 때 40년간 강화도를 지켰고,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났던 것처럼, 한일병합 후에도 조선인의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대한독립만세!"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원산, 진남포... 전국 218개 부군 중 212곳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참가 인원 200만 명 이상.


일본은 총검으로 진압했어요. 사망자 7,500명, 부상자 16,000명, 체포자 46,000명. 교회와 학교와 민가를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만세 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홍익인간 DNA 때문입니다.


3·1운동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15인이 천도교인이었어요. 17화에서 본 동학의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정신이 "독립만세"로 진화한 겁니다.

최제우가 1860년 동학을 만들며 꿈꾼 상리공생의 이상이, 50년 후 전 민족의 저항으로 분출된 거예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홍익인간 DNA의 국제 버전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습니다.

사형을 앞두고 그가 옥중에서 쓴 글이 『동양평화론』이에요. 원래 5장으로 구성할 계획이었지만, 일본이 약속을 어기고 급히 사형을 집행해서 서문과 전감(前鑑)만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글에도 홍익인간 DNA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요.

안중근은 한·중·일 3국의 평화를 주장했습니다.

① 뤼순을 중립지대로 해서 3국 평화회의 구성
② 3국 공동은행 설립, 공용 화폐 사용
③ 3국 연합군 창설, 서양 열강 침입에 공동 대응
④ 3국 황제가 로마 교황 중재 아래 상호 주권 존중


이것은 무엇일까요?

광개토대왕의 "여형여제(형제처럼 지내자)" 정신을 국제관계로 확장한 겁니다.

4세기 광개토대왕이 정복민과 형제가 되려 했다면, 20세기 안중근은 한·중·일이 형제국이 되어 함께 잘 살자고 한 거예요.

일본의 확장 DNA(타민족 지배)와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안중근은 말했어요.

"나는 한국을 위하여 나아가 세계를 위하여 이토를 죽인 것이다."

"한·중·일 삼국이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8,000만 이상의 국민이 서로 화합하여 점차 개화의 역으로 진보하고, 나아가 구주와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에 진력하면, 시민들이 안도할 것이다."

"널리 이롭게"의 국제관계 버전이었습니다.

일본은 자국만 잘 되려는 이기적 도전이었지만, 안중근은 동양 전체가 잘 되려는 이타적 도전을 꿈꿨어요.


이것이 바로 홍익인간 해석 3호였습니다.


1,500년 전 광개토대왕(홍익인간 해석 1호) → 동학 최제우(홍익인간 해석 2호) → 안중근 동양평화론(홍익인간 해석 3호) → (다음 회) 김구(홍익인간 해석 4호)로 이어지는 홍익인간 DNA의 거대한 흐름이 보이죠?


중국: 신해혁명과 5·4운동


같은 시기 중국은 어땠을까요?


1911년 10월 10일, 우창기의(武昌起義)가 일어나 신해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1912년 1월 1일, 쑨원(孫文)이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되었고, 2월 12일 선통제(마지막 황제 부의)가 퇴위하며 청나라가 멸망했어요.


2,000년 황제제가 끝나고 공화정이 시작된 겁니다.


하지만 실질적 권력은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어갔어요. 1915년 일본은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를 강요했습니다.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불평등 조약이었죠.


1919년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 3,000명이 천안문 광장에 모였습니다.

"21개조 폐기!", "주권 회복!", "친일파 타도!"

5·4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어요. 상하이 상인들이 파업했고, 노동자들이 동맹휴업을 했습니다.


중국도 응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과 다른 점이 있었어요.

조선은 왕조가 무너졌지만 민족 정신(홍익인간 DNA)이 살아서 저항했습니다. 정신적+물리적 이중 응전이죠.


중국은 왕조가 무너지자 새로운 왕조(중화민국)를 세웠어요. 물리적 응전은 하지만, 왕조 교체로 연속성이 단절되는 구조입니다.


이 차이가 나중에 큰 분기점을 만듭니다.


황민화 정책: 홍익인간 DNA 말살 시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정책이 바뀌었습니다.


황민화 정책이 시작된 거예요.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1938년: 조선어 사용 금지, 일본어 상용
1939년: 창씨개명 강요
1940년: 신사참배 강제
1941년: 내선일체(內鮮一體) 강조


왜 이랬을까요?

일본은 깨달은 거예요. 조선인의 정신을 바꾸지 않으면 진정한 지배는 불가능하다는 걸.

창씨개명을 보세요.

"김", "이", "박"처럼 조선식 성을 버리고, "金本", "伊藤", "朴山"처럼 일본식 성명을 쓰라는 겁니다.


이름이 무엇일까요? 정체성이에요. 가족의 역사고, 조상의 기억이며, 민족의 뿌리입니다.

이름을 바꾸라는 것은 "너희는 이제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신사참배는 더 노골적이었어요.

일본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라는 겁니다. 조선의 모든 학교에 신사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절하게 했습니다.

기독교 학교들이 저항했어요. 평양 숭실전문학교, 숭의여학교, 선천 신성학교... 차라리 문을 닫는 쪽을 택했습니다.


왜요? 조선인의 정신까지 일본에 팔 수는 없었으니까요.

내선일체는 말이 좋아 "조선과 일본이 하나"지만, 실제로는 조선을 일본에 완전히 종속시키겠다는 겁니다.

일본은 조선인을 전쟁터로 끌고 갔어요. 징병, 징용, 위안부...

홍익인간 DNA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끝나지 않은 저항: 임시정부와 독립군


하지만 조선인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어요.

김구,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독립운동가들이 모였습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웠어요.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조선인은 왕조가 없어도 계속 싸웠습니다.

정신적+물리적 이중 응전의 DNA가 작동한 겁니다.


일본과 대비해보세요.

일본은 천황이 항복하자 모두 멈췄어요.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 후 일본군은 일제히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물리적 응전만 가능한 구조였기 때문이에요. 권력 중심(천황)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집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어요.

왕조가 망해도, 임시정부가 힘이 없어도, 백성들이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우리"라는 정신적 실체가 살아있었으니까요.


김구의 각성: 문화의 힘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는 생각했습니다.

"36년간 일본과 싸웠다. 이겼다. 하지만 진짜 승리는 무엇인가?"


그는 깨달았어요.

물리적 힘으로는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왜군을 물리쳤지만 300년 후 다시 침략했습니다. 일본 확장 DNA는 전쟁에서 지고도 또 살아났어요.


김구는 동학과 안중근의 정신을 계승하며 새로운 답을 찾았습니다.

"문화의 힘으로 강국이 되리라."

이것이 바로 홍익인간 해석 4호였습니다.


광개토대왕(여형여제, 홍익인간 해석 1호) → 최제우 동학(홍익인간 해석 2호) → 안중근 동양평화론(홍익인간 해석 3호) → 김구 문화 강국론(홍익인간 해석 4호)


1,500년 DNA가 진화하는 순간이었어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36년.

일본은 조선인의 몸을 지배하려 했고, 정신까지 말살하려 했습니다.

창씨개명, 신사참배, 내선일체, 징병, 징용, 위안부... 홍익인간 DNA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였어요.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조선인은 왕조가 무너져도, 국가가 사라져도, "우리"라는 정신을 지켰습니다.

3·1운동에서 200만 명이 만세를 불렀고, 독립군이 만주에서 싸웠으며,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버텼어요.

왜요?

정신적+물리적 이중 응전 DNA 때문입니다.

일본(물리적 응전만)은 천황이 항복하면 끝이지만, 조선(정신+물리 이중 응전)은 왕조가 망해도 백성이 계속 싸웁니다.


그리고 김구는 36년 수난 속에서 깨달았어요.

물리적 힘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 이겨도 또 침략한다. 진정한 승리는 문화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다음 회 예고] 제5장 19화: "김구의 예언 - '문화로 강국이 되리라'" - 1947년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썼습니다. 광개토대왕 → 동학 → 안중근으로 이어진 홍익인간 DNA가 김구에게서 최종 해석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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