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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민족DNA:도전과 응전

제4장 근대화와 민족 DNA의 운명적 분화

by 한시을

15화: 메이지 유신 - 확장 민족 DNA의 근대적 시스템화


▌"萬國對峙" (만국과 대등하게 맞선다) - 메이지 천황 즉위 선언(1868)


1868년 1월 3일, 교토.


16세의 메이지 천황이 즉위했습니다. 260년간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천황이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선 순간이었죠.


서양 역사에서 이런 사건을 뭐라 부를까요? 왕정복고(Restoration)입니다. 옛 제도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메이지 유신은 복고가 아니었습니다. 혁명이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임나일본부설 이래 1,500년간 이어진 일본의 확장 민족 DNA를 근대 국가 시스템으로 완성한 확장의 시스템화였습니다.


모든 개혁은 하나의 목표를 향했어요.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을 정복한다는 목표 말입니다.


천황제 국가: 신국 사상의 제도화


메이지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천황을 절대 권력자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868년 3월 14일, 「오개조 서문(五箇條の御誓文)」을 발표했어요.


"天地神明ニ誓フ" (천지신명에게 맹세한다)


첫 구절부터 신을 들먹입니다. 천황이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신의 후손임을 강조한 거죠.


1화에서 본 천황신화를 다시 떠올려보세요. "천조대신(아마테라스)의 후손이 영원히 일본을 다스린다"는 천양무궁(天壤無窮) 사상이었죠.


메이지 정부는 이 고대 신화를 근대 국가의 헌법으로 만들었습니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 제1조:


"大日本帝國ハ萬世一系ノ天皇之ヲ統治ス"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제3조:


"天皇ハ神聖ニシテ侵スヘカラス"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할 수 없다)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규정한 겁니다. 살아있는 신이라는 뜻이에요.


왜 이렇게 천황을 신격화했을까요?


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의 후손인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은 신국(神國)이다. 따라서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는 것은 신의 뜻이다."


이 논리는 나중에 대동아공영권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토대가 됩니다.


▌[당시의 목소리] "神州不滅" (신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 메이지 정부 국가 신토 정책


부국강병: 침략을 위한 시스템 구축


메이지 정부의 모든 개혁은 "부국강병(富國強兵)"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됩니다.


겉으로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한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진짜 의미는 달랐습니다.


"조선과 중국을 침략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


징병령(1873)


메이지 정부는 즉시 징병제를 도입했어요. 모든 20세 남자는 3년간 군복무를 해야 했습니다.


「徴兵告諭」(징병고유, 1872)를 보세요.


"今般 海陸軍兵ヲ徴募ス 人民皆兵タルノ本分アリ" (이제 해군과 육군 병사를 징집한다. 인민은 모두 병사가 될 본분이 있다)


"人民皆兵" - 모든 백성이 병사라는 겁니다.


왜 이렇게 급하게 징병제를 도입했을까요?


12화에서 본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기억하세요. "조선을 복속시키고 만주와 중국을 침략한다"는 목표를 실현하려면 대규모 상비군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학제(1872)


메이지 정부는 의무교육도 도입했어요. 「학제」를 반포하며 전국에 소학교를 세웠습니다.


"學問ハ身ヲ立ルノ財本" (학문은 몸을 세우는 재산의 근본이다)


좋은 말처럼 들리죠? 하지만 실제 교육 내용을 보면 달랐습니다.


천황에 대한 절대 충성, 신국 사상, 일본의 우월성... 이런 것들을 어린 나이부터 주입했어요.


1890년 「교육칙어(教育勅語)」:


"一旦緩急アレバ義勇公ニ奉シ以テ天壤無窮ノ皇運ヲ扶翼スベシ" (일단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의용으로써 공에 봉사하여 천양무궁한 황실을 떠받들어야 한다)


유사시에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겁니다. 교육이 침략 전쟁을 위한 세뇌 시스템이었던 거죠.


철도와 산업화


메이지 정부는 1872년 신바시-요코하마 철도를 개통했어요. 1889년에는 도카이도 본선이 완성되어 도쿄-고베가 연결되었습니다.


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었어요. 병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군사 인프라였습니다.


방적 공장, 제철소, 조선소... 모든 산업이 군수 산업과 연결되었어요.


부국강병은 경제 발전이 아니라 침략 준비였던 겁니다.


▌[당시의 목소리] "殖産興業" (산업을 일으켜 나라를 부유하게 한다) - 메이지 정부 경제 정책 구호


정한론: 1,500년 DNA가 국가 정책이 되다


메이지 유신 후 가장 격렬한 논쟁이 정한론(征韓論) 논쟁이었습니다.


1873년, 조정 회의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주장했어요.


"조선이 일본 사절을 무례하게 대했다.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


반대파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였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다. 먼저 내부를 더 강화한 후에 조선을 치자."


결국 반대파가 이겼고, 사이고는 하야했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양쪽 모두 조선 침략에는 동의했다는 점입니다.


"지금 칠 것인가, 나중에 칠 것인가"의 차이였을 뿐, "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논쟁거리도 아니었어요.


왜 이렇게 당연하게 조선 침략을 이야기했을까요?


1,500년간 이어진 확장 민족 DNA 때문입니다.


고대 임나일본부설부터 시작해서, 임진왜란,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으로 이어지는 일관된 흐름이었죠. 메이지 유신은 이 DNA를 근대 국가 시스템으로 완성한 것뿐이었습니다.


1874년, 일본은 대만을 침략했어요. 정한론 논쟁에서 밀린 정한파들이 "조선은 안 되면 대만이라도"라며 출병을 강행한 겁니다.


이것이 메이지 일본의 첫 해외 침략이었습니다.


강화도조약(1876): 확장 DNA의 첫 실현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조선 수군이 포격하자, 일본은 "무력 도발"이라며 조선을 압박했어요. 이듬해인 1876년,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며 개항했습니다.


일본이 포함한 조약 조문을 보세요.


제1조: "朝鮮國ハ自主ノ邦ニシテ日本國ト平等ノ權ヲ有ス"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자주의 나라"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이건 조선을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독점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조약 내용은 완전히 불평등했어요.

일본인은 조선에서 치외법권을 가짐

일본 화폐를 조선에서 사용 가능

항구 개방과 일본 상인 자유 무역


이는 20년 전 일본이 미국에게 당한 불평등조약과 똑같았습니다. 일본은 자기가 당한 걸 그대로 조선에게 적용한 거예요.


강화도조약은 메이지 일본의 확장 DNA가 처음으로 실현된 순간이었습니다. 임나일본부설 이래 1,500년 만에 다시 한반도에 발을 들인 겁니다.


▌[당시의 목소리] "征韓ノ儀 實ニ皇國ノ急務" (조선 정벌은 실로 황국의 급선무다) - 사이고 다카모리, 정한론 주장(1873)


청일전쟁(1894): 확장 DNA의 첫 번째 대폭발


강화도조약 후 20년, 메이지 일본의 확장 DNA가 본격적으로 폭발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었어요.


겉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돕는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선 지배권을 둘러싼 청나라와의 전쟁이었습니다.


결과는 일본의 완승이었어요. 30년간 양무운동을 한 청나라의 북양수사가 일본 해군에게 황해 해전에서 전멸당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1895):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

랴오둥 반도, 타이완, 팽호도를 일본에 할양

배상금 2억 냥(당시 일본 국가 예산의 3배)


메이지 일본이 단 20년 만에 아시아 최강국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500년 확장 DNA를 근대 시스템으로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천황제로 침략을 정당화하고, 징병제로 대군을 확보하며, 산업화로 무기를 생산하고, 교육으로 국민을 세뇌했어요. 모든 시스템이 "조선과 중국 정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작동했습니다.


10년 후 러일전쟁, 15년 후 한일병합


청일전쟁 승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격파했어요. 아시아 국가가 백인 제국을 이긴 첫 사례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1910년 한일병합으로 완전히 병합했어요.


임나일본부설(4-6세기) → 임진왜란(1592) → 강화도조약(1876) → 청일전쟁(1894) → 한일병합(1910)


1,500년간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일관된 확장 DNA의 흐름이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이 DNA를 근대 국가 시스템으로 완성한 혁명이었던 거죠.


시스템화된 확장 DNA의 공포


메이지 일본이 무서운 이유는 확장 의지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을 완벽한 시스템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천황제 = 침략의 정당화 장치

징병제 = 침략의 인력 공급 장치

산업화 = 침략의 물자 공급 장치

교육 = 침략의 이념 주입 장치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침략 기계였어요.


이 시스템은 1945년 패전까지 계속 작동했습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50년간 쉬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21세기 현재, 평화헌법이 이 시스템을 억압하고 있지만, DNA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 영유권 주장, 평화헌법 개정 시도... 확장 DNA의 재발현 열망이 계속되고 있어요.


1868년 메이지 유신은 단순한 근대화가 아니었습니다. 1,500년간 이어진 일본의 확장 민족 DNA를 천황제, 부국강병, 정한론이라는 근대 시스템으로 완성한 혁명이었어요.


모든 개혁이 하나의 목표를 향했습니다.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을 정복하며,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목표 말입니다.


[다음 회 예고] 제4장 16화: "청나라의 양무운동과 화이질서의 첫 번째 위기" - 30년 양무운동의 실패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1,000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화이질서의 첫 번째 결정적 위기였으며, 이는 20세기 공산당의 공격적 중화사상으로 변신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용어 해설]


천양무궁: 일본 천황제의 근본 교리. "하늘과 땅이 무궁한 한 천황의 지위도 무궁하다"는 뜻으로 천황 지배의 영원성과 신성성을 강조. 메이지 헌법에서 제도화됨


정한론: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해야 한다는 메이지 시대 주장. 요시다 쇼인이 이론화하고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치 쟁점화. 1,500년 확장 DNA가 근대 국가 정책으로 구체화된 사례


부국강병: 메이지 정부의 핵심 구호. "나라를 부유하게, 군대를 강하게"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조선과 중국 침략을 위한 시스템 구축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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