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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민족DNA:도전과 응전

제3장 18-19세기, 운명의 갈림길

by 한시을

12화: 일본 막부 말기 - 확장 민족 DNA의 전략적 잠복


▌"草莽崛起" (초야에 묻힌 인재들이 일어나라) - 요시다 쇼인, 「유수록」(1859)


1853년 7월 8일, 에도만(江戶灣).


새벽 안개를 뚫고 검은 철갑선 4척이 나타났습니다.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이끄는 증기선들이었어요.


일본인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타이호(黑船, 검은 배)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어요. 일본은 단 1년 만에 개항을 결정했고, 15년 후에는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며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왜 이렇게 빨랐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일본은 이미 250년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도 막부의 쇄국은 잠자는 것이 아니라 확장 DNA를 내재화하는 시간이었어요. 페리 함대는 그저 방아쇠를 당긴 것뿐이었습니다.


에도 막부: 쇄국 속 확장 의지의 배양


도쿠가와 막부(1603-1868)는 겉으로는 철저한 쇄국을 실시했어요. 1639년부터 네덜란드와 중국을 제외한 모든 외국과의 교류를 차단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무엇을 했을까요?


신분제의 철저한 고착화


에도 막부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를 더욱 강화했어요.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 만든 이론을 보세요.


"무사는 다스리고, 농민은 먹이고, 장인은 만들고, 상인은 유통한다. 이는 하늘이 정한 질서이므로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여기서 핵심은 "하늘이 정한 질서"라는 표현입니다. 유교의 천리(天理) 개념을 이용해서 신분제를 절대 불변의 법칙으로 만든 거죠.


실제로 에도 시대 내내 농민이 무사가 되거나, 상인이 양반 대접을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어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신분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무사도의 이론화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는 「무사도」를 체계화했습니다.


"무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군을 섬기는 것이 천부적 사명이다. 이는 일본만의 독특한 도(道)이며, 중국에는 없는 것이다."


이 논리의 핵심은 절대 복종입니다. 쇼군에게 다이묘가, 다이묘에게 무사가, 무사에게 백성이 절대 복종하는 수직적 구조를 완성한 거죠.


▌[당시의 목소리] "君臣之義 重於泰山" (군신의 의리는 태산보다 무겁다) - 야마가 소코, 「무사도」


국학의 발달과 신국 사상 강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고사기전(古事記傳)」을 저술하며 일본 고유 사상을 강조했어요.


"일본은 신이 창조한 나라이며, 천황은 신의 직계 자손이다. 중국의 유교나 불교는 외래 사상일 뿐, 일본의 고유한 정신은 신도(神道)에 있다."


이는 명청교체를 보면서 "중국도 망하는구나. 하지만 일본 천황의 만세일계(萬世一系)는 끊어지지 않았다"는 우월의식을 키운 겁니다.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는 더 나아갔어요.


"일본은 세계의 근원이다. 일본에서 나온 신들이 세계를 창조했으므로, 일본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천명이다."


난학의 발달: 서양을 연구하다


쇄국했지만 일본은 네덜란드와의 교류는 유지했어요.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통해 서양 문물이 들어왔습니다.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이었어요.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는 네덜란드 의학서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해서 「해체신서(解體新書)」를 만들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서양 의학서였죠.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1811-1864)은 서양 과학기술을 적극 연구했어요.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東洋道德 西洋藝術" (동양의 도덕, 서양의 기술)


일본의 정신은 지키되, 서양의 기술은 배워야 한다는 거죠. 이는 나중에 메이지 유신의 "和魂洋才(화혼양재)"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요시다 쇼인: 확장 DNA의 이론가


에도 막부 말기, 한 인물이 일본의 미래를 설계했습니다. 바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에요.


쇼인은 조슈 번(長州藩)의 하급 무사 출신이었어요. 하지만 그의 사상은 혁명적이었습니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쇼인은 1857년 고향에 작은 서당을 열었어요. 쇼카손주쿠라는 이름의 이 서당에서 불과 2년간 가르쳤지만,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 초대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 육군 원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 초대 외무대신


이들 모두 쇼인의 제자였어요.


정한론의 이론적 토대


쇼인의 핵심 사상은 「유수록(幽囚錄)」(1854)에 담겨있습니다.


"지금 급선무는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류큐를 차지하며, 조선을 복속시키고,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한론(征韓論)의 시작이었어요. 임진왜란 이후 250년 만에 다시 한반도 침략을 공공연히 주장한 겁니다.


쇼인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그의 논리는 이랬어요.


"서양 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하고 있다. 일본이 살아남으려면 먼저 아시아를 차지해야 한다. 조선과 중국을 복속시켜 일본의 세력권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는 임나일본부설 - 정한론 -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지는 일본 확장 DNA근대적 이론화였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北割滿洲之地 南收臺灣呂宋諸島 漸示進取之勢" (북으로는 만주 땅을 나누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섬들을 거두어 점차 진취의 기세를 보인다) - 요시다 쇼인, 「유수록」


존왕양이에서 개국으로


쇼인은 처음에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했어요. 천황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거죠.


하지만 페리 함대를 본 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서양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서양의 기술을 배워서 강해진 다음, 아시아를 정복해야 한다."


이는 응전이 아니라 도전으로의 전환이었어요. 서양 충격을 방어적으로만 받아들인 게 아니라, 오히려 확장의 기회로 삼은 겁니다.


사쓰마와 조슈: 막부 타도의 실력 배양


요시다 쇼인의 사상은 두 번(藩)에서 현실화되었습니다. 조슈 번(長州藩)과 사쓰마 번(薩摩藩)이에요.


사쓰마 번의 근대화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1809-1858)는 사쓰마 번주로서 적극적인 서양화를 추진했어요.


반사관(反射爐)을 건설해서 대포를 주조하고, 조선소를 만들어 증기선을 건조했으며, 방직 공장을 세워 근대 산업을 육성했습니다.


사쓰마는 류큐 왕국(지금의 오키나와)을 사실상 지배하면서 밀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어요. 이 자금으로 군비를 확충한 겁니다.


조슈 번의 개혁


조슈 번도 마찬가지였어요. 무라타 세이후(村田清風, 1783-1855)의 개혁으로 재정을 정비하고,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정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특히 조슈는 1863년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서양 선박을 포격하는 사건을 일으켰어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연합함대의 반격으로 참패했지만, 이 경험이 오히려 서양 군사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습니다.


패배 후 조슈는 더욱 적극적으로 서양 무기를 도입하고 군제를 개혁했어요.


막부의 무능과 번의 강화


같은 시기 도쿠가와 막부는 무엇을 했을까요? 갈팡질팡했습니다.


개국과 쇄국 사이


페리 함대의 압력으로 1854년 가나가와 조약(미일화친조약)을 맺었지만, 막부 내에서는 개국파와 쇄국파가 격렬히 대립했어요.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는 강경하게 개국을 추진했지만, 1860년 사쿠라다몬 밖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안세이 대옥


막부는 반대파를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1858년부터 1859년까지 이어진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에서 요시다 쇼인을 포함한 수많은 존왕양이파를 처형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어요. 쇼인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에 분노하며 막부 타도를 결심했고, 각 번들은 막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습니다.


세 나라의 서구 충격 대응, 운명의 갈림길


1850-60년대, 동아시아 세 나라 모두 서구 열강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


아편전쟁(1840-1842) 패배 후 청나라는 양무운동을 시작했어요. "중체서용(中體西用)" - 중국의 정신은 지키되 서양의 기술을 배우자는 거죠.


하지만 개혁은 느렸습니다. 보수파의 반발이 컸고, 황실의 의지도 약했어요. 결국 30년간 개혁을 해도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게 참패했습니다.


조선의 쇄국 강화


조선은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겪으면서 오히려 쇄국을 강화했어요.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습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는 외부 세계를 완전히 차단하겠다는 선언이었어요. 조선이 국제 정세 변화에서 완전히 고립된 순간이었습니다.


일본의 전격적 개혁


일본은 정반대였어요. 페리 함대 충격 후 15년 만에(1868)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왜 이렇게 빨랐을까요? 바로 에도 시대 250년간 내재화한 확장 DNA 덕분이었어요.


쇄국하면서도 난학으로 서양을 연구하고, 신분제로 위계를 강화하며, 신국 사상으로 우월의식을 키우고, 요시다 쇼인 같은 사상가가 정한론을 이론화했죠.


페리 함대는 그저 방아쇠를 당긴 것뿐이었습니다. 총알은 이미 장전되어 있었어요.


백제와 일본 왕실: 숨겨진 혈연관계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이해하려면 일본 왕실과 백제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천황이 68세 생일 기자회견에서 충격적 발언을 했어요.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천황 스스로 백제 혈통을 인정한 순간이었습니다.


실제로 「속일본기」 790년 기록을 보면, 간무 천황의 어머니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명확히 나와 있어요. 간무 천황은 "백제왕씨는 나의 외척(朕之外戚)"이라고 직접 선언했습니다.


663년 백강구 전투를 다시 봐야 합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은 왜 대군을 파견했을까요?


단순한 동맹이 아니었어요. 혈연적 이유였습니다. 일본 왕실과 백제 왕실이 깊은 혈연관계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의 목소리] "百濟王氏 朕之外戚" (백제왕씨는 나의 외척이다) - 「속일본기」 간무 천황 선언 (790)


흥미로운 역사적 연결: 백제에서 대동아공영권까지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백제는「양서」백제전 기록에 따르면 "22 담로(擔魯)"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파견해 다스렸어요. 이 22담로는 한반도는 물론 일부 해외 지역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1,400년 후 일본이 주장한 대동아공영권의 영역을 보면 묘한 유사성이 보여요. 한반도, 만주, 중국 동북부, 동남아시아...


요시다 쇼인이 「유수록」에서 "조선을 복속시키고, 만주와 중국을 침략한다"라고 했을 때, 이것이 단순히 19세기 제국주의 논리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시 일본은 "백제의 옛 영토를 회복한다"는 역사적 정당화 작업을 하려 한 것은 아닐까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1925-1938)의 작업을 보세요.

단군신화 부정: 한국의 건국 시점 자체를 없애버림

임나일본부설 강화: 고대부터 한반도는 일본 영향권

상고사 왜곡: 한국 역사의 출발점을 제거


왜 일본이 한국의 상고사를 집중적으로 왜곡했을까요?


출발점을 없애면 모든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원래 역사가 없었다. 백제도 일본 계통이었다. 따라서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일본 영향권이다"라는 논리를 만들 수 있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임나일본부설 (고대): 한반도 남부는 일본 영향권

정한론 (근대): 잃어버린 옛 영토 회복

대동아공영권 (현대): 역사적 영토의 최종 완성


모두 하나의 일관된 논리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는 아직 확정적으로 증명된 이론은 아닙니다. 백제 22담로의 정확한 위치, 대동아공영권과의 지리적 중복 여부 등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요.


하지만 일본이 1,400년간 일관되게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대한 확장 의지를 보여온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1853년 페리 함대가 에도만에 나타났을 때, 일본은 겉으로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이미 250년간 확장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요시다 쇼인이 감옥에서 쓴 「유수록」의 정한론, 사쓰마와 조슈 번의 군사력 강화, 난학자들의 서양 연구... 모든 것이 메이지 유신과 이후 침략으로 이어지는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다음 회 예고] 제3장 13화: "조선의 날갯짓 불가능 비극" - 영정조의 개혁 이후 세도정치로 무너진 조선. 강력한 청나라와 부상하는 일본 사이에서 고립된 조선이 왜 변화의 기회를 잡지 못했는지, 그 구조적 한계를 추적합니다.


[용어 해설]


정한론: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 요시다 쇼인이 이론화했고 메이지 유신 후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주장. 결국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한일병합으로 실현됨


난학: 에도 시대 일본에서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학문. 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을 포함하며 일본의 근대화 토대가 됨


존왕양이: 천황을 받들고(尊王) 서양 오랑캐를 물리친다(攘夷)는 에도 말기 정치 구호. 나중에 막부 타도 운동으로 발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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