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중세의 시험 - 침입과 응전
▌"中國有禮儀之大故稱夏 有服章之美謂之華" (중국은 예의가 크므로 하(夏)라 하고, 의복이 아름다우므로 화(華)라 한다) - 「춘추좌전」 정공 10년
960년, 송 태조 조광윤이 진교역에서 황포를 몸에 두르며 황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 놓인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북쪽에는 거란족의 요나라가, 서북쪽에는 탕구트족의 서하가 버티고 있었거든요.
한족 왕조가 이민족들에게 둘러싸인 이런 상황은 중국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한나라와 당나라 때는 중국이 압도적으로 강했는데, 이제는 대등하거나 오히려 열세였어요.
그런데 바로 이 위기 상황이 중국인들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으로 나온 것이 화이관(華夷觀)의 체계적 완성이었어요.
이 화이관이야말로 1,000년 후 중국공산당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는 사상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송나라가 직면한 현실은 참혹했어요. 요나라와 전쟁을 벌였지만 계속 패배했고, 결국 1005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통해 매년 은 10만 냥, 비단 20만 필을 바치기로 약속해야 했습니다.
한족 왕조가 이민족에게 조공을 바친다? 이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치명적 타격이었어요.
하지만 송나라 지식인들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밀렸지만 "문화적으로는 우리가 우월하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주희(朱熹, 1130-1200)의 논리를 보세요.
"하늘이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사방을 이민족으로 둘러싸게 한 것은, 중국이 문명의 등불 역할을 하게 하려는 뜻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군사력에서 밀릴 수 있지만, 결국은 우리의 문화가 그들을 교화시킬 것이다."
이게 바로 "以德化人"(덕으로 사람을 교화한다)의 논리입니다. 힘으로는 안 되니까 문화와 도덕으로 승부하겠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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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목소리]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이적이 군주가 있음만 못하니 제하가 없음과 같다) - 주희, 「맹자집주」
1279년,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이제 중국 전체가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 거예요.
한족 지식인들에게는 정체성의 위기였습니다. "문화적으로 우월한 우리가 왜 야만족에게 지배당하는가?"
하지만 이들의 대응은 놀라웠어요. 화이관을 포기하는 대신 오히려 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겁니다.
원 말기의 학자 황종희의 논리를 보세요.
"몽골이 중국을 정복한 것은 무력 때문이지, 문화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결국 우리 문화가 승리한 것이다."
실제로 원나라는 중국식 관료제를 도입하고, 과거제를 실시하며,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였어요. 한족들은 이를 근거로 "야만족도 결국 우리 문화를 따라 한다"며 자존심을 회복했습니다.
이때부터 화이관에 새로운 논리가 추가되었어요. "文化華夷論" - 혈통이 아니라 문화로 화(華)와 이(夷)를 구분한다는 거죠.
1368년,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습니다. 한족 왕조의 부활이었죠.
명나라는 즉시 화이관을 국가 이념의 중심에 놓았어요. 하지만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송나라 때의 방어적 화이관이 공격적이고 체계적인 중화질서론으로 발전한 거예요.
명 태조 주원장의 선언을 보세요.
"짐이 중국을 평정한 것은 화하(華夏)를 회복하고 이적을 물리쳐 천하의 정통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사방의 이민족들은 마땅히 중국의 교화를 받고 조공을 바쳐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천하의 정통"이라는 표현입니다. 명나라만이 정통성 있는 국가이고, 다른 모든 나라는 그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한 것이 조공 체제였습니다.
명나라의 조공 체제는 정말 체계적이었어요. 주변국들을 엄격한 서열로 나누어 관리했습니다.
1등급 - 책봉국: 조선, 안남(베트남), 류큐 2등급 - 조공국: 일본, 자바, 수마트라 등 3등급 - 호시국: 티베트, 신강 지역 등
각 등급마다 조공 주기, 사신 규모, 무역 규모가 다르게 정해져 있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관계의 중심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화이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조선과의 관계를 보면 이 시스템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알 수 있어요. 조선은 3년마다 정기 조공을 바치고, 새 왕이 즉위하면 책봉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대가로 명나라로부터 "예의지국"이라는 칭호와 자치권을 보장받았죠.
▌[당시의 목소리] "天子有道 守在四夷" (천자가 도를 지키면 사이(四夷)가 이를 받든다) - 「명사」 조선전
하지만 명나라 화이관에는 치명적 문제가 있었어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는 16-17세기에 이르면 동아시아 정세가 복잡해졌거든요. 임진왜란에서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일본을 물리쳤지만, 명나라의 국력 소모가 컸고, 만주족은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며 새로운 위협으로 떠올랐어요.
그런데도 명나라는 계속 "우리가 천하의 중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죠.
이는 나중에 명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어요.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든요.
같은 시기 조선과 일본은 중화질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명나라에게 중화질서는 당연한 우주의 원리였어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라고 본 거죠.
조선은 달랐습니다. 중화질서를 인정하되 홍익인간 정신과 조화시키려 했어요. 명나라에 조공은 바치지만 내정은 자주적으로 운영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정치를 실천했습니다.
일본은 더욱 독특했어요. 겉으로는 조공을 바쳤지만 속으로는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신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화질서를 이용할 뿐,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은 거죠.
놀라운 것은 이 1,000년 전 화이관이 지금도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중국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구호를 보세요. 시진핑이 "중국몽"을 말할 때, 그 사상적 뿌리는 바로 송-명시대 화이관에 있어요.
일대일로 정책도 마찬가지예요. 주변국들에게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인데, 이는 명나라 조공 체제의 현대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중국이 한국의 사드 배치에 경제 보복으로 응답한 것이나, 남중국해에서 "고대부터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중국이 중심이고 주변국은 그에 맞춰야 한다"는 화이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21세기 들어 완전히 다른 문화 확산 방식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K-드라마예요.
「대장금」이 중국에서,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끈 과정을 보세요. 중국의 일대일로처럼 경제적 압력을 가하거나, 명나라 조공 체제처럼 정치적 복속을 요구하지 않아요. 그냥 감동적인 스토리를 만들어서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만드는 거죠.
특히 주목할 점은 K-드라마가 각국에서 현지화되지 않고 한국어 그대로 사랑받는다는 사실이에요. 중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일본인들이 한국 음식을 찾고, 유럽인들이 한국을 여행 오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1,000년 전 명나라의 화이관과는 정반대 방식이에요. 강요가 아닌 매력, 복종이 아닌 공감으로 문화를 전파하는 거죠.
여기서 광개토대왕의 "여형여제" 정신이 다시 빛을 발합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고 함께 좋아지려는 마음이 K-드라마 성공 비결인 거예요.
결국 송-명시대 화이관의 핵심 문제는 일방통행적 사고에 있었어요. "우리가 중심이고 너희는 주변"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이었죠.
이런 사고방식은 21세기에는 통하지 않아요.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문화가 평등하게 경쟁하는 시대거든요.
반면 홍익인간 정신은 "함께 이로워지자"는 상생의 철학입니다. 누가 중심이고 누가 주변인지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win-win 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거죠.
K-드라마의 성공이 바로 이를 증명합니다. 한국이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다른 나라도 한국에 굴복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서로 다른 문화를 즐기고 존중하면 되는 거니까요.
1,000년 전 송나라 지식인들이 "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했을 때, 그들은 미래를 예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들의 화이관이 21세기에 와서 K-드라마라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 전파 방식과 대비될 줄은 말이에요.
하지만 역사는 이렇게 대화합니다. 과거의 한계를 통해 현재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거죠. 명나라의 일방통행적 화이관이 있었기에, 한국의 쌍방향적 홍익인간 정신이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이제 제2장 "중세의 시험 - 침입과 응전"을 마무리하고, 동아시아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넘어갑니다.
18-19세기, 동아시아 세 나라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청나라는 강건성세로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고, 조선은 영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맞았으며, 일본은 에도 막부의 안정 속에서 확장 DNA를 내재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충격이 이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죠. 아편전쟁, 페리 함대의 개항 요구, 그리고 조선의 쇄국... 똑같은 외부 충격 앞에서 세 나라가 선택한 길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한중일 관계의 출발점이 되었어요.
[다음 회 예고] 제3장 10화: "청나라 절정기 - 명청교체에서 강성기까지" - 만주족이 어떻게 한족을 지배하면서도 중화질서를 계승하고 발전시켰는지, 그리고 강희·옹정·건륭 3대 황제가 이룬 대제국의 비밀을 파헤칩니다.
[용어 해설]
화이관: 중국을 문명(華)으로, 주변민족을 야만(夷)으로 구분하는 세계관. 송-명시대를 거치며 체계적인 중화중심주의로 완성됨
조공체제: 명나라가 주변국과의 관계를 정리한 외교시스템. 중국 황제를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 속에서 조공과 책봉을 통해 관계를 유지
문화화이론: 혈통보다 문화를 기준으로 화(華)와 이(夷)를 구분한다는 논리. 원나라 지배기에 한족 지식인들이 자존심 회복을 위해 발전시킨 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