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쫓는 물고기들: 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

에필로그

by 한시을

에필로그


문학은 여전히 우리를 부른다

26회.

마지막입니다.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출발했습니다. "문학은 괴로움의 기록이다."

24회를 거쳐 지금 여기,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500년 전, 어느 기생의 딸

1700년대 어느 날, 남원.

춘향이라는 기생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고, 권력에 맞섰고, 매를 맞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녀는 괴로워했습니다.

하늘이 던진 것(신분제)과 자신의 의가 추구한 것(정의)이 달랐으니까요.

그녀는 펄떡였습니다.

그 펄떡임이 문학이 되었습니다.

300년이 지났습니다.

2025년, 서울.

김지영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결혼했고, 출산했고, 경력을 포기했고,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괴로워했습니다.

하늘이 던진 것(완벽한 아내+엄마+직장인)과 자신의 의가 추구한 것(나 자신)이 달랐으니까요.

그녀는 펄떡였습니다.

그 펄떡임이 문학이 되었습니다.

300년.

하늘은 바뀌었습니다. 봉건에서 신자유주의로.

먹이도 바뀌었습니다. 과거급제에서 자기계발로.

물고기도 바뀌었습니다. 춘향에서 김지영으로.

하지만 펄떡임은 같았습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

이것이 300년 전에도, 지금도, 300년 후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영원합니다.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

왜 우리는 500년 전 기생의 딸 이야기를 읽을까요?

왜 우리는 지구 반대편 게이샤의 슬픔에 눈물을 흘릴까요?

왜 우리는 1980년 광주의 소년이 죽어가는 장면을 읽으며 흔들릴까요?

첫째, 위로.

"나만 괴로운 게 아니야."

춘향도 괴로워했어. 이인화도 괴로워했어. 명호도, 동호도, 김지영도 괴로워했어.

시마무라도, 알렉시예비치의 여성들도, 부엔디아 가문도, 세 도도, 수잔도, 블라디미르도 모두 괴로워했어.

500년, 5개 대륙, 12편의 작품.

모두 같은 괴로움.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

당신이 지금 느끼는 괴로움도 같습니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 괴로운 물고기입니다.

이것이 문학이 주는 첫 번째 선물입니다.

둘째, 이해.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늘-먹이-물고기 구조를 알면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왜 춘향은 변학도를 거부했을까?
→ 하늘(신분제)이 던진 법과 춘향의 의가 추구한 법이 달랐으니까.

왜 김지영은 정체성을 잃었을까?
→ 하늘(신자유주의)이 던진 향과 김지영의 의가 추구한 향이 달랐으니까.

왜 블라디미르는 계속 기다릴까?
→ 하늘이 던진 법(부조리)과 블라디미르의 의가 추구한 법(의미)이 달랐으니까.

구조가 보이면 혼란이 질서가 됩니다.

복잡해 보이던 세상이 명료해집니다.

이것이 문학이 주는 두 번째 선물입니다.

셋째, 용기.

"나도 펄떡일 수 있어."

춘향은 펄떡였습니다. 매를 맞아도, 감옥에 갇혀도.

동호는 펄떡였습니다.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도.

김지영은 펄떡였습니다. 정체성을 잃어가면서도.

그들이 펄떡였다면, 나도 펄떡일 수 있습니다.

하늘이 던진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가 추구하는 것을 쫓을 수 있습니다.

괴로워도 괜찮습니다.

괴로움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이것이 문학이 주는 세 번째 선물입니다.

넷째, 연대.

"우리는 함께 펄떡인다."

춘향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방자가 있었고, 향단이가 있었고, 몽룡이 돌아왔습니다.

동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이 함께 펄떡였습니다.

김지영은 혼자가 아닙니다. 수많은 82년생들이 함께 펄떡입니다.

문학은 고립된 물고기를 연결합니다.

500년 전 춘향과 지금의 김지영을 연결합니다.

한국의 동호와 러시아의 여성들을 연결합니다.

당신과 나를 연결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강물에서 펄떡입니다.

이것이 문학이 주는 네 번째 선물입니다.


문학은 왜 필요한가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지금은 AI 시대인데, 문학이 무슨 소용이야?"

"유튜브, 넷플릭스, 게임... 재미있는 게 많은데 굳이 책을 읽어야 해?"

"문학으로 돈을 벌 수도 없는데 왜 공부해?"

좋은 질문입니다.

대답하겠습니다.

AI는 데이터를 학습합니다. 하지만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AI는 수백만 편의 텍스트를 읽고, 패턴을 찾고, 그럴듯한 문장을 생성합니다.

하지만 AI는 욕망하지 않습니다.

AI는 하늘이 던진 것과 자신의 의가 추구한 것 사이에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AI는 펄떡이지 않습니다.

AI는 문학을 생성할 수 있지만, 문학을 살 수는 없습니다.

문학은 데이터가 아닙니다.

문학은 살아있는 괴로움입니다.

춘향의 매 맞는 소리, 동호의 마지막 숨소리, 김지영의 정체성 상실.

이것은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인 당신이 이것을 읽을 때,

당신의 괴로움과 공명합니다.

이것이 문학입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즐겁습니다. 하지만 깊이가 다릅니다.

3분짜리 영상은 즐겁습니다.

2시간짜리 영화는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300페이지 소설은 당신을 변화시킵니다.

왜?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상은 빠르게 지나갑니다. 소설은 천천히 스며듭니다.

영상은 수동적으로 봅니다. 소설은 능동적으로 읽습니다.

영상은 이미지를 줍니다. 소설은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춘향의 얼굴을 당신이 그립니다.

동호의 목소리를 당신이 만듭니다.

김지영의 괴로움을 당신이 느낍니다.

당신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깊이 새겨집니다.

돈은 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문학으로 부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문학은 다른 것을 줍니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

하늘이 던진 먹이를 쫓아 살 수도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 성공.

이것들을 얻으면 행복할까요?

춘향전의 변학도는 권력을 가졌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도가니의 이사장은 돈을 가졌지만 괴물이었습니다.

먹이를 얻는 것이 답이 아닙니다.

답은 자신의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뭐라고 하든,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내가 믿는 것을 쫓는 것.

춘향의 정의, 동호의 민주주의, 김지영의 정체성.

그들은 이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의미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문학은 이것을 가르칩니다.


당신도 물고기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

당신도 물고기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쫓고 있습니까?

하늘이 던진 먹이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의가 추구하는 것입니까?

당신은 지금 괴로웁니까?

괜찮습니다.

괴로움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욕망과 현실이 불일치한다는 것은,
당신이 순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은 지금 펄떡이고 있습니다.

춘향처럼, 동호처럼, 김지영처럼.

그것이 인간입니다.

부처님은 2,500년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존재는 괴롭다.

이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괴로움을 인정하는 순간,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나만 괴로운 게 아니야."
"이것은 자연스러운 거야."
"나는 살아있어."

무상(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지금 괴로워도,
지금 하늘이 강력해도,
지금 불가능해 보여도,

모든 것은 변합니다.

조선의 신분제도 무너졌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도 끝났습니다.
전두환의 독재도 무너졌습니다.

지금의 하늘도 언젠가 바뀝니다.

당신의 펄떡임이 강물을 바꿉니다.

공(空). 모든 것은 비어있다.

당신이 쫓는 것,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춘향의 정의는 비어있습니다.
시대마다 정의의 내용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춘향에게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목숨을 걸 만큼.

김지영의 정체성도 비어있습니다.
정체성은 계속 변하니까요.

하지만 김지영에게는 필사적이었습니다.
자아를 잃을 만큼.

비어있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하세요.

하지만 그것이 공(空)임을 잊지 마세요.

그래서 펄떡이세요.

하지만 그것이 일체개고(一切皆苦)임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변화하세요.

하지만 그것이 무상(無常)임을 받아들이세요.


문학은 계속 부른다

500년 전, 춘향이 불렀습니다.

"이리 오세요. 나도 괴로웠어요."

100년 전, 이인화가 불렀습니다.

"이리 오세요. 나도 정체성을 잃었어요."

40년 전, 동호가 불렀습니다.

"이리 오세요. 나도 신념을 지켰어요."

지금, 김지영이 부릅니다.

"이리 오세요. 나도 나를 찾고 있어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문학은 죽은 자들의 기록이 아닙니다.

문학은 살아있는 목소리입니다.

500년 전 목소리가 지금도 들립니다.

왜?

우리가 같은 물고기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구조의 괴로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영원합니다.

500년 후에도 누군가 춘향전을 읽을 것입니다.

하늘은 또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먹이도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욕망의 구조는 같을 것입니다.

색성향미촉법.

인간의 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은 여전히 이 여섯 가지를 욕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과 현실은 여전히 불일치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괴로울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펄떡일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여전히 필요할 것입니다.


마지막 부탁

26회를 마칩니다.

긴 여정이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까지.

춘향전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까지.

500년 한국문학, 5개 대륙 노벨문학상.

하늘-먹이-물고기.

색성향미촉법.

일체개고-무상-공.

우리는 함께 새로운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 지하수맥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부탁이 있습니다.

첫째, 읽으세요.

문학을 읽으세요.

오래된 작품도, 새로운 작품도.

한국 작품도, 외국 작품도.

당신의 괴로움과 공명하는 목소리를 찾으세요.

둘째, 해제하세요.

그냥 읽지만 마세요.

하늘을 보세요. 먹이를 찾으세요. 물고기를 이해하세요.

당신만의 해석을 만드세요.

비평은 창작입니다.

셋째, 나누세요.

혼자만 간직하지 마세요.

친구와, 가족과, SNS에서 나누세요.

"이 작품 정말 좋았어. 왜냐하면..."

당신의 목소리를 내세요.

넷째, 쓰세요.

가능하다면 직접 쓰세요.

소설이든, 시든, 에세이든.

당신의 펄떡임을 기록하세요.

당신도 물고기입니다.

당신의 괴로움도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연대하세요.

당신만 괴로운 게 아닙니다.

같은 괴로움을 겪는 물고기들과 만나세요.

함께 펄떡이세요.

혼자 펄떡이면 강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함께 펄떡이면 강물이 바뀝니다.

강물이 바뀌면 하늘이 바뀝니다.


끝, 그리고 시작

에필로그를 마칩니다.

26회 연재 《욕망을 쫓는 물고기들: 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을 마칩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당신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우물가에서,
새로운 물을 길으러,
새로운 길을 내며,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여정.

문학은 여전히 우리를 부릅니다.

춘향이 부릅니다. "이리 오세요."

동호가 부릅니다. "이리 오세요."

김지영이 부릅니다. "이리 오세요."

블라디미르가 부릅니다. "함께 기다려요."

당신도 부를 차례입니다.

"이리 오세요. 나도 괴로웠어요."

"이리 오세요. 나도 펄떡였어요."

"이리 오세요. 우리 함께 펄떡여요."

인간은 끝없이 펄떡이는 물고기입니다.

500년 전에도, 지금도, 500년 후에도.

그래서 문학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고, 쓰고, 펄떡입니다.

감사합니다. 26회 동안 함께해주셔서.

이제 책을 덮으세요.

그리고 당신의 책을 펴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쓰세요.

당신의 펄떡임을 기록하세요.

문학은 여전히 우리를 부릅니다.

이전 25화욕망을 쫓는 물고기들: 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