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문학과 불교의 해제
지금까지 우리는 19회에 걸쳐 문학과 불교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늘, 먹이, 물고기. 일체개고, 무상, 집착.
그런데 이상한 질문 하나 해볼까요?
춘향이 쫓은 '정의'는 정말 존재했을까요?
동호가 지키려 한 '민주주의'는 정말 존재했을까요?
김지영이 찾으려 한 '정체성'은 정말 존재했을까요?
만약 이것들이 모두 환상이라면?
모든 것이 실체 없이 비어있다면?
이것이 공(空)입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가장 깊고도 어려운 진리.
공(空, Śūnyatā).
한자 그대로 '빌 공'. 비어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공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관계와 조건에 의해 임시로 존재할 뿐,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것.
이해하기 어렵죠?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명품 가방은 실체가 있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방의 '명품성'은 어디 있을까요?
가죽에 있을까요? 디자인에 있을까요? 로고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명품성'은 사회적 합의, 즉 "이것은 명품이다"라는 집단적 믿음에만 존재합니다.
만약 내일부터 모든 사람이 "그건 그냥 가방이야"라고 생각한다면? 명품성은 사라집니다.
가방은 여전히 있지만, 명품성은 비어있습니다. 공(空)입니다.
이제 우리가 본 12편의 작품을 다시 봅시다.
춘향이 쫓은 '정의'는 비어있었을까요?
춘향은 "변학도의 수청을 들 수 없다. 정의에 어긋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일까요?
조선시대 유교 질서에서는 '정절'이 정의였습니다. 한 번 관계를 맺은 남자와 평생 함께하는 것.
하지만 다른 시대, 다른 문화에서는? 일부다처제 사회에서는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 허용됩니다.
'정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춘향이 쫓은 '정의'도 조선시대 유교적 가치관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존재했습니다. 공(空)입니다.
동호가 지키려 한 '민주주의'는 비어있었을까요?
동호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도청을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아테네 민주주의는 노예를 인정했습니다. 미국 민주주의는 한때 흑인을 배제했습니다. 북한도 스스로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 부릅니다.
'민주주의'도 시대와 해석에 따라 다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동호가 지키려 한 '민주주의'도 1980년 한국이라는 맥락에서만 의미를 가졌습니다. 공(空)입니다.
김지영이 찾으려 한 '정체성'은 비어있었을까요?
김지영은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나'란 무엇일까요?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릅니다. 세포도 바뀌었고, 생각도 바뀌었고, 기억도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연결하는 고정된 실체는 무엇일까요?
없습니다. '나'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조건들의 집합일 뿐입니다.
김지영이 찾으려 한 '정체성'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역할의 임시적 조합이었습니다. 공(空)입니다.
욕망만 비어있는 게 아닙니다. 먹이도 비어있습니다.
과거 급제는 실체가 있었을까요?
조선시대에는 과거 급제가 최고의 먹이였습니다. 모든 양반 자제들이 이것을 쫓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과거 급제를 원하지 않습니다.
과거 급제라는 '제도'는 실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가치'는 비어있었습니다. 시대와 조건에 의존했을 뿐입니다.
경제성장은 실체가 있었을까요?
1960-70년대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은 절대적 가치였습니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달성해야 할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환경파괴, 불평등, 삶의 질 저하. 경제성장의 부작용이 드러났습니다.
경제성장이라는 '현상'은 실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절대적 가치'는 비어있었습니다. 맥락에 의존했을 뿐입니다.
자기계발은 실체가 있을까요?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 자기계발은 강력한 먹이입니다. 영어, 자격증, 스펙. 모두가 이것을 쫓습니다.
하지만 50년 후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자기계발 대신 '공동체 기여'가 가치가 될지도 모릅니다.
자기계발이라는 '활동'은 실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절대적 가치'는 비어있습니다. 시대에 의존할 뿐입니다.
모든 먹이는 공(空)입니다.
욕망도 비어있고, 먹이도 비어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조선의 신분제는 실체가 있었을까요?
500년 동안 견고했습니다. 양반-중인-상민-천민. 이 질서는 절대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무너졌습니다.
신분제라는 '제도'는 실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영원성'은 비어있었습니다. 조건에 의존했을 뿐입니다.
전두환 독재는 실체가 있었을까요?
1980년대에는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총칼과 탱크, 3S정책. 이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으로 무너졌습니다.
독재라는 '체제'는 실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불변성'은 비어있었습니다. 조건에 의존했을 뿐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실체가 있을까요?
지금은 강력해 보입니다. 경쟁, 효율, 자기계발. 이 가치들은 절대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50년 후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 하늘이 올지도 모릅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은 실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영속성'은 비어있습니다. 조건에 의존할 뿐입니다.
모든 하늘은 공(空)입니다.
욕망도, 먹이도, 하늘도 비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물고기, 즉 우리 자신은?
춘향은 실체가 있었을까요?
물론 있었습니다. 기생의 딸로 태어나, 몽룡을 만나고, 변학도를 거부하고, 옥에 갇힌 실제 인물(혹은 전설).
하지만 '춘향'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으로 구성되었을까요?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 몽룡과의 관계, 정절에 대한 믿음, 변학도에 대한 저항.
이것들은 모두 관계와 조건의 산물입니다. 다른 조건이었다면 다른 춘향이었을 것입니다.
'춘향'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공(空)입니다.
김지영은 실체가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1982년에 태어나, 대학을 나오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실제 인물(혹은 소설 속 인물).
하지만 '김지영'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으로 구성되었을까요?
딸, 학생, 직원, 아내, 엄마. 끊임없이 변하는 역할들의 집합.
어느 것이 진짜 김지영일까요? 모두이자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지영'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공(空)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름, 직업, 나이, 성별. 이것들은 모두 조건과 관계의 산물입니다.
10년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다릅니다. 10년 후의 당신도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불변한 '당신'은 어디 있을까요?
없습니다. 공(空)입니다.
여기서 무서운 질문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비어있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요?
춘향이 정의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것, 의미 없는 것 아닌가요? 정의도 비어있는데.
동호가 민주주의를 위해 도청을 지킨 것, 의미 없는 것 아닌가요? 민주주의도 비어있는데.
김지영이 정체성을 찾으려 괴로워한 것, 의미 없는 것 아닌가요? 정체성도 비어있는데.
공(空)은 허무주의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가장 큰 오해입니다.
공은 절망이 아니라 해방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역설적입니다.
비어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만약 '정의'가 고정된 실체라면?
조선시대의 정의는 영원히 조선시대의 정의여야 합니다. 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인권, 평등, 자유는? 불가능합니다. 조선시대 정의와 모순되니까.
하지만 '정의'가 공(空), 즉 고정된 실체가 없다면?
조선시대에는 정절이 정의였고, 현대에는 평등이 정의일 수 있습니다. 변할 수 있습니다.
공(空)이기에 변화가 가능합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고정된 실체라면?
아테네 민주주의가 영원한 민주주의여야 합니다. 노예제를 포함한.
하지만 '민주주의'가 공(空)이라면?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습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줄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민주주의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공(空)이기에 진보가 가능합니다.
만약 '나'가 고정된 실체라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똑같아야 합니다. 변할 수 없습니다.
실수를 했다면? 영원히 실수한 사람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가 공(空)이라면?
어제 실수했어도 오늘 변할 수 있습니다.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공(空)이기에 구원이 가능합니다.
이제 문학으로 돌아옵시다.
문학은 공(空)을 어떻게 기록할까요?
춘향전을 보세요.
춘향이 쫓은 '정의'는 비어있습니다. 조선시대 유교적 맥락에서만 의미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500년 후에도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왜?
형태는 공(空)이지만, 구조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라는 구체적 내용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비어있습니다.
하지만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인간'이라는 구조는 영원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제에 맞섰고, 현대에는 불평등에 맞섭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구조는 같습니다.
문학은 공(空)한 형태를 통해 불공(不空)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소년이 온다를 보세요.
동호가 지킨 '민주주의'는 비어있습니다. 1980년 광주라는 맥락에서만 의미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를 흔듭니다. 왜?
형태는 공(空)이지만, 본질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구체적 이념은 해석마다 다릅니다. 비어있습니다.
하지만 '신념을 위해 싸우는 인간'이라는 본질은 영원합니다.
1980년에는 독재에 맞섰고, 지금은 다른 부정의에 맞섭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문학은 공(空)한 형태를 통해 불공(不空)한 본질을 증명합니다.
82년생 김지영을 보세요.
김지영이 찾은 '정체성'은 비어있습니다. 2016년 한국 여성이라는 맥락에서만 의미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서 공감을 얻습니다. 왜?
형태는 공(空)이지만, 괴로움은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라는 구체적 내용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비어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찾으려는 인간'이라는 괴로움은 보편적입니다.
한국에서는 성차별과 싸우고, 미국에서는 인종차별과 싸웁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괴로움은 같습니다.
문학은 공(空)한 형태를 통해 불공(不空)한 괴로움을 공유합니다.
여기서 가장 큰 역설이 나타납니다.
부처님은 "집착을 버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공(空)이니까.
하지만 문학의 물고기들은 집착했습니다.
춘향은 정의에 집착했습니다. 정의가 공(空)임을 알았다면 집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호는 민주주의에 집착했습니다. 민주주의가 공(空)임을 알았다면 도망갔을 것입니다.
김지영은 정체성에 집착했습니다. 정체성이 공(空)임을 알았다면 괴로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착은 무지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서 또 다른 역설이 나타납니다.
공(空)을 알면서도 집착해야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정의는 비어있습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정의는 필요합니다. 비어있더라도.
민주주의는 비어있습니다. 절대적 진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비어있더라도.
정체성은 비어있습니다.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나를 찾아야 합니다. 비어있더라도.
이것이 공(空)의 역설입니다.
비어있음을 알지만, 채워야 합니다.
환상임을 알지만, 진짜처럼 살아야 합니다.
의미 없음을 알지만, 의미를 만들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봅시다.
"집착을 버려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가 아닙니다.
"집착하되, 그것이 공(空)임을 잊지 마라"는 뜻입니다.
춘향이 정의를 추구하되, "정의는 영원한 진리"라고 집착하지 않았다면?
변학도를 거부하되, "나만이 옳다"고 교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호가 민주주의를 지키되, "민주주의는 절대선"이라고 집착하지 않았다면?
도청을 지키되, "우리만이 정의"라고 독단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지영이 정체성을 찾되, "나는 이래야 한다"고 집착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찾되, "변하지 않는 나"를 강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空)의 지혜는 이것입니다:
정의를 추구하되, 정의가 시대에 따라 변함을 안다
민주주의를 지키되, 민주주의도 진화해야 함을 안다
정체성을 찾되, 정체성도 변할 수 있음을 안다
집착하되, 유연하라.
싸우되, 교만하지 마라.
의미를 만들되, 절대화하지 마라.
이것이 공(空)의 지혜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욕망은 비어있습니다. 조건에 의존할 뿐.
먹이도 비어있습니다. 맥락에 의존할 뿐.
하늘도 비어있습니다. 시대에 의존할 뿐.
물고기도 비어있습니다. 관계에 의존할 뿐.
모든 것이 공(空)입니다.
하지만 괴로움의 구조는 영원합니다.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 이것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도, 1980년에도, 2016년에도, 지금도. 인간은 똑같이 괴로워합니다.
대상은 달라도 구조는 같습니다.
이것이 문학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형태는 공(空)이지만, 구조는 영원하다.
내용은 공(空)이지만, 본질은 불변이다.
표면은 공(空)이지만, 괴로움은 보편적이다.
문학은 공(空) 속에서 영원을 발견합니다.
500년 전 춘향의 이야기가 지금도 감동을 주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정의라는 내용은 비어있지만, 부당함에 맞서는 구조는 영원하니까.
마지막 질문입니다.
모든 것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공(空)을 받아들이되, 허무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비어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정의는 비어있지만, 지금 싸워야 할 부정의는 실재합니다.
집착하되, 공(空)을 잊지 마세요.
둘째, 변화를 받아들이되,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욕망의 대상은 변합니다. 하지만 괴로움의 구조는 변하지 않습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부당함에 맞서는 인간성은 영원합니다.
형태는 바뀌되, 본질을 지키세요.
셋째, 유연하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의의 내용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정의를 추구하는 노력은 멈춰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의 형태는 진화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키는 싸움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공(空)을 알되, 펄떡이세요.
우리는 괴로움의 구조를 이해했습니다(19회).
무상을 이해했습니다(20회).
공을 이해했습니다(21회).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습니다.
문학은 왜 영원한가?
하늘도 변하고, 먹이도 변하고, 물고기도 변합니다. 모든 것이 공(空)입니다.
그런데 왜 500년 전 춘향의 이야기가 지금도 감동을 줄까요?
왜 100년 전 이인화의 괴로움이 지금도 울림을 줄까요?
왜 세계 곳곳의 물고기들이 같은 구조로 펄떡일까요?
다음 회에서는 문학의 영원성을 깊이 들여다봅니다.
공(空)하지만 영원한 것.
변하지만 불변인 것.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확인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이 지금 추구하는 것도 비어있습니다. 조건과 맥락에 의존할 뿐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계속 추구할 수 있나요? 공(空)을 받아들이면서도 집착할 수 있나요? 비어있음을 알면서도 의미를 만들 수 있나요? 그리고 그것이 허무가 아니라 해방임을 느끼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다음 회 예고] 제4부 22회: "문학은 왜 영원한가 – 인간은 끝없이 펄떡이는 물고기다" - 26회 연재의 마지막 이론편입니다. 일체개고, 무상, 공.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왜 문학은 영원한가?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왜 인간은 똑같이 펄떡일까요? 그리고 그 펄떡임을 기록하는 문학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요? 제4부의 결론, 문학의 영원성을 증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