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욕망을 쫓는 물고기들: 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

제4부 문학과 불교의 해제

by 한시을

22회: 문학은 왜 영원한가 – 인간은 끝없이 펄떡이는 물고기다


우리는 먼 길을 왔습니다.

22회. 프롤로그부터 지금까지 21개의 회차를 지나왔습니다.

춘향전부터 고도를 기다리며까지 12편의 작품을 해제했습니다. 500년의 한국문학사를 관통했고, 5개 대륙의 노벨문학상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무상(無常), 공(空).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학에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질문에 답할 시간입니다.

문학은 왜 영원한가?


하늘은 변했다

500년을 돌아봅시다.

조선의 하늘 (1392-1910)
신분제. 양반-중인-상민-천민. 500년 동안 견고했습니다.
→ 무너졌습니다.

일제의 하늘 (1910-1945)
식민지배. 황국신민화, 창씨개명, 징용.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 무너졌습니다.

분단의 하늘 (1945-현재)
남과 북. 이념 대립. 고정될 것 같았습니다.
→ 변하고 있습니다.

독재의 하늘 (1960-1987)
박정희, 전두환. 경제성장과 3S정책.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 무너졌습니다.

자본의 하늘 (1987-2000년대)
민주화 이후 자본주의. 돈이 모든 것을 지배했습니다.
→ 변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의 하늘 (2000년대-현재)
경쟁과 효율. 자기계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입니다.
→ 언젠가 무너질 것입니다.

하늘은 계속 변했습니다.

조선도, 일제도, 독재도. 영원할 것 같던 모든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먹이도 변했다

하늘이 변하니 먹이도 변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 정절, 효도. 신분에 맞는 삶.
→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
신교육, 근대화, 황국신민.
→ 친일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독재시대
경제성장, 3S정책, 체제 순응.
→ 압축 성장의 폐해로 비판받습니다.

신자유시대
자기계발, 경쟁력, 효율성.
→ 언젠가는 낡은 가치가 될 것입니다.

먹이도 계속 변했습니다.

어제의 선(善)이 오늘의 악(惡)이 되고, 어제의 진보가 오늘의 반동이 됩니다.


물고기도 변했다

하늘도 변하고, 먹이도 변하는데, 물고기는?

춘향도 늙었을 것입니다.

몽룡과 결혼한 후 양반 부인으로 살면서, 젊은 날의 열정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인화도 변했을 것입니다.

아내가 죽은 후, 민족의식이 약해졌을 수도, 더 강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동호는 죽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도청에서. 15살에.

우리 자신도 변합니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릅니다. 10년 후의 나도 다를 것입니다.

물고기도 계속 변했습니다.

영원한 '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입니다.


그런데 남은 것이 있다

하늘은 변했습니다.
먹이도 변했습니다.
물고기도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500년 전 춘향의 이야기가 지금도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100년 전 이인화의 괴로움이 지금도 우리에게 울림을 줍니다.
40년 전 동호의 펄떡임이 지금도 우리를 흔듭니다.

일본 시마무라의 이야기가 한국 독자에게도 와닿습니다.
러시아 여성 병사들의 이야기가 세계인에게 공감을 얻습니다.
유럽 블라디미르의 기다림이 모든 대륙 사람들에게 의미를 줍니다.

어떻게 변한 것이 영원할 수 있을까요?


답: 욕망의 구조는 불변이다

여기 답이 있습니다.

하늘은 변하지만, 하늘의 본질은 같습니다.

조선이든, 일제든, 독재든, 자본이든, 신자유든.
모든 하늘은 물고기에게 순응을 강요했습니다.

"신분에 맞게 살아라" (조선)
"황국신민이 되라" (일제)
"체제를 인정하라" (독재)
"돈을 벌어라" (자본)
"경쟁에서 이겨라" (신자유)

형태는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습니다.

먹이는 변하지만, 욕망의 구조는 같습니다.

과거 급제든, 신교육이든, 경제성장이든, 자기계발이든.
모두 색성향미촉법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시대는 법(法, 신분질서) 중심이었습니다.
독재시대도 법(法, 이념과 체제) 중심이었습니다.
신자유시대는 향(香, 정체성)과 법(法, 자기계발)이 결합했습니다.

대상은 달랐지만 구조는 같았습니다.

물고기는 변하지만, 욕망의 메커니즘은 같습니다.

춘향도, 이인화도, 동호도, 김지영도.
모두 원하는 것(욕망)과 현실(먹이)의 불일치로 괴로워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1980년에도, 2016년에도, 지금도.
인간은 똑같이 펄떡입니다.

상황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습니다.


문학이 기록하는 것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문학은 구체적인 것을 통해 보편적인 것을 기록합니다.

춘향전은 조선시대 신분제를 기록했습니다. (구체적)
하지만 동시에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인간을 기록했습니다. (보편적)

조선의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부당한 권력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춘향은 500년 후에도 의미를 가집니다.

만세전은 일제강점기 식민지배를 기록했습니다. (구체적)
하지만 동시에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인간을 기록했습니다. (보편적)

일제는 물러갔지만, 정체성의 위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인화는 100년 후에도 울림을 줍니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를 기록했습니다. (구체적)
하지만 동시에 신념을 위해 싸우는 인간을 기록했습니다. (보편적)

광주의 독재는 무너졌지만, 신념을 위한 싸움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동호는 40년 후에도 우리를 흔듭니다.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한국 여성을 기록했습니다. (구체적)
하지만 동시에 정체성을 찾는 인간을 기록했습니다. (보편적)

한국의 2016년은 지나갔지만, 정체성을 찾는 괴로움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김지영은 세계 곳곳에서 공감을 얻습니다.


문학의 영원성: 세 가지 증명

첫째,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포착합니다.

하늘은 변합니다. 조선 → 일제 → 독재 → 자본 → 신자유.
하지만 하늘의 본질(순응 강요)은 변하지 않습니다.

먹이는 변합니다. 과거급제 → 신교육 → 경제성장 → 자기계발.
하지만 욕망의 구조(색성향미촉법)는 변하지 않습니다.

물고기는 변합니다. 춘향 → 이인화 → 동호 → 김지영.
하지만 괴로움의 본질(욕망과 현실의 불일치)은 변하지 않습니다.

문학은 이 불변을 기록합니다.

둘째, 구체적인 것을 통해 보편적인 것을 증명합니다.

춘향의 구체적 이야기 → 보편적 정의 추구
이인화의 구체적 괴로움 → 보편적 정체성 위기
동호의 구체적 죽음 → 보편적 신념의 싸움
김지영의 구체적 빙의 → 보편적 자아 찾기

구체성이 있어야 감동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편성이 있어야 영원합니다.

문학은 이 둘을 결합합니다.

셋째,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발견합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하늘도, 먹이도, 물고기도.
하지만 펄떡임은 영원합니다.

조선시대에도 펄떡였습니다. 춘향이.
일제강점기에도 펄떡였습니다. 이인화가.
독재시대에도 펄떡였습니다. 동호가.
신자유시대에도 펄떡입니다. 김지영이.

인간은 끝없이 펄떡이는 물고기입니다.

왜? 욕망과 현실은 결코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니까.
이것이 일체개고(一切皆苦)이고, 이것이 문학의 원료입니다.

문학은 이 영원한 펄떡임을 기록합니다.


12편의 작품, 하나의 구조

우리가 본 12편의 작품을 다시 봅시다.

한국 문학 6편

춘향전: 신분제 vs 정의

만세전: 식민지배 vs 민족의식

광장: 분단 vs 제3의 길

소년이 온다: 독재 vs 민주주의

도가니: 자본 vs 정의

82년생 김지영: 신자유 vs 정체성

해외 문학 6편

설국: 1930년대 일본 vs 순수한 아름다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소련 전쟁 vs 목소리

백 년 동안의 고독: 라틴아메리카 vs 정체성

빌러비드: 미국 노예제 vs 자유

19호실로 가다: 1960년대 영국 vs 고독

고도를 기다리며: 전후 유럽 vs 의미

12편 모두 같은 구조입니다.

하늘이 던진 것 ≠ 물고기가 원한 것

불일치 → 괴로움 → 펄떡임 → 문학

시대도, 장소도, 언어도, 문화도 다릅니다.
하지만 본질은 똑같습니다.

이것이 문학의 보편성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끝없이 펄떡이는 물고기입니다.


색성향미촉법의 영원성

부처님이 2,500년 전에 발견한 여섯 가지 욕망.

색(色) - 시각: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다
성(聲) - 청각: 듣고 싶은 소리가 있다
향(香) - 후각: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미(味) - 미각: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촉(觸) - 촉각: 만지고 싶다, 접촉하고 싶다
법(法) - 의식: 옳은 것, 의미를 추구하고 싶다

2,500년 전에도, 500년 전에도, 지금도, 500년 후에도.
인간의 욕망은 이 여섯 가지입니다.

대상은 변해도 구조는 불변입니다.

조선시대 춘향의 법(법) = 정절과 정의
1980년 동호의 법(법) = 민주주의
2016년 김지영의 향(향) = 정체성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모두 색성향미촉법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이유입니다.

인간의 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이 바뀌지 않는 한, 색성향미촉법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색성향미촉법이 영원한 한,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도 영원합니다.

그래서 괴로움도 영원하고, 펄떡임도 영원하고, 문학도 영원합니다.


일체개고의 문학적 증명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존재는 괴로움이다.

우리는 22회에 걸쳐 이것을 문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춘향도 괴로웠습니다. 정의를 얻지 못해서.
이인화도 괴로웠습니다. 정체성을 잃어서.
동호도 괴로웠습니다. 민주주의를 보지 못하고 죽어서.
시마무라도 괴로웠습니다.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없어서.
알렉시예비치의 여성들도 괴로웠습니다.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아서.
부엔디아 가문도 괴로웠습니다. 정체성을 찾지 못해서.
세도도 괴로웠습니다. 자유가 달지 않아서.
수잔도 괴로웠습니다. 혼자 있을 수 없어서.
블라디미르도 괴로웠습니다. 고도가 오지 않아서.
김지영도 괴로웠습니다. 나를 잃어버려서.

모두 괴로웠습니다.

왜? 욕망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아서.

구부득고(求不得苦)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
원증회고(怨憎會苦) - 미워하는 것을 마주함
애별리고(愛別離苦) -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오음성고(五陰盛苦) - 존재 자체의 괴로움

문학은 일체개고를 증명합니다.


무상과 공의 역설

두 번째, 세 번째 가르침.

무상(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공(空):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

하늘도 변하고(무상), 비어있습니다(공).
먹이도 변하고(무상), 비어있습니다(공).
물고기도 변하고(무상), 비어있습니다(공).

그런데 역설이 있습니다.

변하기에(무상) 의미가 있습니다.
비어있기에(공)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조선의 신분제가 영원했다면? 변화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상(無常)이기에 무너졌습니다.

만약 '정의'가 고정된 실체라면? 진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空)이기에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문학은 이 역설을 보여줍니다.

춘향은 정의를 추구했지만, 정의는 공(空)입니다.
하지만 공(空)이기에 조선의 정의에서 현대의 정의로 진화했습니다.

동호는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민주주의도 공(空)입니다.
하지만 공(空)이기에 1980년의 민주주의에서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무상과 공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왜 인간은 계속 펄떡일까?

마지막 질문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공(空)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욕망도 환상이고, 먹이도 비어있고, 나도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계속 펄떡여야 할까요?

부처님이라면 "집착을 버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학은 다르게 말합니다.

"집착하라. 하지만 그것이 공(空)임을 잊지 마라."

춘향은 정의에 집착했습니다. 그 집착이 그녀를 죽음 앞까지 몰고 갔지만, 동시에 500년 후까지 의미를 갖게 했습니다.

동호는 민주주의에 집착했습니다. 그 집착이 그를 죽였지만, 동시에 광주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김지영은 정체성에 집착했습니다. 그 집착이 그녀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렸지만, 동시에 수많은 여성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집착이 없으면 문학도 없습니다.
집착이 없으면 변화도 없습니다.
집착이 없으면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 펄떡입니다.

공(空)을 알면서도, 무상(無常)을 알면서도,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알면서도.

펄떡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펄떡임 자체가 삶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역할: 펄떡임의 기록

그렇다면 문학은 무엇을 하는가?

펄떡이는 물고기를 기록합니다.

성공한 물고기가 아닙니다.
행복한 물고기가 아닙니다.
순응하는 물고기가 아닙니다.

괴로워하며 펄떡이는 물고기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통해 말합니다.

"너만 괴로운 게 아니야."
"500년 전 춘향도, 지구 반대편 수잔도, 모두 너처럼 괴로워했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이것이 문학의 위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합니다.

"춘향은 펄떡였어. 죽음 앞에서도."
"동호는 펄떡였어. 총 앞에서도."
"김지영은 펄떡이고 있어. 정신적 붕괴 속에서도."

"너도 펄떡일 수 있어."

이것이 문학의 격려입니다.


문학은 영원하다

이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첫째, 인간의 욕망 구조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색성향미촉법. 2,500년 전에도, 지금도, 500년 후에도.
인간은 여섯 가지 욕망을 가질 것입니다.

둘째, 욕망과 현실은 결코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항상 간극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영원하고, 펄떡임은 영원합니다.

셋째, 인간은 끝없이 펄떡이는 물고기이기 때문입니다.

무상과 공을 알아도, 집착하고 펄떡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이 영원한 펄떡임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선언이다

제4부를 마칩니다.

19회에서 괴로움의 불일치를 이해했습니다.
20회에서 무상을 이해했습니다.
21회에서 공을 이해했습니다.
22회에서 문학의 영원성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제5부입니다. 선언.

우리는 단순히 문학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문학을 해제하여 다시 문학을 씁니다.

비평은 또 하나의 창작입니다.
해제는 새로운 우물가에서 길을 내고, 그 길 위에서 다시 노래하는 것입니다.

500년 한국문학사를 새롭게 읽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작품들을 불교의 눈으로 해체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언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문학 비평의 방법이라고.
이것이 문학을 다시 쓰는 방법이라고.

다음 회부터는 이 여정의 의미를 되짚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합니다.


22회를 마치며,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셨나요? 문학이 왜 영원한지 이해되셨나요?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끝없이 펄떡이는 물고기라는 것을 느끼셨나요? 지금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500년 전 춘향의 괴로움과 같은 구조라는 것을 아셨나요? 여러분의 펄떡임도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다음 회 예고] 제5부 23회: "비평은 또 하나의 창작이다 – 문학을 해제하여 다시 문학을 쓰다" - 이제 선언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22회 동안 해온 것은 단순한 문학 비평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먹이-물고기라는 프레임으로 문학을 해제하고, 불교의 일체개고-무상-공으로 다시 읽는 것. 이것 자체가 새로운 창작이었습니다. 비평이 어떻게 창작이 되는지, 해제가 어떻게 또 다른 문학이 되는지 살펴봅니다.

keyword
수, 금 연재
이전 22화욕망을 쫓는 물고기들: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