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탄생: 통과 무사유가 만든 결과

제1부. AJIM 모델의 탄생

by 한시을

7장. 영웅은 왜 나쁜 통 속에서도 등장하는가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광주 전남도청 앞.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시민들이 쓰러졌다. 전남도경찰국장 안병하 치안감(51세)은 이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 하지만 안병하는 거부했다. "경찰은 시민을 쏠 수 없습니다." 그는 경찰관들에게 명령했다. "절대 발포하지 마라. 우리는 시민의 편이다."¹


같은 시각. 광주역 인근. 제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이경남 일병(20세)도 이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특전사였다. 5월 19일 광주에 투입됐다. 상급자들은 말했다. "광주에 폭도가 있다." "북한군이 침투했다." 하지만 이경남이 본 것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학생들, 상인들, 주부들. 그들은 "계엄령 해제하라", "민주주의 지켜내자"고 외쳤다. 폭도가 아니었다.²


5월 21일 집단 발포. 이경남은 총을 쏘지 않았다. 동료들이 쏘는 동안 그는 총을 들고만 있었다. 상급자가 물었다. "왜 쏘지 않는가?" 이경남이 답했다. "저들은 적이 아닙니다." 상급자가 위협했다. "명령 불복종은 군법 위반이다." 이경남은 침묵했다. 하지만 총을 쏘지 않았다.³


사유의 힘: 명령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보다

안병하와 이경남. 둘 다 BT 유형이다. 나쁜 통(군사독재) × 사유(시민을 인간으로 봄).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사유할 수 있었는가? 나쁜 통은 무사유를 강제한다. 상명하복. 명령 복종. 질문 금지. 이것이 군대 문화다. 어떻게 이 시스템 속에서 사유가 가능했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명령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봤다. 상급자는 "폭도를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안병하와 이경남이 본 현실은 달랐다. 평범한 시민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 이 간극이 사유를 촉발했다. "이 명령이 정당한가?" "저들이 정말 적인가?" "나는 이것에 복종해야 하는가?"


아이히만은 이 간극을 보지 못했다. 상급자가 "유대인을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아이히만은 이송 대상을 직접 보지 않았다. 통계로만 봤다. "600만 명." 숫자. 얼굴이 없었다. 이름이 없었다. 간극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유하지 못했다.


박지영은 이 간극을 봤다. 회사는 "승객을 대기시켜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박지영이 본 현실은 달랐다.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학생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 간극이 사유를 촉발했다. "이 명령이 옳은가?" "학생들을 그냥 둘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구명조끼를 벗어 학생들에게 줬다.


사유의 첫 단계는 관찰이다. 현실을 직접 보는 것. 명령이 지시하는 것과 눈앞의 현실이 다를 때, 간극이 발생한다. 이 간극이 질문을 만든다. "이게 맞나?" "정말 이래야 하나?" 이것이 사유의 시작이다.


안병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경찰 국장

안병하는 1929년생. 경남 밀양 출신. 1949년 경찰에 입직했다. 30년 경력의 베테랑. 1980년 5월 당시 전남도경찰국장(현 전남경찰청장). 치안감. 그는 경찰 조직의 정점에 있었다. 상명하복 문화의 수혜자였다. 그가 명령하면 아래는 복종했다. 전형적인 나쁜 통이었다.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5월 18일 아침. 광주 전남대 교문 앞. 학생들이 모였다. "계엄령 해제하라!" 7공수여단이 투입됐다. 진압봉을 휘둘렀다. 학생들이 쓰러졌다. 광주 시민들이 분노했다.


5월 19일. 시위가 확산됐다. 금남로. 전남도청 앞. 수만 명의 시민.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 곤봉, 대검, 총. 안병하는 이를 목격했다. 그는 경찰국장이었지만, 계엄군을 지휘할 수 없었다. 계엄 상황에서는 군이 모든 권한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경찰관들에게 명령할 수 있었다.


5월 20일 밤. 계엄군이 발포하기 시작했다. 실탄. 시민들이 죽기 시작했다. 5월 21일 정오. 전남대 앞에서 집단 발포.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이 순간 안병하는 결단했다. 그는 경찰관들을 모았다. 명령했다. "절대 발포하지 마라. 우리는 시민을 지켜야 한다. 경찰은 시민의 편이다."⁵


신군부로부터 압박이 왔다. "발포 명령을 따르라." 안병하는 거부했다. 결과는 명백했다. 5월 27일 진압 작전 종료 후, 안병하는 좌천됐다. 1982년 해임됐다. 경찰 경력 33년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2003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시민을 쏠 수 없었다. 그것이 경찰의 도리다."⁶


안병하는 2007년 4월 사망했다. 2017년 광주시는 그를 기리기 위해 전남경찰청 앞에 "안하 공원"을 조성했다. 2018년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안병하는 옳은 일을 했는데 좌천당했다. 정신적 고통에 대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 2020년 광주지법. 1심 승소. 2억 5천만 원 배상 판결. 2025년 대법원. 최종 확정.⁷


이경남: 쏘지 않은 특전사병

이경남. 1960년생. 1980년 5월 당시 20세. 제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소속 일병. 그는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군에 입대했다. 특전사에 배치됐다. 5월 19일 동료 1,000여 명과 함께 광주에 투입됐다.⁸


상급자들은 브리핑했다. "광주에 폭도가 날뛴다."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했다." "국가를 지켜야 한다." 이경남은 믿었다. 처음에는. 하지만 광주에 도착해서 본 것은 달랐다. 학생들. 상인들. 주부들. "저들이 폭도?" "저들이 북한군?" 의문이 생겼다.


5월 20일. 이경남은 시민들과 대면했다. 한 할머니가 다가왔다. 주먹밥을 건넸다. "군인들도 힘들 텐데, 이거라도 먹어." 이경남은 충격받았다. "폭도가 군인에게 밥을 주나?" 또 다른 시민이 말했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할 뿐이다." 이경남은 사유하기 시작했다.⁹


5월 21일 오후.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이경남은 2층 건물에 배치됐다. 저격 위치였다. 동료들이 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쓰러졌다. 상급자가 소리쳤다. "쏴!" 하지만 이경남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저들은 적이 아니다." "저들은 우리 국민이다." 그는 총을 들고만 있었다.


상급자가 다가왔다. "왜 안 쏘는가?" 이경남이 답했다. "저들은 적이 아닙니다." 상급자가 위협했다. "명령 불복종은 군법 위반이다. 군사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 이경남은 침묵했다. 하지만 끝까지 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울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¹⁰


5월 27일. 진압 작전 종료. 이경남은 제대했다. 하지만 광주의 기억은 그를 따라다녔다. 악몽, 죄책감, 우울증. 그는 목회자가 됐다. 1999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주년. 이경남은 용기를 냈다. 진압군 측으로서는 처음으로 수기를 발표했다. '5월의 회고-어느 특전병사의 기록'. 2000년 전태일문학상 수상.¹¹


수기 말미에 그는 썼다. "아직도 살아서 지난날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준동하는 전두환씨를 비롯한 5공 신군부 권력자들에게 '이 나라에서 당신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자숙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었다."¹²


사유의 메커니즘: 탈인간화를 거부하다

안병하와 이경남은 어떻게 사유했는가? 짐바르도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탈인간화(dehumanization)다. 나쁜 통은 대상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만든다. 나치는 유대인을 "해충", "기생충"이라고 불렀다. 번호를 부여했다. 죄수복을 입혔다.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학살이 가능했다.


신군부도 같은 전략을 썼다.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불렀다. "불순분자", "좌익", "북한군". 인간이 아니라 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발포가 가능했다. 대부분의 계엄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탈인간화에 동의했다. 그래서 쏠 수 있었다.


하지만 안병하와 이경남은 탈인간화를 거부했다. 그들은 시민들을 직접 봤다. 얼굴을 봤다. 이름을 들었다. 주먹밥을 받았다. "이들은 사람이다." "나와 같은 국민이다." 탈인간화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유의 핵심이다. 대상을 인간으로 보는 것. 짐바르도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에서 죄수들에게 번호를 부여했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렀다. 죄수복을 입혔다. 탈인간화. 그래서 교도관들이 학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교도관은 거부했다. "저들도 사람이다." 이들이 BT 유형이었다.¹³


박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 회사는 승객을 "수송 대상"으로 봤다. 통계. 숫자. 하지만 박지영은 학생들을 사람으로 봤다. 얼굴을 봤다. 공포를 봤다. "저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다." 탈인간화를 거부했다. 그래서 구명조끼를 벗어줬다.


발포를 거부한 다른 군인들

안병하와 이경남만이 아니었다. 광주에는 다른 BT들도 있었다. 일부 계엄군은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시민들에게 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좌천당했다. 불명예 제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유했다.¹⁴


한 계엄군 병사의 증언. "5월 21일 도청 앞. 상급자가 명령했다. '쏴라.' 하지만 나는 쏠 수 없었다. 저기 내 동생 같은 학생들이 있었다. 내 누나 같은 여성들이 있었다. 어떻게 쏘나. 나는 총을 하늘로 향했다. 상급자가 욕했다. '이 새끼, 제대로 안 쏘면 너를 쏘겠다.' 나는 울었다. 하지만 끝까지 사람을 향해 쏘지 않았다."¹⁵


또 다른 증언. "5월 20일 밤. 우리 부대는 광주역 근처에 있었다. 시민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군인들도 우리 국민이다. 왜 우리를 때리나.' 한 아주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

다음날 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나는 거부했다. 부대장이 나를 영창에 보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¹⁶


얼마나 많은 군인이 발포를 거부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증언들은 있다.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일부 군인들이 증언했다. "발포를 거부한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처벌받았다." 하지만 정확한 이름과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신군부가 기록을 은폐했기 때문이다.¹⁷


1987년 6월 항쟁: GT에서 BT로의 전환

1987년 6월. 전국이 들끓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 최루탄. 화염병.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을 고려했다. 하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왜? 군대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국군 장성 일부가 거부 의사를 밝혔다. "1980년 광주를 반복할 수 없다."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BT 유형이었다. 나쁜 통(군사정권) × 사유(군대의 역할에 대한 성찰). 결국 전두환은 6.29 선언을 받아들였다. 직선제 수용. 민주화 이행.¹⁸


이것이 BT의 힘이다. 나쁜 통 속에서도 사유하면 저항할 수 있다. 소수의 BT가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 1980년 광주에서는 안병하와 이경남 같은 BT가 소수였다. 그래서 학살이 일어났다. 하지만 1987년에는 BT가 더 많았다. 군대 내부에서, 경찰 내부에서, 행정부 내부에서. 그래서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았다.


2024년 12월 3일: 국회를 지킨 군인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다. 계엄군이 국회로 향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이 모였다. 시민들이 국회 앞으로 달려왔다.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치했다.


일부 군인들은 명령을 거부했다. "국회의원들을 체포할 수 없습니다." "헌법이 우선입니다." 이들은 BT였다. 나쁜 통(윤석열 정권) × 사유(헌법적 가치). 결국 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다. 국회가 표결로 계엄 무효를 선언했기 때문이다.¹⁹


만약 모든 군인이 BN이었다면? 만약 모두 무사유로 명령만 따랐다면? 계엄은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군인이 사유했다. BT였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지켜졌다.


사유를 만드는 조건

그렇다면 어떻게 BT를 만들 수 있는가? 나쁜 통 속에서도 사유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증가시킬 수 있는가?


첫째, 교육. 명령 복종만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는 교육. 안병하는 30년 경찰 경력 동안 무엇을 배웠는가?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다." 이 가치 교육이 그를 BT로 만들었다. 이경남은 신학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신앙이 그를 BT로 만들었다.


둘째, 직접 경험. 탈인간화는 거리에서 작동한다. 대상을 직접 보지 않으면, 인간으로 보지 못한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직접 보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서류만 봤다. 그래서 무사유했다. 안병하와 이경남은 시민을 직접 봤다. 얼굴을 봤다. 주먹밥을 받았다. 그래서 사유했다.


셋째, 내부 고발 보호. BT는 위험을 감수한다. 명령 거부는 처벌받는다. 안병하는 좌천당했다. 이경남은 영창 위협을 받았다. 2024년 계엄 거부 군인들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그래야 더 많은 BT가 나올 수 있다.


넷째, 역사 교육. 1980년 광주를 기억하는 것. 안병하를 기억하는 것. 박지영을 기억하는 것. 이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가르치는 것. 그래야 다음 세대가 같은 상황에서 사유할 수 있다.


결론: 사유는 선택이다

안병하와 이경남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타고난 영웅이 아니었다. 그들도 나쁜 통 속에 있었다. 명령 복종을 강제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선택했다. 사유하기로. 시민을 인간으로 보기로. 명령보다 양심을 따르기로.


이것이 AJIM 모델의 메시지다. BT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선택하는 것이다. 나쁜 통 속에서도 사유할 수 있다. 쉽지 않다. 위험하다. 대가를 치른다. 하지만 가능하다. 안병하가 증명했다. 이경남이 증명했다. 박지영이 증명했다. 2024년 계엄 거부 군인들이 증명했다.


우리는 모두 선택할 수 있다. BN이 될 것인가, BT가 될 것인가. 무사유로 흐를 것인가, 사유하며 저항할 것인가. 이것은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의 문제다. 그리고 그 선택이 역사를 만든다.


참고문헌

1. 헤럴드경제, "'5·18 발포명령' 거부 안병하 치안감, 2심도 국가배상 인정", 2025.5.15

2. 시사IN, "5.18 어느 진압군의 고백", 2019.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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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시사IN, "5.18 어느 진압군의 고백", 2019.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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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Philip Zimbardo, 『루시퍼 이펙트』, 2007, p.308-315

14. 위키백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5. 5·18기념재단, 구술 증언 기록

16. 5·18기념재단, 구술 증언 기록

17. 국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 기록, 1988

1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항쟁 자료집", 2007

19. 뉴스타파, "[다큐 뉴스타파] <5·18 45주년 특집> 1980년 광주, 죽은 자가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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