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AJIM 모델의 해법 – 사유의 복원과 통의 개혁
1976년 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하얀 수염의 노인이 죄수복을 입고 나타났다. 팔순을 바라보는 사상가 함석헌이었다. 그는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지도자들, 재야 인사들과 함께 법정에 섰다. 검사는 "민중 봉기를 확산하고 현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논고했다. 판결은 징역 5년.¹
그로부터 1년 전인 1975년 8월 17일, 또 다른 저항자가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실족사로 세상을 떠났다. 광복군 출신 언론인이자 국회의원 장준하였다. 그의 시신에서는 두개골이 예리한 망치로 함몰된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의문사 진상은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고 있다.²
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함석헌은 1958년 월간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발표하며 독재 정권을 비판했고,³ 장준하는 1953년 《사상계》를 창간하며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신념을 내걸었다.⁴ 두 사람 모두 '사유'를 민주주의의 토대로 보았다. 그리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4부에 걸쳐 한국 현대사의 '나쁜 통'과 '무사유의 전염'을 분석했다. 반민특위 해체에서 시작된 나쁜 통이 어떻게 검찰조직과 관료제를 거쳐 시민사회 전체로 확산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윤석열이라는 BN 유형을 어떻게 탄생시켰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같은 시기, 같은 나쁜 통 속에서도 사유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짐바르도가 설명하지 못했던 '쉰들러 문제'의 한국적 해답이 여기에 있다. 나쁜 통 속에서도 왜 영웅이 나오는가. 그것은 '사유'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는 독재와 억압 속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던 BT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사유 전통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함석헌의 씨알사상
1958년 5월, 《사상계》에 실린 한 글이 이승만 정권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였다. 이 글은 6.25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소련과 미국의 갈등에서만 찾지 않고 우리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민족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 더 거리낌 없이 하게 되었으며 비겁한 민족은 점점 더 말을 아니하고, 점점 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⁵
함석헌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생각'이라고 보았다. 그는 생각이란 위대한 종교이며, 결국 뜻을 찾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역사의 문제가 '생각의 가난'에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⁶
이 글로 함석헌은 구류 20일 처분을 받았다. 해방 조국에서 맞은 첫 번째 고난이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등장하자 《조선일보》에 통렬한 기고문을 실었다.
"박정희님. 내가 당신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고도, 육군대장이라고도 부르지 않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첫째로 군사 쿠데타를 한 것이 잘못입니다."⁷
함석헌의 사상적 토대는 '씨알사상'이었다. 씨알사상은 민중을 씨알로 보고 씨알을 섬기는 사상이다.⁸ 그는 동양사상과 서구 기독교 정신을 창조적으로 융합해 독특한 한국적 영성을 만들어냈다. 비폭력주의 신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⁹
함석헌이 특히 강조한 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국가라는 절대이념이 민초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며, 인간의 자유로운 왕래와 소통을 가로막는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그가 공동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¹⁰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다. 문익환, 김대중, 함세웅, 정일형 등과 함께 팔순의 함석헌도 서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은 "유신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선언했다. 결과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¹¹
함석헌은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별세했다(향년 87세).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을 수훈했고, 묘소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¹² 그가 남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메시지는 한국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장준하의 사상계
함석헌의 글을 실어준 잡지가 《사상계》였다. 그리고 그 《사상계》를 만든 사람이 장준하였다.
장준하(1918-1975)는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된 그는 중국 장쑤성에서 4명의 동지와 함께 일본군을 탈출해 천신만고 끝에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광복군에 편입된 그는 《등불》과 《제단》 등의 광복군 잡지를 만들었다.¹³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그는 국내진공 선발대로 뽑혀 이범석, 김준엽 등과 함께 여의도 공항에 도착했다.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해방 3개월 만인 11월 23일, 그는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과 함께 귀국했다.¹⁴
해방 후 그는 김구의 비서로 일하며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 중이던 1952년, 그는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 《사상》 편집에 참여했다. 그리고 1953년 4월, 이 잡지를 단독 인수해 제호를 《사상계》로 바꾸어 창간했다.¹⁵
《사상계》 창간호에 실린 '사상계 헌장'은 그의 신념을 명확히 보여준다.
"자유와 평등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근대적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봉건사회에서 직접 제국주의 식민사회로 이행한 우리 역사는 세계사의 조류와 격리된 채 36년간 암흑속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였다. (...) 역사를 말살하고 조상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후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의 무능과 태만과 비겁으로 말미암아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이 역사적 사명을 깊이 통찰하고 지성일관 그 완수에 용약매진해야 할 것이다."¹⁶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것이 장준하가 평생 간직한 모토였다. 그는 《사상계》를 통해 이승만 독재와 횡포를 비판하고, 민족사의 전통과 서구 민주주의 사상의 연구·전파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0년대에 이어 60년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이 잡지는 필독서가 되었다.¹⁷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호에서 《사상계》는 쿠데타를 사실상 지지하는 권두언을 실었다. 하지만 곧 장준하는 군정과 충돌하게 된다. 7월호에 그의 권두언 〈긴급을 요하는 혁명 과업 완수와 민주 정치에로의 복귀〉와 함석헌의 글 〈5·16을 어떻게 볼까〉가 나간 뒤 장준하는 군사정권에 불려갔다.¹⁸
박정희는 '박정희 저격수'라 불릴 만큼 《사상계》를 경계했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대일외교, 베트남 파병, 국내 정책을 줄곧 비판했다. 정권의 탄압과 유혹이 많았으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1962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¹⁹
1970년 5월, 《사상계》는 김지하의 〈오적시〉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폐간 처분을 받았다. 통권 205호로 17년간의 여정이 끝났다.²⁰ 장준하는 펜을 던지고 거리로 나섰다. 1967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복역 중일 때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1973년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²¹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산행 중 실족사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장 과정에서 두개골이 예리한 망치 같은 것으로 함몰된 흔적이 확인되었지만, 사인은 규명되지 않았다.²²
장준하는 지독할 정도로 청렴했다. 아들 장호권은 연세대학교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빚에 시달린 탓에 말년에는 막사이사이상 메달까지 빚 청산에 내놓아야 했다. 그가 벌어오는 돈은 대부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되었다.²³
"대한민국에서 모든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박씨만은 안 된다"고 주장했던 장준하. 그는 광복군으로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여의도 공항에 도착한 지 만 30주년이 되는 날 세상을 떠났다.²⁴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 김대중의 이중 사유
함석헌과 장준하가 뿌린 씨앗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 김대중이 있었다.
김대중은 독특한 사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2009년 6월 11일, 생전 마지막 공식 연설에서 자신을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함께 가진 정치인입니다."²⁵
서생적 문제의식. 이것은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과 연결된다. 김대중은 평생 공부하는 정치인이었다. 감옥에서도 책을 읽었고, 가택 연금 중에도 글을 썼다. 그는 1971년 대선 후보 시절 이미 『대중경제론』을 집필하며 경제 민주화를 주장했다.²⁶
하지만 김대중이 단순한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상인적 현실감각. 이것은 장준하의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와 연결된다. 김대중은 실천하는 정치인이었다. 이론만 말하지 않고 현실에서 타협하고 협상하며 결과를 만들어냈다.
1998년 대통령 당선 후 김대중은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계·재계와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것이 상인적 현실감각이었다. 원칙은 지키되, 현실에서 가능한 최선을 선택하는 것.²⁷
김대중의 사유는 나쁜 통 속에서 단련되었다. 1973년 도쿄 납치 사건.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 1980-1982년 광주형무소 감옥. 1982-1987년 가택 연금. 이 모든 고난 속에서도 그는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²⁸
1975년 3월 8일, 김대중은 《동아일보》에 광고를 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²⁹ 이것은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을 '행동'으로 연결한 것이었다.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행동해야 한다.
김대중은 1975년 4월 19일 《씨알의소리》 강연에서 말했다.
"생각하는 국민, 행동하는 국민만이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폭동을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불법행위를 선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적으로 합법적으로 하세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이 무슨 법에 걸립니까?"³⁰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 김대중의 언어로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었다. 장준하의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가 김대중의 언어로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 되었다.
김대중은 나쁜 통(독재 정권) × 사유(서생적 문제의식 + 상인적 현실감각) = BT 유형이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가택 연금 중에도, 망명 중에도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998년 대통령이 되어 민주주의를 공고히 했다.
2009년 6월 11일, 노무현 영결식. 김대중은 생전 마지막 연설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초를 겪을 때, 500만 명 문상객 중 50만 명만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고 나섰다면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³¹
김대중은 2009년 8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행동하는 양심"은 한국 민주주의의 유산이 되었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 노무현의 신뢰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을 계승한 사람이 노무현이었다.
노무현은 독특한 권력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2002년 대선 후보 시절 이렇게 말했다.
"권력은 시장바닥에 넘어져 있는 낡은 동전과 같은 것이다."³²
권력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시장바닥에 넘어져 있는 동전처럼 누구나 주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주우려 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노무현의 권력관이었다.
노무현은 기득권 정치라는 나쁜 통 속에서 성장했다. 고졸 출신, 지방 변호사, 정치 신인. 그는 정치권의 모든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유했다. "왜 국민은 정치를 불신하는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³³
2004년 3월 12일.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찬성 193표, 반대 2표. 탄핵 사유는 "선거 중립 의무 위반", "권력형 부정부패", "국민경제 파탄"이었다.³⁴
하지만 시민들은 판단했다. "이것은 정당한가." 탄핵 당일부터 광화문에 모였다. 촛불을 들었다. "탄핵 무효"를 외쳤다. 3월 13일. 주최 측 추산 10만 명, 경찰 추산 5만 명이 모였다.³⁵
시민들은 왜 모였는가. 법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뽑았다. 국회의원이 뽑지 않았다." 절차적으로는 합법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당했다.³⁶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 열린우리당 152석. 과반 획득. 탄핵을 주도한 새천년민주당은 9석으로 전락했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 탄핵 기각. 노무현은 대통령직에 복귀했다.³⁷
노무현은 이 경험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2007년 6월. 제8회 노사모 총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³⁸
깨어 있는 시민.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이 노무현의 언어로는 "깨어있는 시민"이 되었다. 판단하고, 참여하고, 책임지는 시민. 법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정의를 생각하는 시민.
이 문장은 2009년 노무현 사망 후 봉하마을 묘비에 새겨졌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³⁹
노무현은 나쁜 통(기득권 정치) × 사유(시민에 대한 신뢰) = BT 유형이었다. 그는 정치권이 국민을 무시할 때도, 언론이 비난할 때도, 기득권이 저항할 때도 시민을 믿었다. 그리고 시민은 그 믿음에 응답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계엄. 20년 만에 다시 시민들이 광화문에 모였다. 촛불을 들었다. 헌법을 외쳤다. 12월 14일.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찬성 204표.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빨랐다. 2004년은 탄핵 후 촛불이 켜졌다. 2024년은 계엄 당일 촛불이 켜졌다. 시민이 더 빨리 판단했다. 더 빨리 행동했다. 더 빨리 조직되었다.
노무현의 예언은 맞았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제도가 아니었다. 법도 아니었다. 국회도 아니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었다.
BT의 계보, 사유의 토양
AJIM 모델로 보면 이들은 명확히 BT 유형이다. 나쁜 통(Bad barrel) × 사유(Thinking).
함석헌: 독재 정권(나쁜 통) × 생각하는 백성(사유) = BT 유형
장준하: 독재 정권(나쁜 통) × 못난 조상 되지 않기(사유) = BT 유형
김대중: 독재 정권(나쁜 통) × 행동하는 양심(사유) = BT 유형
노무현: 기득권 정치(나쁜 통) × 깨어있는 시민(사유) = BT 유형
함석헌은 감옥에 갇히면서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쳤다. 장준하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못난 조상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으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며 독재와 싸웠다. 노무현은 기득권의 저항 속에서도 "깨어있는 시민"을 믿었다.
왜 같은 나쁜 통 속에서 영웅이 나오는가. 짐바르도의 '쉰들러 문제'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성향이 아니라 '사유'다. 나쁜 통 속에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시스템이 명령할 때 "정말 그것이 옳은가?"라고 판단하는 것.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악을 만든다고 했다.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선을 만든다. 한국 현대사는 두 개의 계보를 만들었다.
하나는 BN의 계보다. 반민특위 해체 → 박정희/전두환 → 검찰 조직 → 윤석열. 나쁜 통 × 무사유 = 악의 평범성.
다른 하나는 BT의 계보다. 함석헌 → 장준하 → 김대중 → 노무현 → 광화문의 시민들. 나쁜 통 × 사유 = 저항과 희망.
한국 민주주의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BT의 계보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유의 언어, 계승의 고리
네 사람의 언어를 다시 읽어보자.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1958)
장준하: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1953)
김대중: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1975)
노무현: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2007)
다른 표현이지만, 하나의 핵심을 공유한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시민. 부당함에 저항하는 시민. 행동하는 시민.
함석헌의 "생각"은 김대중의 "양심"이 되었고, 노무현의 "깨어있음"이 되었다. 장준하의 "역사적 책임"은 김대중의 "행동"이 되었고, 노무현의 "조직된 힘"이 되었다.
이들은 서로를 계승했다. 함석헌은 장준하의 《사상계》에 글을 실었다. 김대중은 함석헌의 《씨알의소리》에서 강연했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을 "깨어있는 시민"으로 발전시켰다.
1958년 《사상계》에 실린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2004년 탄핵 반대 촛불로 이어졌으며, 2016-2017년 광화문 촛불로 이어졌고, 2024년 계엄 반대로 이어졌다.
사유는 전염된다. 함석헌의 사유는 장준하에게 전염되었고, 장준하의 사유는 김대중에게 전염되었고, 김대중의 사유는 노무현에게 전염되었고, 노무현의 사유는 2024년 광화문의 시민들에게 전염되었다.
해법으로 가는 길
우리에게는 토양이 있다. 함석헌, 장준하,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사유의 토양. 이들이 뿌린 씨앗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AJIM 모델은 두 가지 해법을 제시한다. Macro(통의 개혁)와 Micro(사유의 교육). 한국적 사유 전통은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함석헌과 장준하는 나쁜 통(독재 정권)과 싸우면서 동시에 사유(생각하는 백성)를 가르쳤다. 《사상계》는 비판 잡지이자 시민교육의 장이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독재와 싸우면서(Macro) 동시에 시민의식을 일깨웠다(Micro). "행동하는 양심", "깨어있는 시민"은 모두 시민교육의 언어였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해법을 논의한다. 나쁜 통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사유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그리고 판단하는 시민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함석헌은 말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장준하는 말했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김대중은 말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노무현은 말했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한국적 사유 전통이 답을 주었다. 이제는 실천할 시간이다.
참고문헌
1. 함석헌 - 위키백과
2. 장준하 - 위키백과
3. 함석헌 - 나무위키
4. 장준하의 '사상계 헌장', 오마이뉴스, 2025.1.21
5. 함석헌 - 나무위키
6. 한 문장의 교양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생글생글, 2013.4.19
7.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_ 씨알의 소리 함석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 유영모·함석헌 씨알사상 세계 속으로, 한국경제, 2008.2.27
9. 함석헌 - 위키백과
10. 김경재, 새로운 문명의 길잡이, 함석헌의 씨알사상, 베리타스, 2010.1.12
11.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_ 씨알의 소리 함석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2. 함석헌 - 위키백과
13. 항일·반독재투쟁 선각, 의문사 당한 장준하 열사, 오마이뉴스, 2025.9.6
14. 항일·반독재투쟁 선각, 의문사 당한 장준하 열사, 오마이뉴스, 2025.9.6
15. 사상계(思想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 장준하의 '사상계 헌장', 오마이뉴스, 2025.1.21
17. 항일·반독재투쟁 선각, 의문사 당한 장준하 열사, 오마이뉴스, 2025.9.6
18. 장준하 - 위키백과
19.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식지 역사공감, Vol.29
20. 사상계(思想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식지 역사공감, Vol.29
22. 장준하 - 위키백과
23. 장준하 - 나무위키
24. 1975년 8월 17일,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 별세, 크리스천 라이프
25. 26장 참고문헌 23 (김대중, 2009.6.11 연설)
26. 26장 참고문헌 23-28 (김대중 관련 자료)
27. 26장 참고문헌 23-28 (김대중 관련 자료)
28. 26장 참고문헌 23-28 (김대중 관련 자료)
29. 26장 참고문헌 23 (김대중, 동아일보 광고, 1975.3.8)
30. 26장 참고문헌 24 (김대중, 씨알의소리 강연, 1975.4.19)
31. 26장 참고문헌 27 (김대중, 노무현 영결식 연설, 2009.6.11)
32. 26장 참고문헌 29-34 (노무현 관련 자료)
33. 26장 참고문헌 29-34 (노무현 관련 자료)
34. 26장 참고문헌 29 (노무현 탄핵, 2004.3.12)
35. 26장 참고문헌 30 (2004년 촛불집회)
36. 26장 참고문헌 31 (탄핵 부당성 주장)
37. 26장 참고문헌 26, 32 (17대 총선, 탄핵 기각)
38. 26장 참고문헌 27 (노무현, 노사모 총회, 2007.6)
39. 26장 참고문헌 28 (봉하마을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