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대신 예배를 선택한 여자들

5장. 의례의 재정의

by 한시을

20회 한국 사회는 어떤 의례의 전환점에 있는가


텅 빈 자리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저녁.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올해 처음으로 명절 제사를 안 지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제들이 모이는 게 어려워져서. 연락은 됐는데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결국 기일이 지나갔다. 이상하게 허전하다. 형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없으니까 뭔가 빠진 느낌이다."

댓글이 달렸다. "우리도 그랬어. 제사를 안 지내는 건 좋은데, 그 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아." 또 다른 댓글. "나는 교회 다니다 그만뒀는데, 명절에 갈 곳이 없어진 느낌. 교회에서라도 모이면 됐는데." 또. "근처 절도 옛날엔 있었는데 신도들이 줄어서 문을 닫았대."

이 세 댓글에 지금 한국 사회의 의례 풍경이 압축되어 있다. 제사가 사라졌다. 교회에서 발길을 끊었다. 절도 문을 닫았다. 의례가 들어가야 할 자리가 세 방향에서 동시에 비어가고 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현상이라면, 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이 회차의 출발점이다. 제사의 소멸은 4장에서 이미 분석했다. 이제 그 다음 질문이다. 제사가 사라진 자리를 교회와 절이 채우고 있는가. 그리고 교회와 절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비율이 안정적으로 보이는 종교 인구 통계 뒤에 어떤 현실이 있는가.

이 회차는 지금 한국 사회가 어떤 의례의 전환점에 서 있는지를 숫자로 확인한다.


제사의 소멸

4장에서 이미 상세히 분석했지만, 20회의 논의를 위해 핵심 수치를 다시 정리한다.

화장률 92.9%(2023년, 보건복지부). 1인가구 36.1%(2024년, 국가데이터처). 합계출산율 0.72명(2023년, 통계청).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의 2023년 조사에서 성인의 55.9%가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명절 차례를 지내는 비율은 10년 새 71%에서 40% 안팎으로 급감했다.

제사를 지탱하던 세 조건 — 모일 수 있는 가족, 주관할 장남, 고정된 공간 — 이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1인가구의 증가는 모일 가족을 줄였다. 장남 중심 문화의 약화는 주관자를 없앴다. 화장의 보편화는 고정된 산소를 없앴다. 그리고 여성들이 제사 노동을 거부하면서 내부에서도 붕괴가 일어났다.

제사가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의례 형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한국 가족을 일 년에 여러 번 모이게 만들던 장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기억을 전달하는 시스템이 사라지는 것이다. 불안에 대처하는 구조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의례들은 이 공백을 채우고 있는가. 교회와 절이 있지 않은가. 여기서부터가 이 회차의 핵심 질문이다.

그런데 이 연재의 3장에서 살펴봤듯이, 교회는 제사를 대체하는 의례를 제공했다. 명절 전날 기도회, 기일 예배. 그것이 여성들에게 제사 노동에서 벗어나는 출구가 됐다. 그래서 "제사 대신 예배를 선택한 여자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지금 그 교회도 청년 세대에게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면, 이 연재의 제목이 가리키는 현상은 또 다른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다. 제사를 거부한 여성들이 예배도 거부하게 될 때, 무엇이 남는가.


비율의 착시 — 종교 인구가 안정적이라는 것의 의미

한국 종교 통계를 처음 보는 사람은 안심할 수 있다. 한국리서치의 정기조사에 따르면 2019년 이후 종교 인구 비율이 큰 변화가 없다. 개신교 20%, 불교 16~17%, 천주교 11%, 무종교 50% 안팎 — 이 비율이 수년째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안정은 착시다. 한국리서치 조사팀이 직접 밝혔다. "종교 인구 비율은 겉보기에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새로운 신자 유입이 이탈을 상쇄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율이 유지되는 것은 성장 때문이 아니라 이탈과 유입이 겨우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균형은 위태롭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위기의 징후가 선명하다.

한국갤럽이 2021년 조사에서 20대 종교인 비율을 추적한 결과가 있다. 2004년 조사 당시 20대 종교인은 45%였다. 2014년에는 31%, 2021년에는 22%가 됐다. 17년 만에 절반 이하로 줄었다. 30대 역시 같은 기간 49%에서 30%로 줄었다. 20년 동안 젊은 층에서 종교가 절반이 됐다는 것이다.

이 추세가 꺾이지 않는다면, 지금의 20-30대가 40-50대가 됐을 때 종교인 비율은 지금의 40-50대보다 더 낮을 것이다. 비율의 착시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의 문제다.

한국리서치가 2025년에 발표한 종교인식 조사가 있다. 주요 종교 신자의 60세 이상 비중을 측정했다. 천주교 50%, 개신교 44%, 불교 43%가 60세 이상이었다. 전체 성인 인구에서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33%라는 점과 비교하면, 세 종교 모두 사회 평균보다 10%포인트 이상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

반대로 30대 이하 젊은 신자 비율은 개신교 21%, 천주교·불교 각각 18%에 불과하다. 전체 성인 인구에서 30대 이하가 차지하는 비중(30%)의 절반 수준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 종교 인구의 비율이 유지되는 것은 고령층 신자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연 감소하기 시작하면 — 즉 고령층 신자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면 — 종교 인구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할 새로운 신자가 충분히 유입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잔잔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 조류가 바뀌고 있다.


청년이 종교를 떠나고 있다

수치가 선명하다. 한국리서치 2025년 조사에서 18-29세 무종교 비율은 72%였다. 30대는 64%였다. 청년 10명 중 7명, 30대 10명 중 6명 이상이 종교가 없다. 그리고 이 비율은 해마다 소폭씩 증가하고 있다. (2)

한국갤럽이 1984년부터 추적해온 장기 시계열 데이터가 있다. 종교인 비율은 1984년 44%, 1989년 49%, 2004년 54%로 증가했다가, 이후 하락세로 돌아서 2014년 50%, 2021년 40%가 됐다. 약 20년 만에 종교인 비율이 14%포인트 줄었다.

청년층이 종교를 떠나는 이유는 여러 조사에서 비슷하게 나온다. "관심이 없어서"(54%),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19%),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17%) 순이다. 특히 개신교에서 이탈한 무종교인이 가장 많다. 비종교인에게 과거 신앙 경험을 물으면 52%가 개신교를 믿은 적 있다고 답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종교가 더 이상 청년 세대에게 설득력 있는 의례 시스템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에 갔다가 실망해서 나왔거나, 처음부터 관심이 없거나.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청년 세대는 의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종교에 반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종교인 중 "호감 가는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이 2021년에 61%였다. 2004년에는 33%였다. 17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개신교의 호감도 하락이 두드러진다. 비종교인 중 개신교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6%에 불과하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관심 자체가 줄었다기보다, 기존 종교들이 청년 세대에게 설득력 있는 공동체와 의례를 제공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신호다. 의례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19회에서 살펴봤듯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기존의 형식이 그 욕구를 더 이상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 — 규모는 유지되지만 내부가 비어간다

개신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종교다. 2024년 기준 전체 인구의 20%가 개신교 신자다. 비율만 보면 안정적이다. 그러나 내부 구조가 변하고 있다.

신자 비율이 유지되는 것은 대형 교회들의 집중 효과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수도권과 대도시의 대형 교회는 여전히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반면 지방 소형 교회들은 신자 감소와 소멸 위기를 직접 체험하고 있다고 여러 언론 보도가 전한다. 전국적 비율은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지역별 교회의 현실은 양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 출석 빈도다. 매주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개신교인은 63%다(한국리서치 2025). 절반 이상이 여전히 주간 참여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개신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개신교는 상대적으로 의례의 규칙성을 유지하고 있다. 일요일 예배라는 명확한 반복 구조가 있다. 명절 전날 기도회, 기일 예배 — 3장에서 분석했던 것처럼 교회는 제사를 대체하는 의례를 제공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30대 여성이 이런 글을 올렸다. "10년 전에 교회 나갔는데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안 다니게 됐다. 교회에서 명절 기도회 할 때 시댁 제사를 피할 수 있어서 나갔던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교회도 안 나가고 제사도 안 지내는데, 명절이 그냥 놀러 가는 날이 됐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이 글에 "나도 비슷하다"는 댓글이 수백 개 달렸다.

이 여성이 경험한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고 있다. 제사를 피하기 위해 교회를 선택했던 여성들이, 교회에서도 발길을 끊으면서 의례의 이중 공백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조도 청년층에서 약해지고 있다. 18-29세 무종교 비율이 72%에 달하는 현실은, 교회가 청년 세대에게 설득력 있는 의례 시스템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 중장년층이 떠받치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20-30년 후에도 같은 규모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불교 — 가장 가파른 고령화

불교의 위기는 더 선명하다.

통계청 인구총조사를 보면 불교 신자 수는 2005년 약 1,100만 명에서 2015년 약 760만 명으로 10년 사이에 340만 명 감소했다.

한국갤럽 2021년 조사에서 불교 신자의 연령별 분포가 확인됐다. 20대 불교 신자 비율은 4~5%인 반면 60대 이상은 28%였다. 20대와 60대 이상의 격차가 여섯 배 이상이다. 개신교(20대 10%대, 60대 이상 23%)와 비교해도 불교의 고령화가 훨씬 심각하다.

그리고 종교활동 참여율 문제가 있다. 한국리서치 2025년 조사에서 매주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불교 신자는 단 3%였다. 한 달에 한 번 미만 참여하는 신자가 43%로 가장 많고, 전혀 참여하지 않는 신자도 24%에 달했다. 불교 신자의 67%가 종교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의례 시스템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의미다. 신자라고 응답하지만 사찰에 가지 않는다. 의례를 수행하지 않는다. '불교 신자'라는 정체성은 유지하지만, 실제로 불교적 의례를 통해 불안을 완화하고 집단 결속을 경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종교 중 불교가 가장 취약한 이유다. 개신교는 주간 예배라는 강한 반복 구조가 있다. 천주교는 주일 미사라는 명확한 의례가 있다. 불교에는 그에 해당하는 정기적 의례 참여 구조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의례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있는데, 그것을 정기적으로 충족시키는 구조가 없다면 신자들은 서서히 멀어진다. 매주 참여 3%라는 숫자는 불교가 의례 시스템으로서 이미 상당 부분 기능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불교계 내부에서도 이 위기를 인식하고 있다. 불교미래사회연구소가 분석한 것처럼 출가자 수가 줄고 승려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사찰 운영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일할 젊은 승려 수가 줄면서 나이 든 승려를 부양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재정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이 추세가 지속되면 지방 소형 사찰의 폐사가 이어질 수 있다.


천주교 —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같은 구조적 문제

천주교는 세 종교 중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편이다. 1인구 비율(11%)을 수십 년째 유지하고 있고, 비종교인의 호감도에서도 불교(20%) 다음으로 높다(13%).

그러나 천주교도 같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2025년 기준 천주교 신자의 50%가 60세 이상이다. 세 종교 중 고령화가 가장 심하다. 30대 이하 신자 비율은 18%로 전체 인구 대비 젊은 층 비중에 비해 낮다.

천주교가 상대적 안정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일 미사라는 명확한 주간 의례 구조와, 혼인성사·세례·장례 등 생애주기 의례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이 구조가 청년층을 계속 끌어들일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세대 교체와 의례의 공백 — 언제 무너지는가

지금 이 순간 한국의 종교 인구 비율은 안정적으로 보인다. 제사는 줄고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교회는 여전히 사람들이 다닌다. 절도 문을 열고 있다. 겉에서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종교 인구의 40~50%를 차지하는 60세 이상 신자들이 자연 감소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계산을 해보자. 현재 주요 3대 종교의 신자 수를 합산하면 한국 성인 인구의 약 48%다. 이 중 60세 이상이 40~50%를 차지한다고 하면, 약 20~24%의 성인이 고령층 신자다. 한국 인구 구조상 이들이 20-30년 안에 자연 감소한다면, 새로운 신자 유입이 지금과 비슷한 수준으로 막혀 있는 상황에서 종교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프로젝션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현실이다. 18-29세의 72%가 무종교인인 지금의 청년 세대가 30-40대가 되었을 때, 지금의 40-50대보다 더 많이 종교를 가질 것이라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더 적어질 가능성이 높다.

20-30년 후 한국 사회에서 의례 시스템을 제공하는 기관 — 교회, 사찰, 성당 — 이 지금보다 현저히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제사는 이미 소멸하고 있다. 종교 기관도 수축하고 있다. 그러면 의례의 공백은 어떻게 채워질 것인가.

20-30년 후를 상상해보자. 지금의 20대가 40-50대가 됐을 때 한국 사회의 의례 풍경은 어떨까. 제사는 거의 사라진 상태일 것이다. 불교 사찰 수는 지금보다 줄어 있을 것이다. 지방 소형 교회의 상당수는 문을 닫았을 것이다. 남은 것은 대도시 대형 교회와 큰 사찰, 그리고 각자 만들어가는 개인화된 의례들.

이것이 비관적 전망이 아니라 현재 데이터에서 읽을 수 있는 방향이다. 한국리서치 조사팀이 말했듯이, 고령층 신자의 자연 감소가 본격화될 경우 종교 인구가 빠르게 축소될 수 있다. 이것은 경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측이기도 하다.


개인화된 추모 — 이미 일어나고 있는 변화

한국 사회가 의례의 공백으로 향하는 동안, 일부에서는 이미 새로운 방식이 만들어지고 있다.

19회에서 살펴봤듯이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서도 각자 방식으로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일에 아버지 사진 앞에 막걸리를 따르는 사람, 봉안당에 다녀온 후 어머니 좋아하시던 음식을 먹으러 식당에 가는 가족, 기일에 낚시터를 찾아가는 사람. 이들은 공식적인 의례 형식을 포기했지만 의례의 본질 — 특정 날짜에 특정 행위를 반복하며 고인을 기억하는 것 — 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개인화된 의례다. 종교 기관도 전통 형식도 아닌, 각자가 만들어가는 기억의 방식. 지갈라타스가 말한 것처럼 의례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식이 제공되지 않으면 스스로 만든다.

이 개인화된 의례들은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는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기일이 되면 온라인 커뮤니티에 쏟아지는 수천 개의 이야기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이 아버지 기일이다", "혼자 봉안당 갔다 왔다", "어머니 좋아하시던 음식 먹었다". 각자 방식이지만, 같은 욕구에서 나오는 행위들이다.


공적 추모의 필요성 — 개인 의례의 한계

개인화된 의례는 가능하지만 한계가 있다. 19회에서 지갈라타스가 밝힌 것처럼, 의례는 공동으로 수행될 때 기능이 강화된다. 혼자 하는 의례보다 함께 하는 의례가 결속력을 더 강하게 만든다. 아버지 사진 앞에 혼자 막걸리를 따르는 것과, 가족이 모여 함께 고인을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 1인가구 36.1%. 지방 소멸과 도시 집중. 직장을 따라 이동하는 인구. 명절에 귀성하는 것도 갈수록 부담이 커지는데, 기일에 따로 모이기는 더 어렵다.

개인이 의례를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공동 의례를 만들기 위한 인프라가 없다. 교회와 사찰이 그 인프라를 제공해왔는데, 그것이 수축하고 있다. 전통 제사가 그것을 제공해왔는데, 그것이 소멸하고 있다. 남은 것은 개인의 고립된 의례들이다.

이것이 18회에서 탐색한 공영추모공원 모델이 의미를 갖는 지점이다. 개인의 선택이나 종교 기관이 아니라, 공적 인프라로서의 추모 공간. 전입신고 연동 기일 관리. 지자체가 제공하는 합동 추모. 이것이 의례의 공백을 채우는 공적 방향이다.

교회가 "신앙을 조건으로" 의례를 제공했다면, 공영추모공원은 "시민권을 조건으로" 의례를 제공한다. 불교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무종교인도 — 전입신고를 한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는 추모 인프라. 이것은 종교가 수축하는 시대에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방향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 혹은 실현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이용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의례의 공백은 계속된다. 이 공백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의례의 공백이 만드는 것들

지갈라타스의 연구가 말하듯 의례는 불안을 완화하고, 집단을 묶고, 기억을 전달한다. 이 세 기능이 동시에 약화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불안 완화 기능의 약화. 죽음 앞의 불안을 다루는 구조가 없어진다. 제사도 없고, 교회 예배도 없고, 절에도 가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슬픔을 담을 의례적 그릇이 없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간소화된 장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는지가 이것을 보여준다. 장례 의례가 줄어들자 유족들이 더 오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보고들이 나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이것을 극단적으로 실험해 보였다. 2020-2021년 감염병 예방 지침으로 장례가 간소화됐다. 조문객 수가 제한됐고, 식사 자리가 없어졌다. 많은 가족이 정식 장례 없이 고인을 보내야 했다. 이후 여러 증언에서 이것이 유족들에게 더 오래 지속되는 슬픔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의례를 통해 애도를 마무리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례가 불안 완화 기능을 한다는 지갈라타스의 이론이 한국 사회에서 검증된 셈이었다.

집단 결속 기능의 약화. 가족이 모이는 계기가 사라진다. 제사가 없어지고, 교회 행사도 없어지고, 절 법회도 없어지면 —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오직 결혼식, 장례식, 명절 정도가 남는다. 이것들도 점점 규모가 작아지고 있다. 형제자매가 한 해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게 됐다.

기억 전달 기능의 약화. 제사상 앞에서 할머니 이야기를 하던 시간이 없어지면, 할머니는 잊힌다. 이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가계의 기억이 2-3세대 만에 끊긴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사람들의 후손인지를 모르는 것이 정체성의 뿌리를 약하게 만든다.


한국적 세속화의 독특한 경로

서구의 세속화는 기독교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기독교가 후퇴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의 세속화는 다르다. 한국은 제사(유교적 조상 의례)와 불교, 개신교, 천주교가 동시에 존재하다가, 이것들이 동시에 수축하고 있다. 대체 시스템 없이 여러 의례 시스템이 한꺼번에 약화되는 것이다.

서구에서 세속화가 진행될 때, 국가가 일부 의례 기능을 흡수했다. 공화국 수립 기념일, 현충일, 국립묘지 참배 등 국가적 의례가 종교 의례의 일부를 대체했다. 한국에도 이런 국가 의례들이 있다. 그러나 가족 단위의 기억, 개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의례, 기일을 기억하는 시스템 — 이것들을 국가 의례는 대체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가 서 있는 전환점은 이것이다. 제사라는 가족 의례, 교회·사찰이라는 종교 의례가 동시에 약화되고 있는데, 그것을 대체할 공적 의례 시스템이 아직 없다. 이 공백이 20-30년 후 더 크게 가시화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 서 있는가

숫자로 정리하면 이렇다.

종교 인구 비율(2025년 한국리서치): 무종교 52%, 개신교 20%, 불교 16%, 천주교 11%. 청년 무종교율: 18-29세 72%, 30대 64%. 종교 신자 중 60세 이상: 천주교 50%, 개신교 44%, 불교 43%. 전체 인구 60세 이상 비율 33%. 제사 계획 없는 성인: 55.9%(성균관 2023).

이 수치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지금은 아직 버티고 있지만, 구조가 바뀌고 있다. 비율이 안정적인 것은 고령층 신자들이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층의 탈종교, 제사의 소멸, 고령층 신자의 자연 감소가 겹치면 의례의 공백은 더 커질 것이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30대 남성이 이런 글을 올렸다. "아버지 기일인데 제사도 안 지내고 교회도 안 다니고 절도 안 가는데, 오늘 하루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공감이 수천 개 달렸다. 이 감각 — 기억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 — 이 지금 한국 사회에 퍼져 있다. 의례의 공백이 만드는 공허함이다.

이것을 재앙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지갈라타스가 말했듯이 의례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의례가 없어지면 인간은 만든다. 팬데믹이 의례를 빼앗았을 때 유럽 사람들이 발코니에 나가 박수를 치는 의례를 만들어낸 것처럼.

문제는 그 만들어진 의례들이 개인 차원에 머물 것이냐, 아니면 사회적 인프라로 지지받을 것이냐이다. 막걸리를 따른 사람이 혼자 그렇게 하느냐, 아니면 가족과 함께, 혹은 지역사회와 함께 고인을 기억하는 공간이 있느냐.


21회로 향하는 질문

미래의 의례는 누가 만들 것인가. 국가가 만들 것인가, 종교 기관이 만들 것인가, 개인이 만들 것인가, 아니면 지자체가 만들 것인가.

덴마크 오르후스대 인지종교학자 예스퍼 쇠렌센(Jesper Sørensen)은 의례가 경쟁하고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의미 있고 수행 가능한 의례가 선택된다. 의무이거나 착취적인 의례는 사라진다. 이것이 진화의 논리다.

한국에서 제사가 사라지는 것도,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도, 불교 신자들이 사찰에 가지 않는 것도 — 모두 이 논리의 작동이다. 수행하기 어렵거나, 비용이 너무 크거나, 의미를 찾기 어려운 의례는 사라진다. 그 자리를 채울 의례가 무엇인지가 21회의 질문이다.

쇠렌센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의례들이 경쟁하고 있다. 전통 제사, 교회 예배, 불교 의례, 그리고 각자 만들어가는 개인 의례들 — 이것들이 경쟁하고 있고, 의미 있고 수행 가능한 것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 경쟁에서 어떤 방식이 선택받을 것인지, 그리고 그 선택을 지지하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지 — 그것이 이 연재의 마지막 회차가 탐색하는 것이다.

미래의 의례는 강요되는 전통이 아니라 사람들이 선택하는 기억 방식이 될 것이다. 어떤 방식이 선택받을 것인가.

이 전환점이 도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제사가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며느리가 새벽에 일어나 제사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된다.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의례 형식들이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것과 함께 의례의 기능까지 사라지느냐이다. 형식이 사라지면서 기능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살리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갈 수 있느냐가 이 전환점의 핵심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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