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대신 예배를 선택한 여자들

5장 의례의 재정의

by 한시을

19회 인간은 왜 의례를 만드는가


아버지 사진 앞에 막걸리를 따른 사람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아버지 기일인데 제사는 안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기일 당일 날 뭔가 이상하게 허전하더라. 결국 아버지 사진 앞에 좋아하시던 막걸리 한 잔 따르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게 뭔지 모르겠다. 제사도 아닌데."

이 사람은 왜 그렇게 했는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어떤 행위가 필요했다. 그것이 막걸리 한 잔으로 나타났다.

이 행위를 의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제사 형식은 없다. 절도 없고, 제사상도 없고, 향도 없다. 그런데 이 행위에는 의례의 본질적 특성이 있다. 반복될 것이다. 이 사람은 아마 내년 기일에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에 의미가 있다.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기억하는 특별한 시간을 만들기 위한 행위다.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이 흥미롭다. "나도 비슷하게 한다", "그거면 충분한 거야", "의례는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다". 수천 명이 공감했다. 막걸리를 따른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방식으로 의례를 만들고 있었다.

왜인가. 인간은 왜 의례를 만드는가. 제사라는 형식이 사라지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의례를 만들어낸다. 이 욕구는 어디서 오는가. 이것이 5장의 시작점이다.


지갈라타스 — 의례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코네티컷대 인지인류학자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Dimitris Xygalatas)는 의례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선구자다. 그는 코네티컷대 실험인류학연구소(Experimental Anthropology Lab)를 운영하며, 현장 연구와 실험실 연구를 결합하는 독특한 방법론으로 의례의 기능을 탐구한다. 그리스의 불 걷기 축제, 모리셔스의 힌두교 타이푸삼 축제, 브라질 축구 경기장, 미국 농구 경기장 — 세계 곳곳의 의례 현장에 심박수 모니터와 코르티솔 측정 장비를 들고 들어가 의례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측정한다.

그가 2022년 출간한 『Ritual: How Seemingly Senseless Acts Make Life Worth Living』(의례: 겉보기에 무의미한 행위들이 삶을 살 만하게 만드는 방법)은 이 모든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다. Little, Brown Spark에서 출간된 이 책은 320쪽 분량으로, 의례가 왜 모든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지를 진화적·인지적 관점에서 탐색한다.

지갈라타스는 본래 의례에 회의적이었다고 책에서 쓴다. 어린 시절 국가 의례나 종교 의례를 보며 "왜 저런 무의미한 행동을 하는가"라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처음 축구 경기장에 갔을 때 생각이 바뀌었다. 4만 명의 팬이 같은 색 유니폼을 입고 같은 순간에 일어나고 앉으며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 뭔가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개인들이 하나의 존재로 합쳐지는 경험. 그것이 의례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그가 책에서 던지는 핵심 질문은 하나다. "왜 겉보기에 아무런 실용적 이유가 없는 행위들이 모든 인간 사회에 존재하고, 수천 년을 지속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종교 의례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결혼식에서 반지를 교환하는 것, 생일마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끄는 것,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짓는 것, 시험 전날 연필을 깎는 것, 야구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 배트를 두드리는 것. 이것들은 모두 의례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기능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모든 사회에, 모든 시대에 존재한다. 왜인가


의례는 인간보다 오래됐다

지갈라타스가 제시하는 첫 번째 논점은 충격적이다. "의례는 농업, 글쓰기, 도기, 바퀴보다 먼저 존재한다."

이것은 그의 직접 발언이다. 인류 문명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들 — 농사, 문자, 도기 제작, 바퀴 — 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인간은 의례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가 이를 뒷받침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2,000년 전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는 인류 최초의 거대 석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농업이 시작되기 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의례적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은 식량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법을 알기 전에 이미 의례를 위해 거대한 구조물을 쌓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례는 문명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의례가 문명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집단이 공동의 의례를 수행하면서 협력하고 신뢰하고 유대를 형성하는 능력이 생겼고, 그 능력이 농업 혁명과 문명의 발생을 가능하게 했을 수 있다.


의례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지갈라타스의 두 번째 논점은 더 나아간다. 의례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새의 구애 댄스는 짝짓기를 위한 의례다. 코끼리는 죽은 동료 곁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애도 의례를 행한다. 침팬지는 협력과 사회 조직을 위한 다양한 의례를 가진다. 지갈라타스는 이것을 한 방향으로 정리한다. 지능과 의례는 함께 진화했다. 가장 지능적인 동물이 가장 풍부한 의례 레퍼토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논점은 의례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의례는 미신이나 비이성적 관행이 아니다. 오히려 의례는 복잡한 심리를 가진 존재들이 불확실성과 복잡성에 대처하기 위해 발전시킨 인지적 도구다. 지능이 높을수록, 심리가 복잡할수록, 더 많은 의례가 필요하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지갈라타스는 책에서 자신의 어린 아들 이야기를 한다. 두 살쯤 됐을 때 아들은 모든 일이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고집했다. 모자를 쓰는 방식, 잠자리에 드는 순서, 밥을 먹는 자리. 아주 작은 변화에도 심하게 저항했다. 지갈라타스는 이것이 무작위처럼 보이는 세계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아이의 인지적 노력이라고 분석한다. 반복과 규칙이 불안을 줄인다.


불안을 달래는 인지 도구 — 실험이 증명한 것들

지갈라타스가 제시하는 세 번째 논점은 실험으로 검증된 것이다. 의례는 불안을 줄인다.

지갈라타스가 Spirituality & Health와의 인터뷰(2022)에서 언급한 연구가 있다. 힌두 사원에서 주간 기도를 수행하러 온 사람들에게 심박수 변동성을 측정하는 장치를 달았다. 의례를 수행한 사람들은 대조군에 비해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했다. 주관적 불안 수준도 낮았다. 코네티컷대 연구실에서 진행한 별도 연구에서는 침과 모발 샘플로 코르티솔 — 스트레스 호르몬 — 을 측정했는데, 더 규칙적으로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만성 불안 수준이 낮게 나타났다.

왜인가. 지갈라타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의례는 구조(structure)다. 의례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이다. 정해진 순서대로, 정해진 방식으로 행해야 한다. 그 예측 가능성이 뇌를 안정시킨다. 주변이 혼란스럽고 불확실할 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반복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안정감을 준다.

이것은 스포츠 선수들의 루틴이 왜 효과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테니스 선수가 서브 전에 공을 정확히 같은 횟수만큼 바운드시키는 것, 야구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 헬멧을 세 번 두드리는 것 — 이것들은 미신이 아니다. 불확실성 앞에서 예측 가능한 행위를 통해 집중력을 높이고 불안을 낮추는 인지적 전략이다.

일상에서도 같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특정한 방식, 잠자리에 들기 전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순서, 책상 위의 물건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 — 이것들이 모두 의례의 일종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무너질 때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의례가 인지적 안정의 구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의 앨리슨 우드 브룩스(Alison Wood Brooks)와 동료들이 2016년에 진행한 연구다. 참여자들에게 노래 부르기처럼 불안을 유발하는 과제 전에 동일한 행동 순서를 수행하게 했다. 그런데 한 집단에게는 "지금 의례를 수행하세요"라고 설명하고, 다른 집단에게는 "지금 몇 가지 임의적 행동을 수행하세요"라고 설명했다. 물리적으로 동일한 행동이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의례라고 명명된 행동을 수행한 집단이 불안이 더 크게 낮아졌고 수행 능력도 더 높았다.

이 발견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의례의 효과는 행동 자체보다 그 행동에 부여하는 의미에서 온다는 것이다. 같은 행동도 의례라는 프레임 안에 놓이면 다르게 작동한다. 이것이 의례를 단순한 습관과 구분하는 지점이다. 습관은 자동화된 반복이다. 의례는 의미가 부여된 반복이다.

그렇다면 제사가 사라진 자리에서 아버지 사진 앞에 막걸리를 따른 행위 — 그것이 의례로 인식되는 순간 실제로 의례로 기능한다.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 부여의 문제다.


집단을 묶는 의례 — 불 위를 걷는 사람들의 심장

지갈라타스의 네 번째 논점은 현장 실험으로 입증된 것이다. 의례는 집단을 하나로 묶는다.

2011년 스페인 산 페드로 만리케(San Pedro Manrique) 마을에서 지갈라타스와 동료들은 매년 하지에 열리는 불 걷기 의례를 연구했다. 약 700도의 불 위를 맨발로 걷는 의례다. 연구팀은 참여자들과 관중들 — 마을 사람과 외지인 모두 — 에게 심박수 측정 장치를 부착했다.

결과가 놀라웠다. 불 위를 걷는 참여자와 그 가족·친지들의 심박수가 거의 동기화되어 움직였다. 참여자가 불 위를 걷기 전 긴장할 때 가족의 심박수도 올라갔다. 참여자가 무사히 건너고 나서 안도할 때 가족의 심박수도 내려갔다. 반면 마을 외지에서 온 관람객들의 심박수는 그렇지 않았다.

이 발견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례를 함께 경험한다는 것이 신체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감정이 동기화되고, 신체가 동기화된다. 이것이 집단 결속의 생리적 기반이다. 의례는 단순히 사람들을 같은 공간에 모아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과 감정을 실제로 연결한다.

지갈라타스는 이 심박수 동기화의 정도가 참여자들 사이의 사회적 유대의 강도와 직접 비례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더 가까운 관계일수록 심박수 동기화 정도가 더 높았다. 의례가 이미 있는 유대를 확인할 뿐 아니라, 유대 자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고통이 클수록 결속이 강해진다 — 모리셔스 실험

지갈라타스의 다섯 번째 논점은 더 극적이다. 의례의 강도가 높을수록 집단 결속이 더 강해진다.

2013년에 출판된 연구에서 그와 동료들은 모리셔스 섬의 힌두교 타이푸삼(Thaipusam) 축제를 연구했다. 이 축제에서 일부 참여자들은 볼과 혀에 바늘을 꽂고, 40~50킬로그램에 달하는 카바디(kavadi)라는 구조물을 지고 수 시간 동안 맨발로 사원까지 걸어간다. 연구팀은 참여자들이 축제 후 자선 기금에 기부하는 금액을 측정했다.

결과는, 더 극단적인 의례를 수행한 참여자일수록 더 많이 기부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적극적 참여자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행렬을 따라 걸었지만 신체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가족 구성원에게도 나타났다. 고통을 경험한 참여자와 관련된 가족이 더 많이 기부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례의 비용 — 신체적 고통, 시간과 노력 — 이 공동체 전체에 결속을 만들어낸다. 고통을 함께 경험하거나 목격하는 것이 '우리는 함께다'라는 감각을 강화한다. 이것이 지갈라타스가 말하는 비용 신호(Costly Signaling) 이론의 핵심이다.

제사 맥락에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통 제사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노동, 새벽에 일어나 절을 하는 수고 — 이 비용들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신호였을 수 있다. 물론 그 비용을 특정 집단(며느리들)이 불균등하게 부담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의례에 비용이 수반된다는 것 자체가 결속의 조건이었다는 점은 지갈라타스의 연구가 뒷받침한다.


왜 침팬지는 의례가 없고 인간은 있는가

지갈라타스가 제시하는 여섯 번째 논점은 의례의 진화적 기원에 관한 것이다.

어린 아이와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 있다. 어떤 행동을 보여주되, 그 행동에 결과를 얻기 위해 불필요한 단계들을 포함시킨다. 침팬지는 불필요한 단계를 건너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만 한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불필요한 단계까지 정확히 모방한다. 왜 그렇게 했냐고 물으면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라고 답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인간의 아이가 불필요해 보이는 행동까지 정확히 모방하는 것은, 사회적 학습의 방식 때문이다. 인간은 특정 행동의 인果관계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속한 사회적 맥락 전체를 배운다. 의례의 형식 — 순서, 방식, 반복 — 을 정확히 따르는 것이 그 사회의 일원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례가 문화 전달의 핵심 메커니즘인 이유다. 할머니가 제사상을 차리는 방식, 절을 하는 방법, 음식을 올리는 순서 — 이것들을 배우는 것이 단순히 제사 형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 가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의례는 언어 이전에 작동하는 문화 전달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침팬지와 다른 이유다. 복잡한 문화를 축적하고 전달하는 능력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 능력의 핵심에 의례가 있다.


불안이 높아지면 의례가 늘어난다 — 역방향 작동

지갈라타스가 코네티컷대 동료들과 함께 진행한 또 다른 연구가 있다. Lang, Krátký, Xygalatas 등의 연구팀이 2015년 Current Biology에 발표한 결과다. 사람들이 높은 불안 상태에 있을 때, 자발적으로 더 많은 의례적 행동을 하는지를 측정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불안이 높아질수록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행동이 자발적으로 증가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과가 양방향이라는 것이다. 의례가 불안을 줄이기도 하지만, 불안이 의례를 만들기도 한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인간은 본능적으로 반복과 규칙을 찾는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제사 문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 현대사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급격한 산업화, 외환위기. 이런 시기에 제사가 더욱 강화됐다면, 그것은 미신 때문이 아니라 불안에 대처하는 인간의 본능적 반응이었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지금 사회적 안정이 어느 정도 확보되고 여성들이 제사 노동을 거부하는 조건이 갖춰지면서 제사가 소멸하는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가 증명한 것 — 의례 없이 살 수 없다

지갈라타스의 마지막 논점은 가장 최근의 경험에서 나온다. 코로나19 팬데믹.

2020년, 전 세계에서 모임이 금지됐다. 종교 의례가 중단됐다. 가족 모임이 사라졌다. 졸업식이 취소됐다. 장례식이 간소화됐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차피 형식이니까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곧 무언가 심각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불안이 증가했다. 단절감이 커졌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의례를 만들었다. 매일 저녁 특정 시간에 발코니에 나가 박수를 치는 것(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화상통화로 생일 파티를 여는 것, 직장에서 온라인 회의 시작 전 특정한 인사 방식을 만드는 것. 지갈라타스는 이 현상을 주목했다. 팬데믹이 기존의 의례를 빼앗았을 때, 인간은 자발적으로 새로운 의례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결정적 증거다. 의례는 종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문화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례가 없어지면 인간은 의례를 다시 만든다.


한국 제사에 대한 다른 독해

이 맥락에서 한국의 제사 소멸을 다시 읽어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제사는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화장률 92.9%, 1인가구 36.1%, 합계출산율 0.72명.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의 2023년 조사에서 성인의 55.9%가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명절 차례를 지내는 비율은 10년 새 71%에서 40% 안팎으로 급감했다. 제사를 지탱하던 조건들이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제사 노동을 거부하면서 의례의 착취적 구조가 내부에서 붕괴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제사라는 특정 형식이 사라지는 것이지, 의례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기일에 아버지 사진 앞에 막걸리를 따른 사람, 봉안당 방문 후 아버지 좋아하시던 음식을 먹으러 식당에 간 가족, 트로트를 틀어놓고 어머니를 기억한 딸 — 이들은 제사를 거부했지만 의례를 만들어냈다. 지갈라타스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존 의례가 사라지면 인간은 새로운 의례를 만든다. 팬데믹 기간에 유럽 사람들이 발코니 박수를 만들어낸 것처럼.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제사가 없어진 자리에서 인간의 의례 욕구는 어디로 가는가. 그 욕구가 충족되는가, 아니면 공백 속에 억눌리는가.


의례가 충족하는 것들 — 기억과 감정을 묶는 장치

지갈라타스가 정리하는 의례의 세 가지 핵심 기능으로 돌아오자.

첫 번째, 불안 완화. 죽음은 인간이 마주하는 가장 근원적인 불안이다. 조상 의례는 수천 년 동안 이 불안에 대응해왔다. 고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방식으로 고인을 기억하는 것이 그 불안을 다루는 구조를 제공했다.

제사가 사라지면서 이 구조가 없어졌다. 기일이 되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뭔가 이상하게 허전하다"는 감각 — 앞서 인용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글이 정확히 이것을 말한다. 의례가 없어지자 불안에 대처하는 구조도 없어진 것이다.

두 번째, 집단 결속. 제사는 가족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장치였다. 그것이 제사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모임이라는 행위가 가족이라는 집단의 결속을 유지했다. 제사를 통해 "우리는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다.

제사가 사라지면서 그 모임의 계기도 사라진다. 명절이 아니면 가족이 모일 이유가 없어진다. 명절에는 명절 자체의 갈등이 있다. 조용하게 가족이 연결되는 기회가 줄어든다.

세 번째, 기억과 정체성. 의례는 기억을 저장하고 전달하는 메커니즘이다. 제사상을 차리면서 할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이야기하고, 증조부의 기일에 음식을 올리면서 그 존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 이름 없이 사라질 뻔한 사람들이 의례를 통해 계속 기억된다.

제사가 없어지면 이 기억 전달의 장치도 없어진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50대 여성이 이런 글을 올렸다. "제사 지낼 때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제사 없애고 나니까 그 이야기들도 없어졌다. 손자들이 할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모르겠구나 싶었다." 이것이 의례 소멸의 보이지 않는 비용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의례는 가능한가

지갈라타스의 연구가 가리키는 방향은 희망적이다. 의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형식은 바뀌어도 기능은 남는다.

새의 구애 댄스도 종마다 다르다. 침팬지의 의례도 집단마다 다르다. 인간의 의례도 문화마다, 시대마다 다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의례를 만들려는 욕구이지, 의례의 형식이 아니다.

이것이 제사가 사라지는 지금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다. 제사라는 형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형식이 담고 있던 기능 — 불안 완화, 집단 결속, 기억 전달 — 을 담을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18회에서 탐색한 공영추모공원과 전입신고 연동 모델은 그 방향 중 하나다. 제사상 없이, 의례 노동 없이, 그러나 기일에 가족이 모여 고인을 기억한다는 본질은 유지하는 방식. 지갈라타스의 세 가지 기능을 충족하면서 착취적 구조를 제거한 의례.

그리고 막걸리를 따른 사람처럼 각자 자기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의례도 있다. 공적 시스템이 있으면 더 좋지만, 없더라도 인간은 의례를 만든다. 그것이 지갈라타스의 연구가 말하는 것이다.


의례 없이는 살 수 없다 — 그러나 어떤 의례인가

이 장의 마지막에서 한 가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지갈라타스의 연구는 의례가 인간에게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모든 의례가 좋은 것임을 말하지 않는다.

의례는 집단을 묶기도 하지만 집단을 나누기도 한다. '우리'를 강화하는 것은 동시에 '그들'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의례는 포용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배제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의례의 비용이 특정 집단에게 불균등하게 부과될 때, 의례는 착취의 장치가 된다. 제사가 며느리들에게 그랬듯이.

그러므로 새로운 의례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의례의 기능을 살리면서 착취의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비용이 집중되지 않으면서, 모든 참여자에게 고르게 의례의 기능 — 불안 완화, 결속, 기억 — 이 분배되는 방식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5장의 질문이다. 의례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어떤 의례를 선택하느냐가 달라질 뿐이다.

지갈라타스의 연구가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이것이다. 의례는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것이다. 농업보다 오래됐고, 글쓰기보다 오래됐고, 바퀴보다 오래됐다. 인간이 인간인 한 의례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식이 사라져도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다. 팬데믹이 의례를 빼앗아도 인간은 새로운 의례를 만든다.

그렇다면 제사가 사라지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의례는 어디로 가는가. 세 방향이 보인다. 첫째,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개인 의례들 — 막걸리를 따르고, 좋아하시던 음식을 먹고, 낚시터를 찾는. 둘째, 공적 인프라가 뒷받침할 경우 자리 잡을 수 있는 공영추모공원 방문 의례. 셋째,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의례들 — 다음 세대가 만들어갈 방식들.

이 세 방향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한국 사회 전체의 의례적 풍경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다음 회에서 구체적 숫자로 살펴본다. 제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도 절도 동시에 수축하고 있다. 의례의 전면적 공백이 오고 있다. 그 공백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거기서 어떤 가능성이 열리는지를 탐색하는 것이 20회의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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