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의례의 분기점
두 개의 풍경, 하나의 질문
추석 당일 오전. 고속도로는 막힌다. 올해도 예외가 없었다. 귀성 차량이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고향으로 흘러간다. 왜 이 사람들은 움직이는가. 제사를 지내러 간다. 차례를 지내러 간다. 성묘를 하러 간다. 고향에 가야 조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고정된 장소에 있고, 산 자가 그리로 가야 한다는 것 — 이것이 수천 년 동안 한국 사회가 추모를 구성해온 방식이다.
그런데 이 질문을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되는가. 만약 죽은 자가 고정된 장소에 있지 않다면? 산 자가 사는 곳 어디서나 고인을 기억할 수 있다면? 전국민이 같은 날 같은 방향으로 이동할 이유가 없어진다. 추석 귀성 대란이 사라진다. 이것이 이 회차의 핵심 질문이다.
이제 같은 날 다른 풍경을 본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올해 추석에 시댁 제사 지내고, 전날부터 준비하느라 이틀이 날아갔다. 앞으로도 이걸 계속해야 하나. 남편은 '우리 집 전통이니까'라고 하는데, 나는 내 조상도 아닌 분들 제사를 위해 매년 이틀을 바치는 게 언제까지인지 모르겠다." 수천 개의 공감이 달렸다.
두 풍경은 같은 구조에서 나온다. 고정된 장소에 있는 고인을, 가족이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의례를 행하며 기억한다. 그 구조가 추석 귀성 대란을 만들고, 동시에 며느리 노동을 만든다. 이 두 문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두 문제는 별개로 다뤄졌다. 귀성 대란은 교통 문제로, 며느리 노동은 가족 문화 문제로. 그러나 뿌리가 같다면, 해법도 같은 곳에서 나올 수 있다.
그 뿌리는 무엇인가. 죽은 자의 고정성이다. 죽은 자가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있고, 산 자가 그리로 가야 하고, 도착해서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하나의 연쇄를 이룬다. 그렇다면 이 연쇄를 끊는 방법은 하나다. 죽은 자를 고정된 장소에서 해방시키는 것.
화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2023년 화장률 92.9%는 단순한 장례 문화의 변화가 아니다. 죽음이 이동 가능한 시대가 됐다는 선언이다. 유골은 옮길 수 있다. 산 자가 사는 곳으로, 산 자가 이사하면 따라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논의는 그 활용의 방향 하나를 탐색한다.
선호와 공급의 간극 — 추모 시설이 부족하다
화장이 일반화되면서 유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선호도 바뀌었다. 보건복지부가 2020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화장 후 처리 방식으로 수목장 등 자연장을 원하는 사람이 41.6%로 가장 높았다. 그러나 실제 자연장 이용률은 24.5%에 그쳤다. 원하는 사람이 40%를 넘는데 실제 이용은 25%도 안 된다. 왜인가.
공적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공립 수목장림은 세종, 경기 의왕·양평, 인천, 충남 보령 등 다섯 곳뿐이고 대부분 포화 상태다. 사설 수목장림은 127곳이지만 비용이 최소 1,000만 원에서 최대 1억 원에 이른다. 국립 수목장림 가족목 한 그루 비용이 200만 원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격차가 크다.
결국 대다수는 원하지 않더라도 봉안당을 택한다. 가장 접근하기 쉽고 비용이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선호와 공급의 간극 속에서 추모는 선택이 아니라 타협이 된다. 이 타협이 지금의 어색한 상태를 만든다. 봉안당에 모셔져 있는데도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화장 시대와 제사 문화가 충돌하는 상태.
공영추모공원이 이 간극을 메우는 방향이다.
산소에서 공영추모공원으로 — 장소의 전환
전통 제사의 공간 구조를 한 번 정리해보자.
전통 제사의 공간 구조를 정확히 짚어보자. 매장 시대에 명절에는 산소를 찾아가 성묘를 했다. 그러나 기일은 달랐다. 기일 제사는 집에서 지냈다. 고인이 선산에 묻혀 있어도, 기일에는 혼령을 집으로 불러들여 제사상 앞에 모시는 것이 의례의 구조였다. 산 자가 죽은 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혼령이 산 자의 집으로 오는 것. 이것이 기일 제사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2023년 화장률이 92.9%에 달하는 지금, 대부분의 유골은 봉안당에 있다. 보건복지부의 화장통계 수치다. 그런데 기일 제사는 여전히 집에서 지낸다. 고인이 봉안당에 모셔져 있어도, 기일에는 여전히 집에서 제사상을 차린다. 봉안당으로 장소가 바뀌었어도, 기일 제사만큼은 집을 떠나지 않는다. 매장 시대부터 이어온 관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 결과 봉안당이라는 새로운 장례 방식과, 집 제사라는 오래된 의례가 어색하게 공존한다.
이것이 문제다. 봉안당이 생겨도, 기일 제사의 노동 — 음식 준비, 상차림, 뒷정리 — 은 여전히 며느리의 몫이다. 장소가 바뀌어도 집 제사 노동은 바뀌지 않는다.
공영추모공원은 이 구조를 바꾼다. 혼령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고인이 안치된 공영추모공원으로 간다. 성묘처럼. 그런데 봉안당과 다른 점이 있다. 공영추모공원에는 지자체가 차려준 상차림이 있다.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추모 공간이 있다. 집에서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기일에 집 제사를 대체할 조건이 갖춰진다.
핵심은 접근성이다. 봉안당도 집 제사를 대체할 수 있었지만 하지 못했다. 왜인가. 봉안당은 추모 공간이지, 상차림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봉안당에 가서 절하고 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제사를 지내야 했다. 공영추모공원은 다르다. 그곳에서 추모와 상차림이 모두 이루어진다. 집 제사를 대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이 구조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봉안당이 생겼는데도 귀성은 계속된다. 봉안당이 생겼는데도 기일 제사는 계속되고, 며느리 노동도 계속된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구조는 그대로다.
여기서 하나의 방향을 상상해볼 수 있다. 지자체가 조성하고 운영하는 공영추모공원이다. 수목과 정원을 갖추고, 기일마다 가족이 모여 고인을 기억할 수 있는 공적 추모 공간. 개인의 선산도, 민간 봉안당도 아닌, 시민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추모의 장소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봉안당의 공공 버전이라면 특별할 것이 없다. 핵심은 여기에 무엇을 연결하느냐에 있다.
전입신고 연동 — 이 모델의 혁명성
지금 한국의 행정 시스템에는 전입신고 제도가 있다. 이사를 하면 새 주소지에 전입신고를 한다. 이 행정 행위는 이미 존재하고, 전국 모든 시민이 한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없다.
여기에 항목 하나를 추가한다고 상상해보자.
전입신고 시 부모·조부모 기일을 등록한다. 공영추모공원 이용 여부를 선택하고, 비용은 지자체 복지 정책에 따른다. 전출할 때는 해지하고 새 지역에서 다시 등록한다. 고인이 이사하는 가족을 따라 지역을 옮기는 것이다.
이 단순한 연동이 무엇을 만드는가.
지자체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기일 데이터를 갖게 된다. 1월 1일에 기일이 있는 세대, 1월 2일에 기일이 있는 세대, 그렇게 12월 31일까지. 365일 전체에 기일이 분산된다. 지자체가 기일 당일 아침 해당 세대에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오늘은 ○○ 어르신의 기일입니다. 공영추모공원 추모 행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공영추모공원에서는 그날 기일인 가정들이 시간대별로 배정되어, 지자체가 차려준 추모 상차림 앞에서 가족이 모여 고인을 기억한다. 의례가 끝나면 가족들은 인근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고 돌아간다.
간단한 계산을 해보자. 인구 10만 명 도시에 3만 가구가 있다고 하면, 각 가구에 기일이 평균 2개라고 했을 때 연간 6만 건의 기일이 발생한다. 이것이 365일에 분산되면 하루 평균 164건의 기일이다. 하루 164가정이 공영추모공원을 방문하고, 각 가정이 평균 4명이라면 하루 656명이 인근 식당과 상점을 이용한다. 이 소비가 매일 꾸준하게 발생한다. 명절에 폭발적으로 몰리고 나머지 날은 한산한 지금의 구조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이 전부다. 전입신고는 이미 모든 시민이 하는 행정 행위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없다. 기존 인프라에 항목 하나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구조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이 모델이 작동하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공영추모공원이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 지금은 없다. 그러나 국공립 수목장림이 전국 5곳으로 포화 상태에 이른 현실을 보면, 공영 추모 시설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이미 충분하다. 지자체마다 하나씩 공영추모공원을 조성하는 것 — 이것이 전입신고 연동 시스템의 물리적 전제다. 인프라와 시스템이 동시에 구축될 때, 이 모델은 작동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짚을 것이 있다. 같은 날 기일인 가정이 여러 곳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인구 10만 도시라면 특정 날에 기일인 가정이 수십에서 백여 세대가 될 수 있다. 세대마다 별도 공간과 시간대를 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법은 합동 추모다. 그것도 하루 두 타임 — 점심과 저녁으로 나눈다.
예를 들어 1월 1일 기일인 세대가 100가정이라면, 50가정은 오전 11시 점심 타임 합동 추모, 나머지 50가정은 오후 5시 저녁 타임 합동 추모에 배정된다. 공영추모공원에서 지자체가 차려주는 상차림을 50가정이 함께 이용한다. 각 가정이 개별적으로 제사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공유하고 상차림 비용을 분담하는 방식이다. 50가정이 비용을 나누면 세대당 비용은 더 낮아진다.
이 합동 추모 방식이 낯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미 불교 사찰에서는 합동 기제(忌祭), 합동 위령제가 보편적이다. 같은 날 고인을 잃은 여러 가정이 한 공간에 모여 함께 추모하는 방식은 이미 존재한다. 공영추모공원의 합동 추모는 이것을 지자체 차원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합동 추모에는 예상치 못한 효과가 있다. 같은 날 기일인 이웃을 만나는 것. "우리 어머니도 오늘이 기일이에요." 낯선 사람과 나누는 이 한 마디가, 혼자 봉안당을 찾아가 홀로 앉았다 오는 것보다 덜 외롭다. 고인을 잃은 슬픔을 나누는 공동체적 연대가 거기서 생긴다.
점심 타임 추모가 끝나면 50가정이 인근 식당으로 향한다. 저녁 타임 추모가 끝나면 또 다른 50가정이 인근 식당으로 향한다. 같은 날 지역 식당에 두 번의 추모 후 식사 손님이 온다. 지역경제 활성화도 두 배가 된다.
비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의 문제다.
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데 돈을 받지 않는다. 공원은 산책하는 데 돈을 받지 않는다. 경로당은 어르신들이 모이는 데 돈을 받지 않는다. 이것들이 가능한 이유는 공적 복지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지자체가 운영비를 예산으로 충당한다.
공영추모공원도 같은 프레임으로 볼 수 있다. 공원 조성비와 관리운영비, 기일 상차림 비용을 지자체가 복지 예산으로 처리한다. 이용 주민에게 비용을 얼마나 부담시킬 것인지는 지자체가 결정한다. 재정 여력이 있는 지자체는 무료로, 그렇지 않은 지자체는 일부 실비를 받는 방식으로. 이것이 지방자치의 본래 의미다. 지역 여건에 맞는 복지 설계.
무료에 가까울수록 의례의 민주화는 완성된다. 돈이 없어도 기일에 가족이 모여 고인을 기억할 수 있는 것. 재벌 가문의 스펙터클한 추도식과 봉안당 앞 혼자 마시는 소주 사이의 간극을 공적 시스템이 채우는 것. 그것이 복지로서의 공영추모공원이다.
이 모델이 해결하는 것들 — 일석삼조가 아니라 일석다조
첫 번째. 추석·설 귀성 대란의 구조적 해체다.
지금 추석·설 고속도로 대란의 근본 원인은 전국민이 같은 날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추석에 모두가 고향을 향해, 설날에 모두가 고향을 향해 움직인다. 이 집중이 수십 킬로미터 정체를 만든다.
공영추모공원 모델에서 기일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365일에 분산된다. 1월 1일 기일인 가정은 1월 1일에 지역 공영추모공원을 방문한다. 3월 15일 기일인 가정은 3월 15일에 방문한다. 8월 22일 기일인 가정은 8월 22일에 방문한다. 전국민이 같은 날 이동할 이유가 없다. 귀성이 아니라, 각자 기일에 각자 사는 지역에서 추모한다. 명절 귀성이라는 개념이 구조적으로 해체된다. 고속도로 대란이 없어진다.
두 번째. 여성 노동 해방이다.
기일에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지자체가 차린 추모 상차림을 복지 서비스로 이용한다. 며느리가 전날부터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누가 어떤 음식을 얼마나 만들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가족 갈등도 없다. 이 연재의 1장에서 시작된 질문 — 제사는 왜 여성에게 부담인가 — 이 이 모델에서는 구조적으로 해소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금 며느리의 제사 노동은 비용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사랑과 효도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무보수 노동이다. 공영추모공원이 그 역할을 복지 서비스로 대신하는 순간, 그 노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비가시적 노동의 가시화.
세 번째. 지역경제 365일 활성화다.
그리고 여기서 이 모델의 가장 중요한 숫자가 등장한다. 365다.
가족들이 기일에 지역 공영추모공원을 방문하고, 추모 후 인근 식당에서 식사한다. 1월 1일에 기일이 있는 가정, 1월 2일에 기일이 있는 가정, 이렇게 12월 31일까지. 전국민의 기일이 365일에 분산되면 지역 식당의 손님도 365일에 분산된다. 명절처럼 폭발적으로 집중된 소비가 아니라, 365일 매일 꾸준히 발생하는 안정적 지역 소비다. 식당은 명절 대목과 비수기의 극단적 변동 없이 연중 안정적 수요를 갖게 된다. 행정안전부가 2021년 지정한 인구감소지역은 89곳에 이른다. 이 지역들은 청년 인구 유출, 고령화, 세수 감소라는 삼중 위기에 처해 있다. 지자체마다 출산 지원금, 귀농·귀촌 혜택, 청년 주거 지원 등 온갖 방법으로 인구를 유치하려 하고 있다. 공영추모공원은 이 인구 유치 경쟁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주민등록 이전이 아니더라도, 기일마다 찾아오는 가족들이 만들어내는 생활인구와 안정적 소비는 지자체에게 실질적 자원이 된다.
네 번째. 추모 시설 민주화다.
지금 국공립 수목장림은 다섯 곳뿐이고 대부분 포화 상태다. 사설 수목장림은 최대 1억 원에 이른다. 17회에서 살펴봤듯 재벌 가문의 추도식과 봉안당 앞 혼자 마시는 소주가 같은 사회 안에 공존한다. 기억하는 방식이 가진 것에 따라 달라진다.
공영추모공원은 전입신고라는 보편적 행정 행위에 연동된다. 재벌이든 1인가구든, 전입신고를 하면 같은 서비스를 받는다. 의례의 민주화다.
이것이 전통과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닮았는가
이 모델은 언뜻 전통 제사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구조를 들여다보면 의외의 연속성이 있다.
조선시대에 제례는 국가가 관장했다. 예조(禮曹)가 제례의 형식과 절차를 규정했고, 신분에 따라 제례의 규모를 달리했다. 국가가 의례의 인프라를 제공하고 관리했다. 공영추모공원 모델에서 지자체가 예조의 역할을 한다. 추모 공간을 제공하고, 기일을 관리하고, 의례의 인프라를 운영한다. 형식은 현대적이지만 구조는 오히려 전통에 가깝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조선의 제례 체계는 계층에 따라 달랐다. 사대부는 4대 봉사, 가묘 설치, 종법 질서를 갖췄다. 평민은 부모에 한해서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의례의 규모가 신분을 표현했다. 공영추모공원 모델은 전입신고라는 보편적 행정에 연동된다. 재벌이든 1인가구든, 전입신고를 하면 같은 서비스를 받는다. 신분의 차이가 없다. 이것이 조선의 제례 체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고, 17회에서 분석한 의례의 귀족화에 맞서는 방향이다.
공영추모공원은 의례의 민주화다. 재벌 가문만이 할 수 있는 스펙터클한 추도식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기일에 가족과 함께 고인을 기억하고 함께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시스템. 규모와 화려함이 아니라, 접근 가능성이 의례의 기준이 되는 것.
3장의 교회 분석과 연결하면
이 연재의 3장에서 우리는 교회가 이미 이 방향을 선점했다는 것을 분석했다. 명절 전날 기도회. 기일에 예배. 집 안의 제사를 교회라는 공적 공간으로 이동시킨 것. 그것이 여성들에게 출구가 됐다. 제사 대신 기도회에 간다 — 정당한 이유가 생겼다. 이 연재의 제목이 "제사 대신 예배를 선택한 여자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교회는 신앙을 전제한다. 기독교 신자만 이 출구를 이용할 수 있다. 무종교인은 이 구조에 접근하지 못한다.
공영추모공원은 신앙 중립이다. 전입신고를 한 모든 주민이 이용할 수 있다. 불교 신자도, 무종교인도, 개신교 신자도. 교회가 신앙을 조건으로 제공하던 것을, 지자체가 시민권을 조건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이 연재의 제목 — "제사 대신 예배를 선택한 여자들" — 의 의미가 여기서 완성된다. 여성들은 제사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회라는 출구를 찾았다. 그 출구는 특정 신앙을 요구했다. 공영추모공원은 신앙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출구다. 예배 대신 추모를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 "제사 대신 예배를 선택한 여자들"이 다음 세대에서는 "제사 대신 추모를 선택한 시민들"이 되는 것이다.
[데닛의 이론 — Cui Bono, 이 모델은 누구에게 이득인가]
데닛의 밈 이론을 의례에 확장하면, 의례는 숙주에게 이득이 있을 때 살아남는다. 이 모델에서 이득을 보는 주체는 누구인가.
며느리. 기일 제사 음식 준비 노동에서 해방된다. 지자체의 복지 서비스가 그 노동을 대신한다.
남성 가장. 제사를 주관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해방된다. 기일 등록과 비용 납부라는 행정 행위가 의무를 대체한다.
가족 전체. 기일에 함께 모인다는 본질은 유지된다. 음식 준비 갈등 없이, 고인을 기억하는 시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추모 후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남는다.
지자체. 인구 데이터와 연동된 생활인구가 생긴다. 365일 분산된 방문이 지역 경제에 안정적으로 기여한다.
고인. 형식적 제사상보다 실제 가족이 모여 기억하는 추모를 받는다. 후손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기억된다.
데닛의 언어로 말하면, 이 의례는 수행하는 모든 주체에게 이득이다. 상리공생자 의례의 조건을 충족한다. 밈이 살아남는 이유가 명확하다.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의 집 제사는 누구에게 이득인가. 가부장제적 가문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데 이득이었다. 그 위계가 해체되면서 제사도 해체되고 있다. 새로운 의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문의 위계가 아니라 가족의 연결을, 며느리 노동이 아니라 모두의 기억을 중심에 두는 의례.
[지갈라타스의 렌즈 — 의례가 기능하려면]
코네티컷대 인지인류학자 지갈라타스는 의례의 세 가지 핵심 기능을 제시한다. 집단 결속, 정체성 부여, 불안 완화다.
공영추모공원 모델이 이 세 가지를 충족하는가.
집단 결속: 기일에 가족이 같은 장소에 모인다는 것은 유지된다. 음식 준비 갈등 없이 모임 자체에 집중한다. 결속의 방해 요인이 제거되고, 결속의 본질이 남는다. 추모 후 인근 식당에서의 식사는 그 결속을 한 번 더 강화한다.
정체성 부여: 나는 이 고인의 자녀이고, 이 가족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기일마다 확인한다. 장소가 선산에서 공영추모공원으로 바뀌어도, 그 확인의 행위는 남는다. 오히려 지자체가 보내는 기일 문자메시지가 그 정체성을 주기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불안 완화: 고인이 지역사회가 관리하는 공간에 안치되어 있고, 기일마다 지자체가 상기시켜 준다는 것 — 이것이 고인을 잊지 않겠다는 사회적 약속이 된다. 개인이 혼자 감당하던 추모가 공적 시스템에 의해 지지된다는 안도감. 전입신고 연동이라는 행정적 등록이 추모를 잊지 않겠다는 사회 계약이 된다.
지갈라타스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다. 의례는 공동으로 수행될 때 그 기능이 강화된다. 혼자 하는 의례보다 함께 하는 의례가 결속력을 더 강하게 만든다. 공영추모공원에서 가족이 함께 고인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을 같은 지역 사회 안에서 한다는 것 — 이것이 의례의 사회적 기능을 온전히 살려내는 방식이다.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이 모든 논의가 순전한 상상만은 아니다. 공영추모공원 시스템은 아직 없지만, 개인 차원에서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기일에 우리 가족이 봉안당 다녀오고, 근처 식당에서 아버지 좋아하시던 음식 먹었다. 이게 우리 가족의 제사야. 제사상 차릴 필요도 없고, 새벽에 절할 필요도 없고. 아버지도 이게 더 좋으셨을 것 같다." 수천 개의 공감이 달렸다.
이 가족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공영추모공원 모델의 핵심이다. 봉안당 방문, 인근 식당 식사, 가족 모임. 인프라만 공적으로 제공된다면 — 지자체가 기일을 알려주고, 추모 공간을 준비해주고, 상차림을 제공한다면 — 수천만 명이 같은 방식으로 할 수 있다.
또 다른 글도 있다. 60대 여성이 올린 글이다. "40년 동안 제사상 차렸는데 이제는 못 하겠다. 며느리한테 시키기는 더 싫고. 기일에 다 같이 식당 가서 아버지 좋아하시던 걸 먹기로 했다. 이게 우리 가족만의 제사가 된 것 같다." 댓글에 "그게 더 따뜻하다",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다"라는 반응이 달렸다.
이 변화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공영추모공원은 이 변화를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방향이 고인에 대한 존중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다. 지금의 집 제사에서 고인은 정작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며느리는 음식 준비에 지치고, 가족들은 갈등하고, 정작 고인을 기억하는 시간은 짧다. 공영추모공원에서 가족이 부담 없이 모여, 오롯이 고인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 — 그것이 더 진정한 추모일 수 있다. 형식이 아니라 기억이 중심이 되는 의례.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30대 남성이 이런 글을 올렸다. "제사 지낼 때 솔직히 아버지 생각보다 음식 차리는 게 더 머릿속에 많았다. 올해는 기일에 봉안당 가서 아버지 이야기만 했다. 어릴 때 추억,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것들. 처음으로 제사다운 제사를 한 것 같았다." 이 글에 수천 개의 공감이 달렸다. 이것이 추모의 본질이다. 시스템이 그 본질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4장의 결론 — 의례의 분기점
4장은 세 회차에 걸쳐 하나의 구조를 탐색했다.
16회: 제사가 사라지고 있다. 화장률 92.9%, 1인가구 36.1%, 합계출산율 0.72명. 제사를 지탱하던 세 가지 조건 — 모일 수 있는 가족, 주관할 장남, 고정된 공간 — 이 동시에 붕괴하고 있다. 제사는 조용히 소멸하고 있다.
17회: 그 자리를 스펙터클이 일부 채우고 있다. 이건희 선대회장 추도식에 전·현직 경영진 150여 명이 모이고, 세계적 연주자가 공연하고, 해외 미술관에 컬렉션이 전시된다. 의례의 귀족화. 대다수에게 의례의 공백이 생기는 동안, 최상층의 의례는 오히려 강화된다. Cui Bono — 누구에게 이득인가. 특정 가문이다.
18회: 의례의 공백을 채울 방향이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은 Cui Bono의 답을 바꾼다. 화장이 만들어낸 유골의 이동성, 전입신고라는 행정 시스템, 지자체의 인구 유치 필요 — 이 세 가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추모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다.
전입신고 시 기일 등록. 기일 당일 지자체 문자 발송. 공영추모공원에서 복지 서비스로 합동 추모. 추모 후 인근 식당 식사.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이 단순한 구조가 해결하는 것들:
첫째, 추석·설 귀성 대란. 전국민 동시 이동의 원인인 '고정된 장소의 고인'이 '산 자가 사는 지역의 고인'으로 바뀐다. 기일이 365일에 분산되면 귀성도 분산된다.
둘째, 여성 노동. 집에서 제사상을 차리지 않는다. 지자체가 복지 서비스로 상차림을 제공한다. 며느리의 비가시적 노동이 공적 서비스로 대체된다.
셋째, 지역경제. 365일 매일 기일 방문 가족들이 인근 식당을 이용한다. 명절 특수 없이 연중 안정적 소비가 생긴다.
넷째, 추모 민주화. 전입신고라는 보편적 행정에 연동된 추모 서비스. 재벌이든 1인가구든 동등하게 접근한다.
이 제안이 지금 당장 현실이 되기는 어렵다. 법적·행정적 정비가 필요하다. 전입신고에 기일 등록 항목을 추가하려면 장사 등에 관한 법률 개정이 필요할 것이다. 지자체의 예산과 운영 역량도 필요하다. 기일을 국가 행정 시스템에 등록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향으로서의 타당성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실들이 뒷받침한다. 화장률 92.9%가 이미 현실이고, 지자체가 인구 감소에 사활을 거는 것도 이미 현실이며, 여성들이 제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수십 년에 걸쳐 움직여온 것도 이미 현실이다. 기일에 봉안당 다녀오고 식당에서 아버지 좋아하시던 음식 먹는 가족들이 이미 있다. 이 현실들이 이미 이 방향을 향하고 있다. 시스템이 그것을 지원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5장에서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간다. 왜 인간은 의례를 만드는가. 제사가 사라지는 시대에도, 가족이 모여 함께 고인을 기억하고 싶다는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일에 봉안당을 찾아가고, 식당에서 아버지 좋아하시던 음식을 먹고, 아버지 사진 앞에 막걸리를 따르는 — 이 욕구는 어디서 오는가. 지갈라타스가 진화와 인지의 언어로 그 답을 탐색한다.
그리고 4장에서 탐색한 질문 — 의례의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 에 이어, 5장의 마지막 질문이 기다린다. 교회도 불교도 동시에 수축하고, 제사도 사라지고, 의례의 전면적 공백이 찾아오는 시대에, 그 빈자리를 누가 어떻게 채울 것인가. 그것이 이 연재의 마지막 질문이다.
공영추모공원은 그 빈자리를 채우는 하나의 방향이다. 전통적 종교 기관도 아니고, 민간 시장도 아닌, 지자체라는 공적 기관이 추모의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가능하다면, 의례의 공백은 민주적으로 채워질 수 있다. 재벌 가문처럼 스펙터클하게도, 혼자 봉안당 앞에서 소주 한 잔으로도 아닌 — 모든 시민이 기일마다 가족과 함께 고인을 기억할 수 있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