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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모 비아토르 Dec 01. 2022

저 사람은 왜 그럴까?

뭔가를 보면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먼저 밖을 보기 마련이다. 나를 보지 못하고 내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부터 본다. 저 사람은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은 참 많이도 했다. 시간이 흘러 주어진 환경과 관계가 계속해서 바뀔 때마다 ‘저 사람은 왜 그럴까? 도통 이해가 안 되네.’라는 의문을 가졌다. 


오늘에서야 ‘불안’에 대한 글을 쓰며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쭉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저 사람에 대해 아주 조금 이해해보려 한다. 학교, 여러 직장을 다니면서 내겐 너무 어렵고 불편한 사람이 꼭 한 명은 있었다. 이해하면 할수록 더 미궁에 빠져들었고, 대충 거리두기를 하거나 점점 멀어지는 관계가 되었다. 직장생활에서 어쩔 수 없이 업무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되면 이건 정말 해결할 수 없는 숙제처럼 덩치 큰 스트레스로 와닿았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불안’이라는 감정을 미성숙하게 다룰 때 자신과 타인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여기서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저 사람만 포함되지 않는다. 나 역시 과거 미성숙한 감정처리로 인해 타인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과거 인연 중 불안을 미성숙하게 드러냈던 사람의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불안’은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황을 통제하려 한다. 그것이 타자에게 가해지면 숨통이 조이고 뭔가 압박을 받는 느낌을 받는다. 

둘째, ‘불안’은 채찍질을 하게 한다. 이걸 안 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에 의해 타인을 나무라고 재촉한다. 

셋째, ‘불안’은 화를 낸다. 불안에 시달리다 보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갑자기 화를 낸다. 타자는 ‘저 사람 갑자기 왜 이러지?’라는 생각과 함께 ‘저 사람 이상해.’로 마무리된다. 내재되어 있는 불안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언제 어떻게 표면적으로 드러날지 알 수 없다.


위에 열거된 불안의 형태를 띤 사람들을 만났다. 정말 숨 막히고 힘들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나는 자기 정당화와 합리화를 붙여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아마도 저런 유형의 사람들을 표면적인 것만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좁은 시야가 한몫했다. 상황과 사람이 바뀌면 해결될 줄 알았던 불안의 형태를 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유형의 사람이 내 주변에 없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욕심일 수 있다. 


왜일까? 내가 바로 불안의 유형을 띤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찰을 한지는 얼마 안 되었다. 내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다. 나는 마땅히 할 말을 한 것뿐이고, 상대가 걱정되어서 한 말이라고 한 것이 내 불안을 상대에게 투사하는 꼴이 되었다. 여기서 투사란 자신의 성격, 감정, 행동 따위를 스스로 납득할 수 없거나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 그것을 다른 것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그런 방어 기제이다.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웃기지 않은가? 상대방의 불안에 대해선 대역 죄인처럼 비판하면서 그 기준을 나에게 들이대었을 때 나는 얼마나 관대하고 포용적이었던가?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가정에서 일은 벌어지고 있다. 나의 불안으로 인해 두 자녀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잘 안다. 말은 “공부 못해도 건강하게 자라면 된다.” 하면서 그 뒤에 붙는 잔소리들은 끝이 없다. “정직해라. 약속을 지켜라. 자기 할 일은 하고 놀아라. 책상 정리해라. 뛰지 마라. 너는 장난이어도 상대가 싫은 내색을 하면 그건 장난이 아니라 폭력이니 하지 마라. 놀 땐 신나게 놀고, 할 땐 제대로 해라.” 이러한 잔소리는 내면의 불안에서 오는 것이다. 


어떤 불안이냐? “우리 아이들이 내가 생각하는 기준의 아이들로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이다. 아이들에게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설명에 또 부연설명을 붙여서 결국엔 아무 말 대잔치를 늘어놓는다. 그런 장황한 말을 아이들은 받아들일까? 요점 없는 그 말을 누가 이해할까? 그저 내 불안을 토해내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오늘 지난 시간 나에게 불안을 투사하여 힘들게 했던 인간관계를 돌아보았다. 나 역시 불안을 내 주변 사람들에게 투사하여 힘들게 했던 상황도 보았다. 결국 너도 나도 미완성된 존재이다. 너도 서툰 것처럼 나 역시 서툴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툰 자신과 대면하고 이해하고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더 나아가 취약한 자신을 변화시키며 점점 더 성장하고 완성되어 나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나의 불안을 자녀들에게 투사하지 않기 위해 마음속으로 외친다. “내 불안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자. 아이들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 아이들에게 잔소리 좀 줄이자.” 미처 나 자신을 보지 못할 때는 내 주변의 모든 게 문제 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다. 문제 꺼리라고 보는 내가 본질적으로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 불안하다. 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쉽사리 흔들리고 넘어진다. 그런 나를 인정한다. 내가 그런 것처럼 타자도 완전하지 않고 불안하고 흔들리고 넘어지는 존재이다. 그런 타자도 인정해주자. 취약한 나와 타자를 끌어안기로 하자.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오늘도 불안과 대면하기로 했다. 불안을 남에게 투사하지 말자. 불안은 내 안에 있기에 바라보고 관찰하면서 함께 걸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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