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빠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가득 받을 때쯤 감기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목과 코의 화끈거림으로 시작해서 기침, 콧물로 증상이 발전되었다. 두 번의 병원진료와 8일간의 약복용에도 점점 더 나빠졌다. 세 번째 진료에서 급성축농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감기가 장기화되면 축농증이 올 수 있다며 당분간 항생제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4일 치 약을 받았고 코맹맹이 목소리가 나온다.
코는 막히고 눈은 침침하고 멍하다 못해 몽롱하고 다른 사람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흐리멍덩하고 흐릿한 무채색상태였다.
몸은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실수가 잦았고 기분이 가라앉고 무기력했다. 마치 그녀의 몸이 땅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진짜 먼지처럼 사라지면 어떻게 하지? 먼지가 되어 하늘을 가볍게 날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요즘 감기로 인해 정상적이지 않은 몸과 마음상태가 계속되었다. 직장과 가정의 일상은 유지되었다. 늘 그랬었다. 아파도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했고, 균형을 잃어선 안 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대신 일상에서 힘을 빼고 속도를 늦추었다. 힘을 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프니까 힘이 없어 힘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힘이 없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편안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는 말을 그냥 스치듯 지나쳤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잘 들리지도 않았다. 최소한 에너지로 최소한의 활동만 한다. 집에 가서도 가족들의 저녁식사만 차리고 그냥 쉰다. 회사에서는 말이 없어졌다. 다만 점심시간에는 식사를 하고 직장동료들과 산책시간을 가진다. 새벽에는 차가운 바람이지만 한낮 공기는 따스했고 걷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한다.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둘 다 좋아한다. 젊을 때는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면 점차 나이 들수록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고 질문하는 것을 좋아한다. 힘이 없고 아플 때는 더더욱 듣는 시간이 더 좋다.
감기를 앓은 지 9일째다. 감기 정도의 아픔은 크게 아픈 것도 아니라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몸이 불편하니 일상이 더 단순해졌다. 생각도 단순해졌고 명료한 감각에서 멍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도 적응되었다.
힘이 빠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힘이 들어가고 분주할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무엇이 보일까? 그녀 자신이 보인다. 평소 얼마나 힘이 들어간 삶을 살았는지 보인다. 굳이 그렇게까지 애쓰며 살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주위 사람들이 보인다.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처럼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모습을 천천히 순간포착을 하게 된다. 사는 게 다들 비슷하다고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다 각자의 기질과 다른 태도로 각자의 속도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마음공간 속에서 가상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 무조건 좋고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요즘은 하루의 시간이 더디고 느리다. 토끼가 아닌 거북이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 느리지만 꾸준히 오늘 하루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람관계 속에서 힘들었던 마음도 무뎌지고 그 문제와 거리 두기를 하고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성경 속 상황이 떠올랐다.
다윗왕이 있었다. 다윗왕에게는 압살롬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왕을 배반하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때 다윗왕은 압살롬으로부터 도망을 친다. 도망을 치는 와중에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하는 모습을 본다. 옆에서 신하들이 시므이를 죽이자고 한다. 하지만 다윗왕은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하는 것이라 놔두라 하고 시므이의 행동이 잘못됐다면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하며 그 행동을 놔둔다. 다윗은 왕의 위치라 신하를 시켜서 그 자리에서 시므이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었으나 결코 죽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며 최근에 그녀에게 일어난 상황을 재해석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들로 인해 일희일비하지 말며 잠잠히 그녀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마음을 다 헤아려주기를 바라지 말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드러나게 되고,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사람과 환경에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조용히 기도의 시간을 더 가지려고 한다.
신기하게도 아프니까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그녀 스스로를 돌아볼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녀 앞에 놓인 상황은 여전히 동일하다. 그러나 그 상황을 바라보는 그녀의 태도는 바뀌고 있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 힘을 뺄 수밖에 없는 아픔의 시간도 필요하다. 조금은 불편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그녀 자신을 관찰하고 돌아보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라 다행이다.
인생의 여정은 계속된다. 그 여정이 예상치 못한 길로 가게 될지라도 그 길에서 뜻밖의 새로운 길이 열리고 배움과 성장의 시간이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