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얼굴

by 범고래

여름이다.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은 연인처럼 여름은 변해버렸다.


사정없이 내리꽂는 태양 빛에 눈이 멀어 버릴 듯하고

펄펄 끓는 하늘과 땅이 모든 것들을 태워버릴 것만 같은


질투에 눈이 먼 그리스 신화 속 헤라다.



내가 변한 건지 여름이 변한 건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슬픈 건지.



어릴 적 여름은 순수하고 맑은 소녀 같았다. ​



동네 조무래기들은 여름만 되면 또랑에서 퐁당거리며 놀았다. 난간도 없이 툭 걸치듯 만들어진 시멘트 다리 위에 올라가 퍼렇게 흐르는 또랑물 위로 뛰어내리며 담력을 키웠다.

나는 너무 무서워 친구의 작은 손을 꼭 붙잡고도 눈을 감고 뛰어내렸다.

무서웠어도 스릴 넘치는 재미가 자꾸만 뛰어내리게 만들었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그렇게 짜릿하고 재미있는 경험은 다시 해보지 못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름날의 추억이었다.



젊은 날의 여름은 뭐였을까.



휘몰아치는 토네이도가 내 안에 있었고 나는 그걸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것 같다.


반항하듯 갑작스레 퍼부어 내리던 폭풍 같은 소나기도.


뜨거운 태양도 좋았고 이마에 흘러내리던 끈적한 땀도 청춘의 즙인 것만 같았다.


줄 풀린 망아지처럼 쏘다니며 어딘가에 있을 젊음의 여드름을 터트려 줄 뾰족한 송곳을 찾아 헤맸다.

임계점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에너지와 명치끝에서부터 뭉글 거리며 솟아오르는 흥분과 설렘의 도파민을 주체하지 못해 하이에나처럼 욕망 가득한 눈으로 킁킁거리며 다녔었다.


그렇게 황당하게 그리고 허무맹랑하게 아름답던 청춘은 까맣게 그을린 피부 위로 어느새 덧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름은 청춘이었고 청춘은 여름이었다.


그 안엔 모든 뜨겁고 차가운 것들이 다 있었다.

사랑도 이별도 아픔도 불안도 불확실한 모든 것들도 다 .


짧고 강렬했던 여름의 기억이 바다 위에 드리워진 석양 그림자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풋복숭아 같은 사랑이 떨어져 나무 밑에 뒹굴고

풍선 같은 심장이 터질 듯 해 숨 막히던 시절이었다. 첫사랑이 머물고 그리움이 피부를 뚫고 여기저기 솟아올라 잠 못 들던 어린 날 그 여름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너무나 아득하기만 하다.


오늘 여기 여름의 얼굴이 이렇게 또렷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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