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잘못된 선택
생일 선물을 고르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일단 생일을 맞은 사람을 떠올리며 그의 취향과 성격을 고려하고 이왕이면 받았을 때 좋아했으면 하는 욕심도 슬쩍 얹어 고르게 된다.
매년 되풀이되는 일이라 갈수록 상상력이 고갈되어 정성이나 아이디어보다는 돈으로 채우려는 게으름이 자리를 잡지만 그 또한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다.
학창시절 친구들은 서로의 생일을 챙기고 선물도 주고 받았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의 호주머니는 변변치 못했고 특히 내 호주머니는 더욱 더 빈곤했다.
가난한 형편에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여 집을 떠나 살던 나는 모든 면에서 절약하며 생활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나이에 걸맞게 온갖 욕망이 다 들끓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 시절 유행하던 스타일의 옷과 신발 장신구를 하고 다니는 친구들의 멋진 모습을 보며 많이 부러웠고 여유있게 용돈을 타서 쓰는 주변 아이들을 보며 크게 위화감을 느꼈다.
먹고 싶고 사고 싶은 것들을 억누르며 수도승처럼 살던 나는 친한 친구의 생일을 맞이하여 조금씩 돈을 모았고 그 돈에 걸맞는 노란 레이스팬티 한장을 샀다. 약간의 장난과 위트를 섞어 선물을 준비했고 크게 즐거워할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 역시도 기분이 좋았다.
내일이면 친구의 생일이었고 우리는 축하겸 밥을 같이 먹기로 하고 식당에서 만나기로 미리 약속을 했다.
그런데 마음이 자꾸만 흔들렸다.
나조차도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예쁜 속옷이었기에 선물이 무척 탐이 났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고 유치하지만 그 때 나의 결핍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했고 굶주린 사자와 같았다. 결국 난 그 속옷을 내가 갖기로 마음을 바꾸고 급히 허접한 그리고 흔한 필통을 생일선물로 사서 대체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만나서 축하를 했고 각자 가져 온 선물을 개봉했다.
다른 친구에 비해서 성의가 없던 내 선물이 친구의 마음을 심하게 긁었는지 친구는 아무 말없이 밥만 먹었다.
이래저래 돈을 다 써버린 나는 하필 그 때 밥값이 없었고 그 사실을 안 친구는 버럭 화를 내며 돈도 없으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냐며 다른 친구 앞에서 심한 모욕을 주었다.
평소에 그런 친구가 아니었기에 나는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의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여전히 생생하다.
그 날 난 집에 돌아와 상처받은 나를 들여다 보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처참한 자존감이 내 것이 아니었으면 할 만큼 비참했다.
난 그 친구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 친구는 외롭고 힘들던 나의 처지를 눈치채고 위로해 주었고 어려울 때 같이 있어주려 한 유일한 친구였다.
나 같았어도 내가 미웠고 싫었을 것 같다.
남의 고통과 상처를 언제까지 어디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핍된 자의 욕망에 들끓는 눈빛을 본 적이 있다면 얼마나 가까이 하기 부담스러운지 이해할 것이다.
그 당시 배고픈 야수의 모습으로 어슬렁거리던 나를 참아주고 가진 걸 나눠주던 친구도 그만 진저리가 났던 건 아닐까
그저 그 시절의 나의 상황과 그 때의 나의 선택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나는 또한 나를 이해할 수 있었고 불쌍했고 그런 내 마음과 괴로움을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 후로 친구는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는지 나의 많은 두드림과 노력에도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그 친구는 불행히도 급성난치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병문안을 갔을 때 멸균실 안에 힘없이 누워있던 친구의 하얀 얼굴이 떠오른다. 친구의 달갑지 않은 표정과 외면에도 나는 마음이 무척 아팠다.
죽을 때까지 나를 용서하지 못한 친구가 지금 쯤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다시 만난다면 꼭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댈 곳 없던 시절 잠시라도 내 곁에 진정한 친구로 있어줘서 고마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