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주는 선물
알람 소리가 울렸다. 눈을 뜬 순간 낯선 천장과 파란색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어? 여기가 어디지...
아 맞다. 난 여행 중이지.
튀르키에는 그리스 옆에 사이좋게 붙어있는 나라고 두 나라는 모두 내가 간절히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웃나라들이 그러듯이 사이가 썩 좋은 관계는 아니라고 한다.
드디어 나는 오랫동안 와보고 싶었던 튀르키에 그것도 카파도키아 동굴호텔에서 잠을 깼다.
티브이 여행 프로를 보고 꼭 한번 동굴호텔에서 자 봐야지 하고 생각만 했었는데 진짜로 꿈이 실현된 순간이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던 동굴 속 호텔은 벽과 천장만 석회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는 일반 호텔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좀 비싼 곳은 다르려나. 쩝쩝.
난 잽싸게 일어나 세수를 하고 따뜻하게 옷을 껴입은 후 미리 준비해 온 털모자도 뒤집어썼다.
차를 타고 탑승 장소로 이동하는 길은 어둠이 짙고 차가운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그곳은 멀리서도 어둠 속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쉭쉭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넓은 평원 군데군데 놓여있었다. 상상 속의 거대한 괴물이 입에서 불을 품으며 엎드려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씩 땅에 널브러진 채 몸피를 키우는 열기구 풍선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광대한 사막에서 군데군데 자리 잡고 밤을 보내는 유목민의 텐트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외계행성의 군락지 같기도 했다.
곧이어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거대한 풍선들이 솟아올랐고 우리가 탈 풍선도 준비가 되었다. 풍선에 매달린 바구니는 등나무 줄기를 촘촘히 엮어 직육면체 모양으로 만들고 무게를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 열 개의 칸을 만들어 각각 4명씩 타도록 짜여있었다.
우리는 높은 바구니 벽을 낑낑거리며 넘어가 좁은 공간에 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보는 열기구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잠시 후 풍선은 슉슉하는 불기둥의 응원을 받으며 살그머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서는 아침 해가 붉은 기운을 퍼트리며 얼굴을 밀어 올렸다.
" 귀나이든(아침인사)"
나는 조그맣게 카파도키아의 아침해에 인사를 했다.
해는 진한 먹색 기운을 서서히 밀어냈고 하늘은 청량한 푸른색으로 치마폭을 펼쳤다. 아래쪽으로는 황량한 골짜기와 석회동굴이 점점이 박힌 동굴집들 그리고 이런저런 형상을 닮은 침식지형의 모양들이 드러났다.
언젠가 사진에서 본 화성의 모습을 닮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의 구릉들, 중간중간 떠오르는 열기구들을 보려고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개미 같다. 저 밑에서 올려다보는 모습도 장관이겠지. 오늘은 200 여기의 풍선들이 떠오른다고 했으니까.
바람과 날씨의 영향을 예민하게 받는 열기구는 예약을 했어도 타는 순간까지 탑승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여행을 하는 며칠 내내 비바람이 몰아치고 일부 구간에서는 홍수가 나서 길을 빙 둘러 온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꽤 순발력 있는 운을 만난 듯했다.
그렇게 깃털처럼 작은 힘에도 너울거리는 운은 내 삶에 내려앉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여기 카파도키아에서만큼은 상당히 관대한 운을 만났다. 이미 만났던 여러 팀은 날씨가 궂어 타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열기구를 타러 여섯 번이나 왔지만 결국 타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헐~ 12시간이나 비행기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야 되는 여행을 여섯 번씩이나... 허탕을 치다니.
참 운이 나쁜 사람이다. 원래 뭐든 간절히 원하면 할수록 그것은 도망 다니는 경향이 있다. (경험에서 우러난 말이다.) 오히려 무심할 때 그것은 살그머니 옆에 와 알랑거리곤 한다. 약을 올린다고나 할까. (이 역시 경험에서 우러난 말.)
어느새 800미터까지 올라갔다. 광활한 하늘 여기저기에서 둥실둥실 떠 있는 색색깔의 예쁜 풍선들이 햇빛을 받아 화사하게 반짝였다. 꽃비가 내리는 건가 눈을 비비고 봐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풍경이다. 나는 이런 비현실적인 순간을 영원히 붙들어두고 싶어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으며 그 풍경 속에 나를 집어넣었다.
누군가 그랬는데...
우리가 다녀간 모든 곳에는 우리의 영혼이 조금씩 남겨진다고.
여기 카파도키아 하늘에도 내 영혼이 일부 남아 구름과 햇살과 기분 좋은 공기와 섞여 흘러 다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가슴 한구석에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우울과 불안이 엷어지고 맑은 기운이 가득 찬다.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내 안에만 갇혀 엎치락뒤치락했던 소심한 내가 오랜만에 크게 웃음을 짓는다. 평생 더 이상의 소원이 없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