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데(지중해와 아폴론 신전)

by 범고래



여름이 우기인 우리와 달리 튀르키예는 겨울이 우기라고 한다. 어제저녁에는 거센 바람에 야자나무가 휘어질 듯 일제히 기울고 하늘은 검푸른 구름이 두껍게 덮여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밤새 귓가에는 삐걱대는 바람 소리가 머물러 있었다. 꿈과 현실의 중간지점에서 오락가락하던 나는 비바람을 맞으며 노숙이라도 한 듯 몸이 무거웠다

시데로 향하는 길은 넓고 삭막한 풍경 속에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차창을 갈랐다.
축축하고 황량한 풍경.

'폭풍의 언덕' 속 히스클리프가 저 언덕 위에 서 있을 것만 같다.

하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사랑의 장소를 찾아가는 날에 이런 폭풍우가...
제멋대로 나대는 날씨가 마음에 안 들어 나는 눈을 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설핏 잠이 들었나 보다.

드디어 도착.
다행히 비는 그치고 거센 바람만 불어 우산을 쓸 필요는 없었다. 아기자기한 가게가 즐비한 골목길을 가로질러 우리는 지중해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걸어갔다. 성수기에 바짝 화려했던 골목상점들은 지금은 거의가 문을 닫고 그 흔적만 쓸쓸히 남아 있었다.




조금 걸어가니 바다가 보였다. 잔뜩 성이 난 회녹색 바닷물의 위협을 받으며 고대의 하얀 대리석 기둥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폴론 신전이다. 지중해 바다에 빠질 듯 서있는 신전은 해 질 무렵 석양을 받으면 비현실적인 풍경이 된다고 하는데 나에겐 이미 그렇게 보였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 신전을 세웠다는 전설이 사실일 것만 같다. 신전을 이런 곳에 세우다니...

안개가 낀 것만 같은 대기는 눈을 비벼도 칙칙한 꿈속만 같고 미친 듯 발악하는 바닷물은 연신 얼굴 위로 분노의 침을 튀기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런 걸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순결하고 신성한, 압도적이고 난폭한 풍경 속에 내가 서 있다.



흥분과 설렘이 섞이고 허무와 기쁨이 슬픔이 섞이다니...
말은 너무 제한적이고 그 안에서만 표현하려니 풍선이 터질 듯 마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그냥 지구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운 좋게 지극한 아름다움을 봤다고 하자.

찰나적인 삶 속 찰나적인 풍경.


거센 바람결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사랑의 속삭임이 섞여 들려온 것 같다. 코 끝을 감도는 달콤한 향기는 클레오파트라의 것일까.

해변 안쪽으로 이어진 건축물은 아테나 신전이라고 한다. 2천 년을 건너 뿌리내린 나무처럼 아직도 건재하다. 일부 부서지고 반쯤 남아 있는 신전이 오랜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장수만 같다.




시데는 그 시절 로마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해상무역항으로 번성했고 부유한 귀족들의 화려한 휴양지였다고 한다. 번성했던 그 시절은 시간에 풍화되고 색이 다 바래버렸다. 고적하고 쓸쓸한 동네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이곳의 기억과 냄새를 최대한 저장했다.



그다음으로 우리는 아스펜도스에 갔다. 여기는 가장 잘 보존된 로마식 원형경기장으로 지금도 세계적인 공연이 자주 열린다고 한다. 아무런 음향기기 없이도 자연적으로 공명이 되어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공연을 하고 싶어 한다나.



옛날에는 맹수를 풀어놓고 사냥을 하거나 포로나 노예들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소였다. 그런 잔인한 살육을 구경거리로 즐길 수 있었다니. 인간의 내면은 예나 지금이나 미스터리하다.

보존 상태가 워낙 좋아서인지 왕이 앉았을 것 같은 좌석도 남아 있었고 또 경기장 가장자리로는 맹수나 검투사가 대기하다 등장하는 작은 공간도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영화'글래디에이터' 속 장면들이 생생하게 재현되는 기분이 들었다.



도시마다 원형경기장은 하나씩 지어졌고 거기서는 온갖 연극과 음악공연 시 낭송 그리고 정치 종교행사 등이 치러지며 도시의 문화공간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길고 지루한 삶 속 사람들의 욕망과 불만을 잠재우는 지도층의 정치적 술책 같은 것이었을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2천 년이 흘러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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