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 아이는 혼자 남겨졌다

묻어둔 기억과 마주하는 시간

by 그대로 박희룡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기억은 명확하지 않고 조각난 채 흩어져 있다. 조용했던 방에 비치던 오후의 햇살이나 거실에서 들려오던 부모님의 낮은 목소리와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떠오른다. 학교 복도에서 겪은 서러운 다툼과 혼자 참아야 했던 침묵의 순간들도 기억난다. 어른이 된 지금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며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어린 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것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자주 혼자라고 느꼈다. 집안이 시끄럽거나 교실 한복판에 있을 때도, 심지어 친구들과 웃고 있을 때조차 마음은 늘 외로웠다. 어른들 눈에는 그저 얌전한 아이로 보였겠지만, 내 안에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한 복잡한 감정들이 가득했다.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진실한 감정들은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나거나 가슴이 아플 정도로 슬퍼도 감정을 들키지 않게 꾹 눌러 참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 것만이 내가 배운 유일한 평화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내 감정을 참는 법을 배웠다. 울고 싶을 때 눈물을 삼켰고, 화가 날 때는 오히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기쁜 순간조차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괜찮아야 해, 누구에게도 폐를 끼쳐선 안 돼”라는 엄격한 규칙이 생겨났다. 이 규칙을 지키려 애쓰다 보니 마음은 점차 무뎌졌다. 어느새 진심이 담기지 않은 표정을 짓는 일이 당연해졌고, ‘괜찮은 척’하는 모습은 더 이상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내 원래 모습인 것처럼 내 삶에 깊이 몸에 배어버렸다.


나는 이제 기억 속의 아이를 불러내어 조용히 묻는다. “그때 너는 진심으로 무엇을 원했니?” 아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긴 침묵 끝에 마음 깊은 곳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냥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길 원했어요. 내 마음이 아프고 무섭다는 걸 있는 그대로 알아주길 바랐어요.” 그때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대단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저 내 존재를 인정받고, 내 감정이 존중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아무도 내 마음이 어떤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 때, 어린 나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그 시절 존중받지 못한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내면 깊숙한 곳에 쌓였다. 어린 날 느꼈던 서운함과 외로움은 그대로 남아서 어른이 된 지금의 나를 계속 힘들게 했다. 화가 나면 이유도 모른 채 나 자신부터 비난했고, 슬픈 일이 생기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 혼자 울었다. 내 마음속엔 늘 불안한 감정들이 가득했지만, 그것이 남들에게 들킬까 두려워 모른 척 덮어버리곤 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 있었다. 그 깊은 곳에는 여전히 혼자 남겨져 무서워하며 떨고 있던 어린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비로소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한다. 차가운 방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작은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따뜻하게 속삭여 본다. “괜찮아. 이제는 내가 네 이야기를 들어줄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 터질 것 같았던 그 마음을 내가 다 알아줄게.” 그 한마디에 굳게 닫혀 있던 아이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수십 년 동안 가슴에 쌓아둔 감정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나는 이제 그 감정들을 피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본다. 아이가 차마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내 눈을 통해 비로소 흐르기 시작한다.


친구와 다툰 후 텅 빈 놀이터에서 혼자 울고 있었던 날과 부모님의 무심한 한마디에 스스로를 탓했던 날이 떠오른다. 인정받고 싶어 밤새 애썼지만 오히려 차가운 무시를 당해 잠 못 이루었던 밤들도 있었다. 그때 느낀 감정들은 결코 유치하거나 가짜가 아닌, 당시의 내가 마주할 수 있었던 가장 선명하고도 솔직한 감정이었다. 그 아픈 기억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고, 서럽고 무서웠던 그 모든 마음은 도려내야 할 상처가 아니라 내가 끝까지 안아주고 지켜냈어야 할 소중한 나의 일부였다.


그동안 나는 어른이라는 이유로 과거를 외면한 채 앞만 보며 스스로를 몰아세웠고, 정작 내 안의 아픈 아이를 돌봐야 할 소중한 기회들을 번번이 놓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감정은 억누르고 없애야 할 적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어주는 가장 친절한 안내자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 안의 아이가 울고 있을 때 나는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어려웠으며, 그 울음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억지로 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마음 놓고 실컷 울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안아주는 것일 게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내 안의 아이와 나란히 앉아 떨리는 손을 꼭 잡으며 속삭인다. “무엇을 느껴도 괜찮아. 슬퍼해도 되고 소리 내어 화를 내도 돼. 그 모든 감정이 너의 소중한 부분이니까, 어떤 모습이든 나는 너를 절대 혼자 두지 않을게.” 그 말이 전달되는 순간, 억눌러온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아이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 내 안의 아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어른이 된 내가 가장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이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 속에 담긴 감정들을 마주하며 그것이 왜 지금까지 나를 힘들게 하는지 이해할 때, 나는 현재의 나와 더 단단하게 연결된다. 과거의 상처는 내 삶의 기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것이 나의 미래까지 결정하게 둘 필요는 없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 상처 입은 아이를 안아주는 일은 결국 현재의 나를 용서하는 일과 같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나와 함께 울고 화를 내며, 아픈 감정 곁에 머무는 법을 배운다. 이런 만남이 반복될수록 내 마음은 조금씩 여유를 되찾는다.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과정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온전히 살아가게 하는 큰 힘이 된다. 이 과정은 나 자신에게 ‘감정을 느낄 자유’를 주고, 내 마음의 진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새로운 시작이다.


나는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다시 떠올려 본다. 학교에서 느꼈던 소외감과 차마 말하지 못했던 순간들, 부모님과 겪은 날카로운 갈등이 차례로 생각난다. 오직 사랑받기 위해 나 자신을 깎아내며 버틴 시간들은 사실 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모든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소중한 경험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제는 그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불러본다. 슬픔, 분노, 외로움, 그리고 기쁨과 안도감.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마음속을 떠돌며 나를 괴롭히던 감정들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그렇게 모든 감정은 나의 일부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


어린 시절의 내가 밝아진 표정으로 지금의 내게 말을 건넨다. “이제야 내 마음을 제대로 봐주네. 기다려줘서 고마워.” 나는 그 아이의 작은 어깨를 다독이며 미소 짓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해 본다. 다시는 그 아이를 홀로 남겨두거나 외롭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말이다.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고, 화가 날 때는 그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단단한 보호자가 되어주겠다고 다짐해 본다.


오늘 나는 어린 시절의 나와 함께 울고 웃으며, 내 마음이 왜 이토록 불안하고 힘들었었는지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나를 주저앉게 만드는 시련이 아니라, 나를 더욱 단단하고 여유 있는 유연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변화의 과정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나지막이 속삭여 본다. “괜찮아, 너는 있는 그대로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네 감정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돼. 네가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서 있을 때,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그 약속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비로소 지금의 나와 단단하게 온전히 연결된다.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하고, 나 자신과 진심으로 화해한 경험은 내 안에서 아주 적지만 분명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붙잡혀 힘들어하던 아이가 아니다. 그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여 내일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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