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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영호 Jul 30. 2023

일 년 열두 곳

새 삶과 존재를 찾는 우주 여행의 시작



#1


새로운 삶을 꿈꾸다


2010년 12월 17일



2009년 한국에서 차를 가져가 일본에서 장기 캠핑 여행을 하며 내 가장 깊은 곳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됐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제 여행을 많이 가는 것만으로, 여행 중에 모험과 자유를 즐기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히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더 행복해지려면 분리되어 있는 여행과 삶을 하나로 합쳐야한다는 것을. 


그렇게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자 대번 욕망 뒤에 숨어있던 두려움이 올라왔다. 삶을 변화하는 일이 얼마나 큰 에너지와 고통을 요구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번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근본적, 아니 혁명에 가까운 변화다. 삶 위의 구조물을 건드리는 차원이 아닌 삶의 근간 자체를 바꿔야 하는 변화다.


하지만 나는 늘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며 현실이 아닌 꿈을 쫓는 인생을 살아왔고 그 어느 경우에라도 ,설사 죽음이 짙게 드리워져있다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내 안에서 올라온 두려움이 유독 크고 강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위험하고 고통스러워도 결국은 내가 그 길을 가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2009년 제주도



이제 여행으로는 만족 못하게 된 내가 새롭게 꿈꾸는 삶을 간단히 정리하면 계속 장소를 옮겨 다니 돼 지역별로 충분한 시간을 갖는 유목민적 삶이었다. 멀리에서 보면 여행이지만 가까이 보면 일상인 삶, 여행자인 동시에 로컬로 존재하는 삶, 그래서 모험성을 상징하는 넓이와 안정성을 상징하는 깊이를 다 같이 가져갈 수 있는 삶. 


일단 간단하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1년간 12곳에서 사는 삶을 상상해보았다. 한 지역에 한 달씩, 총 열두 곳에 일 년! 가슴이 뛰었다. 그래, 가만히 앉아서 머리 싸고 고민만 할 게 아니라 일 년간 몸으로 부딪혀가며 삶에 대한 실험을 해보자! 그렇게 한 계단 한 계단 확실히 밟아가며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보자!


그러자 베트남 달랏, 태국 매홍손, 네팔 포카라, 중국 따리와 리장 등 그동안 기회가 되면 꼭 가서 살고 싶었던 장소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또 마치 이것을 대비라도 한 듯 엄청 쌓아놓은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활용할 방법도 생각났다. 이렇게 해서 '일 년 열두 곳' 프로젝트는 순식간에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현실감을 갖게 됐다.





사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부터 꾸준히 유목민의 삶을 살았다. 대학 졸업 후 여행사에 취업한 1992년부터 7년간은 가이드로 일하며 세계 여러 곳에서 살았고, 1998년 한국에 돌아와 아쿠아를 운영한 10년간도 집이 아닌 카페에서 살며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내가 꿈꾸는 새로운 삶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번엔 무엇이 다른가? 전에는 어디 가서 살려면 일부터 찾아야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 하는 일(아쿠아 운영과 글쓰기)과 앞으로 할 일(라이프 가이드?)을 하면 된다. 살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냥 가서 살면 된다. 공간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또 독립적으로 하는 일이라 시간적으로도 매우 자유롭다. 


문득, 내가 새로운 차원의 노마드로 진화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가이드를 직업으로 넓은 세상을 탐험하던 나는 아날로그 노마드였고, 여행 작가로서 세계적인 휴양지와 리조트를 탐험하던 나는 디지털 노마드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한 새로운 종류의 노마드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도전이 가능해진 데에는 환경의 변화가 큰 역할을 했다. 우선 국가 간 장벽이 낮아졌고 인터넷으로 장소와 상관없이 세상과의 연결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으며 현실과 괴리된 판타지로서의 여행, 일상과 분리된 여행에 만족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다. 역사는 정착민의 시대에서 다시 유목민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삶은 단순히 내 욕망이 아닌, 세상이 내게 가리키는 방향인 건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삶의 변화를 모색하게 된 게 환경의 변화를 인식한 결과일 수 있다는 얘기다. 만약 내가 꿈꾸는 삶의 방향과 세상이 가리키는 방향이 같다면 새로운 삶은 꿈과 이상인 동시에 생존본능이 이끄는 탈출구다. 무조건 가야하는 길이다.


이제 실천에 옮겨야할 시간. 나는 새로운 삶에 맞춰 삶을 정리하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지금껏 구축한 삶 기반의 포기와 파괴에 관한 것이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삶의 근본적인 기반을 뒤흔드는 결정들이 계속 되면서 나는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혼자 세상과 맞서는 것 같은 외로움과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카페의 정리였다. 출판과 컨설팅 사업은 아쿠아에서 독립시키고 마음만 비우면 됐는데 카페는 그렇게 되질 않았다. 카페 아쿠아는 지난 10년의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소중한 집이었으며 우리 부부가 청춘을 바쳐 낳고 키운 소중한 자식이었다. 결국 우리 대신 카페를 맡아 운영할 사람을 찾고 기다리게 되었다.


하지만 후임자를 찾기는 어려웠고 시간이 갈수록 무력감이 찾아들었다. 나중엔 너무 지친 나머지 새로운 삶의 실현 가능성마저도 의심하게 됐다. 설사 카페를 정리한다 해도 부모님과 스태프 들을 설득하는 문제, 여정의 기초 비용을 마련하는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는 늘 산더미 같이 쌓여있고 목표는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어서 길을 떠나야 하는데 현실이 놔주질 않는 상황. 그나마 난 취재 핑계로 돌아다니고 등산과 캠핑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수지는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카페 안에서 모든 걸 참고 견뎌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얼굴과 몸이 계속 부어올랐다. 왜 나는 항상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심각한 고민과 고통 속에 빠지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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