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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영호 Jun 21. 2023

일 년 열두 곳

The birth of Life(삶∞나) Nomad #3



달랏과의 첫 만남


2010년 12월 26일



달랏이 첫 번째 살 곳이 된 것은 수많은 우연이 중첩된 결과였다. 1년 전쯤 출판사를 운영하는 선배 집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발간한 베트남 가이드북의 저자를 만났다. 안 그래도 베트남을 호시탐탐 노리던 나는 그 분에게 다짜고짜 무식한 질문을 던졌다. 나도 받을 때마다 난처해지는 그것. "베트남에서 어디를 제일 좋아하세요?" 


그 때 저자가 말한 지명이 달랏이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저자는 친절하면서도 명확하게 답했다. "고원이라 시원해요. 날씨가 정말 좋죠. 신선한 야채와 농산물이 거기서 생산돼 베트남 전역으로 공급돼요. 프랑스의 영향으로 커피 농장과 와이너리도 많고 유명하구요. 한마디로 풍요로운 땅이에요.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친절해요."


그날 이후 잊고 지냈던 달랏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항공권 예약 때문에 아시아나 직원과 통화할 때였다. 우리가 출발하려고 하는 12월 중순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좌석이 있는 곳이 호치민이라는 것이었다. 지도를 살펴보니 달랏과 호치민은 300km 거리였다. ‘그래. 이 기회에 달랏에 가보자. 일년 열두곳은 달랏에서부터!’




2010년 12월 11일, 수지와 나는 호치민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예정대로라면 1년 후에나 한국 땅을 밟게 될 것이다. 구름 위를 나는 동안 정말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그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은 이번 라이프 노마드 프로젝트에 대한 생소하고도 낯선 느낌이었다. 


여행이든 살러 가는 거든 해외를 나갈 때는 늘 머리가 복잡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갈 곳과 할 일의 리스트가 있고 걱정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나 다르다. 스케줄도 없고 할 일도 없다. 한 달씩 열두 곳에서 잘 살기만 하면 된다. 결국 1년이란 긴 시간, 삶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차이가 생긴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불안과 혼란감은 전보다 더 컸다. 시간을 채워주고 마음을 붙잡아주는 확실한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평생 지구에서 중력에 끌려 다니며 살다가 처음 우주로 나와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까 몸과 마음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호치민 공항에는 마니또님과 하늬바람님이 나와 계셨다. 몇 년 전 두 분이 베트남으로 이사한 후 격조했었지만 어색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을 사랑하는 여행자로서, 아쿠아에서 오랜 기간 쌓아온 이해와 공감대 덕분일 것이다. 두 분이 사는 아파트에 짐을 푼 수지와 나는 모든 걱정을 털어내고 밤늦게까지 대화를 즐겼다.


그렇게 이틀간 잘 쉬며 적응하는 시간을 가진 뒤 수지와 나는 고속 버스를 타고 달랏으로 향했다. 시야가 확 터진 맨 앞자리에 앉게 된 행운이 악몽으로 바뀐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기사님이 끊임없이 눌러대는 경적 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어야했고 오토바이를 들이받을 것 같은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게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조차 달랏에 대한 기대감을 더 높이게 만들 뿐이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구릉 지대를 지나 달랏 입구의 청량한 소나무 숲을 통과해 시내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호치민 시내의 복잡함이나 공해와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여기도 오토바이가 많긴 했지만 오히려 활력과 생기 있게 느껴졌다. 




싱카페 근처에 1박 묵을 숙소를 잡고 바로 걸어 나왔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려있었지만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이미 버스에서 이 도시가 얼마나 안전하고 활기찬 곳인지 느꼈기 때문이었다. 밤공기는 쌀쌀하면서도 상쾌했다. 진짜 입게 될까 반신반의하면서 가져온 따뜻한 옷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달랏 시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원형의 큰 광장이 수많은 인파에 의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또 단순히 물건만 팔고 사는 게 아니라 음식을 먹고 놀이를 하며 다양하게 삶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무슨 큰 축제라도 열린 것 같았다. 우리는 인파 속으로 뛰어들어 축제를 함께 즐기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털옷과 파카 같은 겨울옷 파는 노점상이었다. 달랏의 특산물인 과일 말린 것이나 와인을 파는 곳도 눈에 띄었다. 커피 원두 가게에서는 초콜릿향의 커피 냄새가 진동했다. 식물과 화분을 파는 가게도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닭고기와 돼지 꼬치를 숯불에 굽는 노점도 많았다.




우리는 광장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계단에 앉아 숯불에 구운 고기로 달랏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달랏에서 이렇게 첫날밤을 맞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새로운 세상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서 불안과 스트레스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국적이고 활기 넘치는 달랏 시장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환영 선물이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한다. 게 중에는 직접 실물을 보고 만져보고 심지어 내 몸에 잘 맞는지 입어보고 실컷 체험해보고 나서 하는 안정적인 선택도 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한 장의 사진이나 주변 사람이 흘린 한 마디, 혹은 그 이름이 풍기는 느낌만으로 결정해야 하는 모험적인 선택도 있다.


여행은 대부분 후자의 경우고 그래서 여행은 도박에 가깝다. 그래서 어렵게 내린 모험적인 선택이 딱 맞는 순간 복권 번호를 딱 맞춘 것 같은 짜릿함을 맛보게 된다. 달랏은 우리에게 그런 곳이었다. 지금 막 만났을 뿐이지만 새로운 삶의 실험을 위한 최적의 장소에, 그것도 딱 맞는 타이밍에 도착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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