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Vanity
언제부터일까. 나를 괴롭히는 것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괴롭히는 것들이 아닌, 나의 결점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창 나의 삶에 관한 고찰,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할 무렵이다.
내 직업은, 모든 직업에서는, 성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 물론, 그 조건들을 갖추지 않고도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외동으로 거의 30년을 자라온 나는, 더 이상 동생이 생기지 않겠지만, 모든 일을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나 자신은 ’무조건 성공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경솔하다. 아니, 패기만만한 20대 청년의 꿈일 수도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도대체 뭘 믿고 나대냐?’라고 어렸던 나 자신에게 전해주고 싶다. 전공자만큼의 숙련도와 정신력, 그렇다고 창의력도 뛰어나지 않다. 20대의 패기라고 하기엔 노력도 부족하다. 실력만 놓고 보았을 때도, 나는 가난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한국 나이로 30세를 앞두고 있는 나는, 대기업을 다니는 친구들과 수입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주 오랜 기간 알아온 터라, 대략적인 연봉을 아는 편. 친구들도 나의 형편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출발선이 다른 거라 애써 자신을 격려하기는커녕, 그 사이에서 나는 괜찮다, 먹고살만하다며 득이 없는 객기를 부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대화도 잘 안 되는 게, ‘상위고과’라는 단어를 몰라 사전을 뒤적거리기 마련이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술을 반기듯, 축하한다는 말을 주고받는다.
부모님과의 약속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걸 허락하고 지원해주는 대신, 28살까지 해보고 안되면 포기하라고. 28살이 된 나는 음악을 시작한 지 6년 차가 되었고, 이상하게도 주변 뮤지션들에 비해 운이 좋기 시작했다. 같이 음악학원을 다니던 친구들은 하나둘씩 다른 길로 빠져있고, 나는 나태함과의 싸움을 이어가다 얻어걸린 느낌으로, 아주 럭키하게도 음원으로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던 터였다. 사실 26살의 시절부터 음원으로 월세를 낼 수 있는 수준이 되자, 부모님께서는 마지노선을 30살로 수정을 해주셨다. 부모님도 나의 유망함을 보셨나(나는 유망하다고 통계로 설득시켰다) 싶었다.
나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언제나 알고 있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어디서 부터 고쳐 나가야 할지 몰라서. 그 부족함을 지속적으로 감추고 있다. 물병에 물이 모자라다면 물을 채워 넣어야 하는 법. 사실 무엇을 담던 상관없다. 하지만 물이 조금 남아있는 병에 맥주를 담거나 기름을 담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무엇을 담을지 몰라, 물이 채워져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게 하는 것. 내가 부족한 부분이 이미 채워졌다는 생각을 하는 것. 아, 얼마나 편리하고 얼마나 배부른가. 얼마나 달콤한가, 나의 허영심이여.
나의 허영심은 뽐내고자 하는 친구가 아니다. 결점들을 가려주는 피부화장 같다. 나는 항상 허영이 가득한 사람들은 기피했다. 그들과 거리를 두고, 그들을 욕하고. 20대를 지내며 사용했던 노트들에는 상당히 일관적으로, 그리고 주기적으로 허영심에 대해 욕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최근에서야 나의 허영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과정이 쉬운 회피는 달콤하고, 발가 벗겨진 채 세상과 마주할 용기는 없다. 나에 대해 말할 거리가 없어서 내가 누굴 아는지, 어떤 것들을 아는지에 대해 얘기해 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다. 지난주에도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 친구와 의절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의절을 해야 더 나은 사람이 될까? 안타깝지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태생적으로 지닌 기질이 몇 가지 있다. 나태함, 인내심 부족과 허영심. 나태함에 대해서는 일찍이 인지를 하고 고치려고 노력해 왔다. 물론 잘 되진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태한 사람이 나태함을 통제하려 드니, 양측의 나 씨 집안에서 합심한 듯 부지런함을 끌어내린다. 작심삼일은 기필코 나를 위한 사자성어 같다. 마치 작심삼일이 나를 잉태한 듯하다. 아무쪼록 허영심도 비슷한 수순을 거치지 않을까 싶다. 고치려고 할수록 더욱 나의 통제에서 벗어날까 봐 걱정이다.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저명한 고대와 근대의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말이 쉽지, 그걸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고 싶다. 당연히 그러고 싶지. 누군들 그게 싫어서 이러고 있냐고 묻고 싶다.
10년 전의 나는 앞자리가 2로 되는 순간, 반짝이는 효과와 함께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마치 심즈처럼. 실망스럽게도 그런 순간은 없었다. 글을 쓸수록 나의 결점들이 더욱 생각나서 마음이 좋지 않지만, 나의 결점을 세상에 공개하는 이 과정이 어른이 되는 거라면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어야지. 사실 곧 있을 앞자리의 변화와, 10년 뒤에도 아주 큰 차이는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건배 제의를 하고 싶다.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나의 소재가 되어준. 마음이 가난할 때, 지갑이 가난할 때 나를 배 불려준 달콤한 허영심.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