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함이 허무함이 되었다
새해가 밝았다. 정확히 3일째다. 서른, 만으로 28세다. 살면서 목표와 결심들을 세우고, 수많았던 나의 생일과 많은 이들의 생일, 혹은 특별한 날들을 겪었다. 지금껏 변화가 필요할 때가 되면 항상 그렇게, 노트를 펼치고 계획을 세웠다. 작년에도 이랬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매년 12월 31일이 되면, 그저 지나가는 하루일 뿐이지만 기대고 싶어 진다. 새해 결심이라는 녀석에게.
매년 똑같이 그랬다. 작년을 제외하고, 신년 계획이랍시고 머릿속에 두고 있던 일들에 번호를 매겨 나열한다. 거기서 조금 발전시킨다면 각 번호마다 상세한 설명 한 두줄. 뭐 초등학생이 계획을 세워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근 2년간은 탄탄한 두 페이지 짜리 계획을 주기적으로 세웠다. 계획이라기 보단 커다란 목표들에 가까웠다. 예를 들자면, 올해는 월 수입 2백만 원, 그러기 위해선 앨범 발매 꾸준히, 그러기 위해선 매일 연습; 이런 떼깔만 좋고 알맹이 없는 말들만 나열해 왔다.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이런 식의 명확하지 않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놓고 따라가려 해도 그다지 의욕이 나질 않는다.
신년맞이 신년운세를 2022년 마지막 날에 봤다. 점신 어플에서 광고 붙여주면 좋겠다. 나머지 내용들은 재미 삼아 봤지만 유독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 있다. ‘계획을 세우고 의식적으로 실천을 해야 합니다.’ 머릿속에 계획이라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맴돌았다. ‘나는 계획을 제대로 세워본 적이 있는가’부터 ’내 MBTI 마지막 자리는 P인데, 어떻게 J가 되는가‘ 까지.
MBTI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 마디하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항상 J형 인간들이 부러웠다. 멋진 계획을 세워놓고 실천하지 못하기에, 그들이 신기했다. 시간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더 생산적으로 쓸 수 있을지 고민을 하며, J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해도 도무지 깜깜하기만 했다. MBTI 검사를 하는 동안 애매한 점이, 질문은 ’계획을 세우냐?‘ 와 관련되었는데 ‘세우긴 하나 실천하지 않음’과 같은 항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반은 맞아서 중간쯤으로 답을 하고 가는 경향이 있다.
P인 나라서, 즉흥적인 나라서, 싫은 게 아니다. 아니, 또 애매한 것이 난 즉흥적인 것을 싫어한다. 즉흥적인 사람도 아니다. 이렇게 성격유형검사가 무섭다.
신년운세를 보고 J형 인간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일주일을 생활했다. 작은 성공들이 모이는 모습들이 너무도 보람차다. 연간계획, 월간계획, 주간계획을 세운 나는, 조금씩이나마 성과가 있는 모습을 보며 계획을 세우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2주 차에 접어들자, 특수하게도 계획을 실천하지 못하는 날들이 생기더라.
지금은 주간 계획을 세운 지 3주 차다. 2주 차에는 친한 친구의 늦은 입대를 위해, 그리고 연인과의 특별한 날을 위해, 주간 계획의 반도 실천하지 못했다.
이미 많이 밀린 나의 성과들이 다시금 나를 옥죄어 온다. 인생은 계획과 반성인 것인가. 계속해서 제자리에 맴도는 형태이다. 이번주는 심지어 명절이 껴있어서 더욱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송년회와 신년회, 그리고 여러 일들로 인해 나의 라이프 사이클이 무너지는 것. 이것을 난 혐오 한다. 흐름이 끊기고, 다시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느 순간부터 특별한 날이 특별하지 않게 되었다. 수많은 기대와 실망이 뒤엉키고, 시행과 착오가 겹치면서, 더 이상 나는 순수하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산타의 선물을 바라고, 생일을 기다리며 거대한 축하를 바라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도해봐야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 특별한 날에 조금 더 특별함을 기대하는 일.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들이지만, 허무를 느끼는 것 마저도 살아있는 행복 아닌가. 안 되는 것을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이, 살아있는 행복 아닌가. 허무함도 끌어안아주자. J형 인간이 되길 바라는 P형 인간의 실패도 끌어안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