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거진 ] 불운에 대처하는 유쾌한 견해
아파트 층 수는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낮은 층은 분명 아니었고 높은 층으로 올라갔던 건 맞다.
왜냐하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4일 전 등기 속달로 부친 내 편지를 보기나 했을까? 혹시 동명이인 아닐까? 그의 이름이 희귀한 이름도 안닌데..
그렇다면 생뚱맞은 사람한테 장문의 편지를 썼다는 거고, 그걸 받은 당사자는 기분이 어땠을까?
정말 그가 아님 어떡하지? 경찰에 신고한 거 아냐? 입장을 바꿔봐도 웬 이상한 등기우편이 왔는데 편지 보낸 황당한 놈이 일방적으로 오늘 저녁 찾아간다 했으니, 나 같아도..
그런데 진짜 그가 맞다면, 과연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괜히 또라이 짓하다 인생 답 없어지는거 아냐?
무엇보다 그는 양지의 기업 총수가 아닌, 음지의 ‘구슬업계’ 대부라는 점에서 컬러가 다르잖아? 김태촌이라는 그 바닥 인플루언스도 측근이라는데.. 개 맞듯 맞고 돌아서는 정도야 각오하지만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제일 난감한 건 집 주소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경우인데, 뭐라고 하지? 잘못 말하면 걷잡을 수 없을 텐데. 그렇다고 바른대로 말하자니 그건 더 불쾌해할 거고. 난 왜 이렇게 대책 없이 저지르지.. 이것도 병인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그 짧은 순간에 별의별 생각이 쏟아지듯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느새 문이 스르륵~ 열리며 나는 압구정 00 아파트 어느 집 문 앞에 멈춰 서고야 말았다.
인터폰이 눈 앞으로 익스트림 클로즈업 되듯 빨려왔고, 그 버튼을 누를까 말까 나는 한참을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 잡고 크게 심호흡할 때였다. 웬 여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개 한 마리를 끌고서.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마주쳤기에 서로 흠칫 놀랐다. 바짝 긴장한 채로도 애써 미소를 지어줬건만 여자는 무표정히 외면했다. 그러자 덜래 덜래 여자 뒤를 따라가던 개가 문득 나를 뒤돌아 봤다.
‘너도 뻘짓하고 있구나. 나도 열일하고 있다.’ 하는것만 같은 나를 향한 측은한 눈빛. 그 순간 목줄에 끌려가는 개와 나는 뭔가 뜨거운 동지애 비스무리한걸 교감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 개새퀴가 마치 나를 물어 죽일 듯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래고래 짖어 대는지 그층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나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했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동시에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불안에 휩싸여 몸 둘 바를 몰랐다.
개는 끝까지 악랄하게 짖으며 계단을 끌려 내려가고, 나는 얼른 위층 계단으로 피신해 쪼그리고 앉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적지 않은 분초를 소비해야만 했다. 그러자 슬며시 왠지 모를 오기가 피어올랐다.
오히려 이제까지 조마조마했던 긴장감이 편안하게 녹아내리는 듯한... 나는 그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침없이 계단을 내려와 그 집 앞에 섰다. 그리고 검지를 곧추세우고 비수를 찔러박듯 인터폰을 눌러버렸다.
에라이~ 될 대로 돼라!
“ 딩동, 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