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 (1)

[ 매거진 ] 불운에 대처하는 유쾌한 견해

by Gun Choi


돌이켜 볼때 특히 씁쓸한건 그간의 수 많은 표절과 도용이었다.


초코파이 하나 훔치는 정도는 똘레랑스 차원에서 용서 받을 수 있다지만, 작가가 불면의 밤을 하얗게 새우며 노력했던 영혼의 정수를 훔치는 행위는 절도를 넘어 살인에 준한다 본다.


상실감과 분노에 잘못된 생각도 할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래서 이곳 북미에서는 저작권 침해는 징벌적 손해배상으로까지 단죄한다.


투자사, 제작사, 작가, 감독에 이르기까지 하염없이 베끼더라. 제록스 코리아라는 백인애들 비아냥을 그때 처음 수긍했다. 그 전까지는 핏대 세우며 되도 않는 영어로 그들과 논쟁까지 벌였는데..


하지만 마음 상했다 해서 내가 고국을 사랑하는 열정과 정감어린 유년기의 추억까지 지울 수는 없지않겠나. 흔들림 없다.




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그게 표절이든 재 창작 이든 각자 노력해 성공했다면 한편으로는 나에게도 영광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고자 한다.


오히려 지금 우려스러운건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외전 (G 아카이브/ 불유견)" 더 재미 있어 정작 본문인 단독강화 연재가 묻힐까 하는 거다. 그래서는 안된다. 아무리 와인이 향기롭고 바디감 있다 한들.. 술은 정찬을 보조하는 반주일 뿐이다.


물론 에세이도 꼭 챙겨 주시길 부탁드린다. 맨땅에 헤딩을 하려면 이렇게 '글로벌'하게 해야 한다는 반면교사 모델로 부족함 없다. 그러나 강조했듯 가급적 13도로 정성껏 도정한 단독강화 현미밥부터 맛있게 드시길 권장한다.




아무튼 상술한 그런 섭섭함의 여파였을까? 난 언제부턴지 난독증이 생겨 책 읽기에 적지않은 장애가 있다. 다행히 쓰는 일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게 그나마 이 글을 쓸 수 있게 된 신의 가호다.


그렇게 뜬금없는 난독증에 애를 먹다 최근 수월하게 읽은 한 권의 책이 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다.


그 책이 왜 쉽게 읽혔냐면 과거 여러번 봤기 때문이다. 책마다 묘사는 일부 달라도 서사는 대동소이하니까.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며 다른걸 다 떠나, 헤밍웨이가 왜 노인이 사자 꿈을 꾼다는 상징을 했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본인의 아프리카 경험과 마초 기질 때문이었을까?


고양이과 맹수중 유일하게 사자들만 무리지어 생활을 한다. 즉 사자는 포식 활동중 몸을 다쳐도 웬만해서는 굶어죽지 않는다. 같은 무리 동료가 잡은 고기를 얻어먹으면 되니까. 좀 비굴하더라도..


고독과 시련, 분투라는 은유에 사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사자는 너무 강하고 여럿이다.




사실 소설 속 노인의 고독한 사투는 사자가 아니라 표범에 가깝다.


악전고투 끝에 겨우 잡은 청새치가 상어들에게 게걸스럽게 물어 뜯겨가는 상실감은 도무지 사자로 치환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먹먹함은 ‘외로운 표범’이 더 맞지 않을까?


아프리카 약육강식의 현실에서도 사자는 먹잇감을 뺏으면 뺏지,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 하이에나떼에 못지않은 그들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자의 협력 사냥은 기가 막히다. 말도 못하는 짐승이 어떻게 그런 협공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왜 노인은 사자꿈을 꾸는 걸까? 혼자인데 말이다.


작가의 취향은 존중한다. 또 서양의 사자에 대한 아우라 역시 인정한다. 아시아는 호랑이, 서구는 사자로 그 상징성을 나누니까. 하지만 백보 양보해도 산티아고 노인에게 사자는 아니다. 무려 사자라니..


기왕에 꿈을 꾸려면 코끼리나 고릴라가 더 가슴 웅장해지지 않나? 풍채나 이미지 역시 아프리카 상황에도 걸맞고. 아니면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는 코뿔소도 제격이다. 노인이 고독한 솔로이니까.


'노인은 코뿔소 꿈을 꾼다'거나 '고릴라 꿈을 꾸고있다'가 더 친근하고 푸근하게 느껴진다. 난.


여기서 헤밍웨이가 간과한 녀석이 있다. 표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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