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 (2)

[ 매거진 ] 불운에 대처하는 유쾌한 견해

by Gun Choi


표범은 단독 포식을 한다.


그러다보니 열에 일곱은 힘들게 잡은 먹이감을 여타 경쟁 상대들에 뺏기는게 다반사다.


오죽하면 표범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하이에나들도 있지 않은가. 표범이 잡은 먹이를 뺏거나 주워먹으려고.


나는 표범의 아크로바틱한 묘기에 가까운 사냥 실력에 경외심마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하이에나떼와 와일드독들의 배를 채워주는 표범의 이타적(?) 행위는 가히 ‘희생적 로망’ 이라는 역설로까지 느껴진다. 그건 빼았기는게 아니다. 받아들이는거다.


소설속 산티아고도 자신의 고독한 분투의 산물인 청새치를 강취하는 갈라노떼를 결국 수용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의 섭리로 받아들인다.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백미는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이라기 보다는 “상실에 임하는 자세”라 본다.


격렬한 분노와 저주, 체념과 초월, 또 회한. 격정적으로 요동치는 양가적 감정의 통제야 말로 상실의 승화다.

상실을 패배라 읽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상실은 담담히 받아들일 만한 속성이 있다.


‘살라오’라 불릴 정도로 불운함으로 오히려 치열했던 노인의 형형한 눈빛이 눈에 선하다.




나는 여가 활동이자 취미로 사냥을 즐기기에 이런 맥락에 관해 쓸데없이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사는 북미에는 표범이 없다. 아종인 퓨마(쿠거 또는 마운틴 라이언이라 불린다)는 있지만 그 개체는 사냥 스킬, 치악력등에서 표범보다 클라스가 낮다. 경쟁 상대가 많지 않아 그렇게 진화했는가 싶다.


반면 표범은, 적지않은 경쟁 상대들과 치열하게 사투하며 생존해야 한다. 퓨마에 비하면 만만치 않은 적들이 너무 많다. 사냥하다 다치면 굶어 죽는다.


내가 일개 짐승에게 이토록 친밀감을 갖는 대상은 오직 표범밖에 없다. 혹시 내가 전생에 표범이었을까 정말 심각하게 궁금할 정도로..


물론 22구경으로 잡은 토끼나 까마귀, 스컹크, 두더지 그리고 백야드의 지렁이를 걷어내면서조차 측은지심을 느끼는 나를 볼때 내가 전생에 꼭 표범이었다고 단정하진 못한다.


그러나 내가 전생에 고작 지렁이었다 할지라도, 나는 표범이 너무 좋다. 어렵게 잡아챈 먹잇감을 하이에나들에게 번번히 빼앗길 망정 일말의 미련도 없이 쿨하게 잊고 나무위에서 넉살좋게 잠을 청하는 모습...


개 멋있지 않나? 가끔은 아래를 내려다 보며 아쉬움의 마른 입맛을 다시더라도 말이다.




나는 바다와 아프리카, 상어떼와 청새치, 사자와 아이등 수 많은 소설속 레토릭중에서 산티아고 노인의 꿈이 표범이어야 맞다는 근거있는 주장을 하는 거다.


상실에 대처하는 의연한 상징이야 말로 표범이 딱이며 기똥차기 때문이다. 노벨에서는 이걸 고민했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노벨상은 과학분야 빼고는 그 권위를 잃은 지 오래다. 1953년 53회, 뜬금없이 처칠의 회고록이 수상할때 정작 심사에서 광탈 당한게 바로 헤밍웨이라는 건 다 아는 사실아닌가.


새끼 사자들만이 삶의 투쟁 뒤에 오는 '젊음과 원초적 평온함'의 비유여서는 안된다. 새끼 표범들도 얼마나 순수하고 생동감 넘치는 장난꾸러기 개구장이들인데..


심지어 사자들처럼 공동육아를 담당할 이모나 삼촌도 없다. 그럼에도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보는게 표범이다.


대 문호 헤밍웨이는 왜 표범을 몰랐을까? 이 양반, 세렝게티에서 설마 주야장천 사파리만 했던 건 아니겠지?


소설 속 산티아고 노인은 오늘도 변함없이 사자 꿈을 꾸고 있겠지만,


나는 나무 위에서 물끄러미 아래를 굽어 보는 표범 꿈을 꾼다. 몰아일체의 동질감과 깊은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고독한 표범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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