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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김 Jun 16. 2024

춘천, 은밀한 데이트

국립춘천박물관

  가끔 현실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왜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냥 훨훨 날고 싶은 것이다. 남편 곁을 잠시 떠나고 싶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기다렸다는 듯이 백번 공감했다. 나는 친구와 함께할 1박 2일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춘천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막국수와 닭갈비가 있다. 손님이 오시면 음식 대접할 메뉴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가벼운 점심 식사로는 막국수와 녹두전이 제격이고, 푸짐한 저녁 식사라면 닭갈비를 고른다. 닭갈비를 다 먹을 때쯤, 국수사리나 공깃밥을 추가하면 식당에서 알아서 맛있게 볶아준다. 약간 얼큰하고 개운해서, 속까지 시원한 나박김치 국물에 볶음밥을 곁들이면 그야말로 별미 중의 별미다. 친구는 두 가지 메뉴를 다 좋아한다. 문제는 ‘무엇을 하며 즐길 것인가?’이다.        

  

  6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여름으로 치닫는 날씨에, 나들이하기 좋은 국립춘천박물관이 떠올랐다. 주차하기 좋고 볼거리 많은 곳, 호기심 많은 친구와 박물관 탐방을 느긋하게 해 보기로 맘먹었다.      

  

  국립춘천박물관의 대표 볼거리가 된 ‘창령사 터 오백나한, 나에게로 가는 길’ 상설전시장에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들어서니, 매서운 삭풍 소리가 쉬~이~이 들려온다. 하얀 눈발이 흩날린다. 한 겨울 홀로 깊은 산사의 뜰을 걷는 기분이었다. 군데군데 서 있는 나한상 하나하나와 마주 섰다. 각이 무뎌지고 선이 곰삭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듯하다. 따스한 피가 도는 오래된 이웃처럼 정겹다. 


  투박하게 표현한 나한들의 눈, 코, 입.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인자한 미소는 누구라도 따뜻하게 품어줄 것 같은 넉넉함이 느껴진다. 고집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 고집 끝내 내세울 것 같지 않은 믿음도 있다. 희로애락을 초월한 모습도 보인다. 슬프지만 슬픔을 속으로 삭이는 표정에선 깊은 연민이 느껴진다.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반쯤 깨달음을 얻어 세상과 해탈 사이에 머무는 나한처럼 보인 ‘바위 뒤에 앉은 나한’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깨달음의 경지가 나한이라고 했던가? 시대는 달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이들이 우리 가까이에도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함께 갔던 친구가 놀라며 말했다. “어머! 얘네들이 왜 이곳에 있어?” 오랫동안 교직 생활하면서 교실에서 보았던 제자들을 다시 만난 듯 반가워했다. 새침데기, 코흘리개, 말썽꾸러기, 고집불통 쟁인…. 내가 가르쳤던 녀석들이 지금은 어떻게 자랐을까 궁금했는데, 여기 한 교실에 모아 놓은 것 같다고.


  영월 창령사 오백 나한상은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001년 강원도 영월의 한 토지 소유자가 사찰을 신축하려고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어른 품에 안을 수 있는 정도 크기의 단단한 화강암에 저마다 다른 개성이 드러나는 정겨운 나한들을 어떻게 새겼을까? 모델은 있었나? 한 작가의 작품일까? 

    

  닭갈비를 먹으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박물관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낸 일은 생의 기록이라 했다. 나 역시 창령사 오백 나한상들이 표정으로 들려주는 세월의 이야기를 듣느라 지루한 줄 몰랐다. 창령사 나한들과의 특별한 만남으로 춘천 여행이 한층 깊어졌다.


  다음날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서며 친구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보며 깔깔 웃었다. 서로의 얼굴에서 어제 보았던 나한상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야! 너, 밤새 도를 깨우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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