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

by 아라베스크


역사를 서술하는 형식은 세 가지로, 편년체란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방법과 기전체로 인물의 개인 전기를 중심으로 사건의 일부를 구성하는 방법, 사건을 중심으로 사건의 일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차순으로 한데 모아 일관성을 갖추는 기사본말체가 있다.

다만 이런 형식들이 역사를 체감시키는 데 있어 완벽한 방식이라 볼 수는 없다.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한 작품의 서문에 다음의 글을 남겼는데 “역사를 세기별로 나누는 것은 공간을 점으로 나누고 시간을 순간으로 나누는 것 못지않게 임의적이다.” 임의적이기에 현재가 과거를 규정한다. 사료의 취사선택. 그 기준이 되는 사관. 史라는 한자가 내포하는 꾸며서 아름답다는 뜻. 이것들을 종합하여 나는 역사 기록이란 객관을 주관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모순된 형태를 야기한다고 생각한다. 하비 케이의 말처럼 과거를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고, 어떠한 과거를 가질 것인가란 선택 문제만 대두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근거,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사관에 따라 왜곡되고 은폐되는 것일까? 전해진 역사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면 역사란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그림이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 실재의 개념은 없다. 모형의존적 실재론. 모형이 실재에 부합하느냐의 질문은 무의미하고, 모형이 관찰에 부합하는가란 질문만 유의미하다. 현재에 대한 우리의 관찰이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관찰되지 않는 과거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불확정적이며 다만 가능성들의 스펙트럼으로 존재할 뿐이다.

- 스티븐 호킹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객관적이라 불리는 것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상 속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측면, 아무런 질문 없이 수락된 현상의 인상, 분류된 데이터로 이루어진 현상의 앞면, 즉 본래는 주관적인 것. 그래서 인습적인 판단을 벗어나 사물에 대한 특수한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 생각 없음으로 다수결에 의해 대상을 결정 내리려 들기보다 대상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객관적인 것은 주관적으로 불린다고. 그래서 아도르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객관성의 강요를 일종의 폭력으로 본 것이다. 근데 여기서 이디오진크라지가 나온다 - 병적인 혐오 정도로 이해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취미가 좋아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반대 명제가 이디오진크라지가 된다는 진중권 교수의 말이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양식 개념이 학문적 개념으로 정착하는 과정에는 주관적 경험들이 필요하면서도 객관이란 필요조건 탓에 그것들을 배제해야 하고, 이성은 이디오진크라지라는 창문도 없는 장벽으로 - 무엇도 감안하지 못하는 닫힌 틀로 - 변모해 결국 이 개념에 권력을 쥔 자가 이성의 부재로 사상누각이 된 개념의 자의성을 어떤 의도를 갖고 - 명분으론 객관을 강요하며 - 비난하는 것은 주체들에게서 보존되는 객관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체들이 무력해지길 원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렇게 권력관계와 객관성을 결부시킨 아도르노의 사변은 우리가 흔히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관념과 닮은 구석이 있다. 동양 역사에서 역사서의 성격을 구분하는 정사와 야사는 왕이 집필을 명했냐 명하지 않았냐로 나뉘고, 둘 다 필요로 쓰인다는 점에 객관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주체의 이디오진크라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전해지고 남아 있는 사료들의 어떤 걸, 어떤 의도로 어떻게 취합하느냐란 것은 좋아하는 것의 선택이 아닌 필경사 바틀비처럼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을 피하거나 거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역사서의 편찬이다.


그럼 영화 영화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걸 생각하고 정립하는 게 우리가 영화사를 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영화사가 새로운 것은 앞서 말한 세 가지의 서술 형식을 전혀 따르지 않고 사실상 감독 자신의 기호를 회화와 조각, 설치 미술, 사진, 음악, 내레이션, 편집과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하여 관객에게 보이는 영상을 그것이 사용된 본 영화에서의 맥락과는 무관하게, 때론 중의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독이 표방했던 영화의 역사란 일러스트레이션이 삽입된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역사서와 차이를 두고 구분하려 한 점이 영화사의 표면적 특징이라면 이런 매체 활용이 결국 일반적 역사서 편찬과 상이한 형식과 사관을 갖게 했다는 것이 내면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특징들이 구현되어 편집된 결과물들은 우리가 지식으로써 활용하는 역사서의 성격과 다르다. 하나의 작품. 즉 고백록에 가까운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기존 역사서의 관점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우린 결정적 허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역사를 구성한 사료의 선택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여기에 누락된 수많은 영화들은 어찌할 것이며, 정말 여기서 강조한 양만큼 그의 - 장 뤽 고다르의 자신의 - 영화가 그토록 영화사에 중요한 영화인 것인가? 오늘날에 그의 영화 누벨바그의 손을 맞잡는 인상적인 장면과 자코메티의 조각상이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그 많은 회화와 사진들은 정말 영화란 예술의 -실제론 예술이 된 일부 영화겠지만 - 탄생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인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고다르의 취사선택 기준이 된 사관은 그런 고려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왜 영화를 사랑하는 가를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트라키아의 가인을 인유하여 영화를 설명하고, 꽃을 매개로 한 호접몽의 깨달음으로 영화사를 만들게 된 이유를 설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사란 영화는 영화의 역사라 불릴 수 있는 것일까?


난 3부 A에서 왜 그토록 이탈리아 영화가 감독에게 중요한지를 보고 감동했다. 앞서 개념의 정착을 위해 주관적 경험을 배제해 양식적 개념으로 변모시키며 잃어버리게 된 주관의 토대, 감동의 전거가 내게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말로 다할 수 없던 그 순간은 누군가의 낭만성에 기인했고 그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관이 합의를 이루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되어버린 것을 본 듯했다. 아름다워라. 거기서 보였던 장면들의 반도 어떤 영화의 어떤 부분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내가 생각했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현시가 나열되는 순간이 내가 당대의 감성을, 영화의 역사를 감득하게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자락을, 성서의 한 구절을, 관세음보살이란 이름의 뜻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과도 같은 경이적 체험.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뒤케를 돌아봐도 되는 것이 영화라던 그 말에서 영화는 사실로 다가갈수록 현실에서 멀어지는 환영과도 같아, 에우리뒤케를 돌아봐도 된다는 것이 에우리뒤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보편적 인과와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행위로 촬영되고 나열된다고 한들 그것은 촬영된 장소에서 허위로 꾸며진 이야기였기에 실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오, 반면 영화가 보이는 곳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될 수 있기에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는 그가 영화로 사로잡고자 했던 순간을 그의 기호와 사랑하는 방식, 기억하고 싶은 모습으로 - 그가 고인이 된 프랑수아 트뤼포를 기억하려고 했던 모습처럼 - 기록하듯 담은 하나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진실은 진실이 변한다는 것이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그것은 한 사실이 그 자체로 명백한 지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가변적인 척도라는 것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가장 잘 말해준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삼국사기에서 버려진 이야기라는 것으로 유사를 선택한 일연의 사관은 그래서 합당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실과 그 사실을 가리키는 허구, 소문, 전설 사이에서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진실이 파생한다. 사실만 다루고 허구를 무시한다고 진실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나의 현상에 사실과 허구가 있다면 둘의 관계를 다루고 해석해야 진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다르가 영화사의 말미에 꿈 이야기를 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바라왔던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 그것은 생각지 못한 것을 마주하는 조우가 아니라 잊지 못할 순간을 다시 하고픈 마음과도 같은 것. 꿈에서 꺾은 꽃을 꿈이 깬 뒤에도 손에 쥐고 있던 남자가 고대 사회에서 모든 자연의 변화를 신화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꿈속 모든 게 전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고. 모두에게 소리치며 이 사실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평생을 바치게 되는 것과도 같은 것. 그게 우리가 꿈을 꾸며 서로에게 꿈이 무엇이냐 묻는 이유. 나와 당신이 꿈을 꾼다는 것의 의미. 우리의 꿈이 신비를 닮아있는 이유.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던 나만의 세상의 신비. 순간의 현현을 아이 눈에 각인한 채 사라진 원망스러운 빨간 풍선과도 같은 것. 명백하게 보일수록 더욱 의심하면서도 보다 더 믿고 있는 나 자신을 자각하는 것. 사실의 대립항인 허구가 아닌 진실의 부산물로 여전히 그것을 믿어가며 살아가는 경이로운 경험을 지속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신복은 꿈의 형태와 닮아 있다. 우리의 지나간 과거는 꿈과도 닮아 있다. 그래서 우리의 지나간 과거는 신복함으로 신화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사실 여부보다 그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나는 과정과 경험, 그것으로 얻게 된 하나의 깨달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을 밖에서 바라보게 해주는, 세상이란 플랫 랜드에서 들어 올려져 바라보는 시각을 줄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보르헤스의 단편 은혜의 밤 마지막 구절을 남긴다. 이 구절에는 삶의 고통으로 글썽이는 우리의 눈물을 비춰 찬란한 스펙트럼으로 세상을 조감할 수 있게 하는 인생의 신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세상에 기적을 내리는 신비, 참된 열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그 두 가지의 본질적인 것들이 드러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거지요. 세월이 지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들려주었는지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실제로 일어났던 그 사건들인지, 아니면 그것들이 내가 들려주었던 언어들인지 확실치가 않아요. 아마 라 까우띠바에게도 인디언 습격과 관련하여 같은 일이 벌어졌었겠지요. 이제는 더 이상 모레이라가 죽는 것을 본 사람이 나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닌 거예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온존하는 여성성